<131화>
라파일은 펠리온이 익히 알던 얼굴이 아니었다.
본래의 얼굴도, 이라네를 찾아갔을 때의 얼굴도, 샤마흐의 신관으로 위장해 약혼식에 참석했을 때의 얼굴도 아니었다.
펠리온이 아는 모습은 하나도 없었다. 같은 것이라고는 손등에 새겨진 보라색 태양뿐이었지만 펠리온은 단번에 라파일을 알아봤다.
그는 라파일과 마주 섰다.
허공에 떠 있던 손수건이 느리게 가라앉아 펠리온의 손바닥으로 내려왔다.
그 손수건을 움켜쥐며 펠리온이 생긋 웃었다.
“안녕, 라파일. 오랜만이야.”
“…….”
“이건 원래 공주님 전용 인사인데 너니까 특별히 해 준거야. 영광이지?”
펠리온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질수록 라파일의 표정은 굳어 갔다.
“펠리온?”
펠리온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라네가 죽은 뒤에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마 신에게서 벗어난 성자라 영향을 덜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도 알아봐 주니까 고맙네.”
“어떻게……. 펠리온은 그때 분명 나 때문에…….”
라파일의 볼 위로 옅은 눈물 자국이 생겼다.
“살아 있었습니까? 그런데 왜……. 혹시 다시 태어난 겁니까? 지금에서야 전생이 떠오른 건가요?”
천천히 다가온 라파일이 양손을 뻗었다. 그는 그대로 펠리온의 팔뚝을 움켜쥔 채 무너졌다.
흐느끼는 소리가 폐허가 된 사원을 떠돌았다.
“미안해요, 펠리온. 내가 폭주하지만 않았다면, 당신이 휘말려 죽는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합니다.”
펠리온은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숙인 라파일을 바라만 보았다.
그가 라파일을 찾은 건 순전히 이라네를 위해서였다.
영혼을 다른 몸으로 옮기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특정 기억만을 떼어내서 옮기는 것은 영혼을 찢어 제 기능을 못하게 하는 미친 짓이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온 것이건만,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는 라파일을 마주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라네가 새 삶을 얻고 펠리온이 저주에서 벗어나 행복을 되찾는 동안, 라파일은 살아 있는 망령이 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울어. 내가 그렇게 반가워?”
실없는 농담을 던져 봤지만 라파일은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미안하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펠리온은 우는 라파일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빈말로라도 막역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였다.
라파일에게 펠리온은 연적이었고, 펠리온에게 라파일은 중간에 이라네를 가로채 간 놈이었다.
얄미운 마음에 라파일이 대놓고 질투심을 드러낼 때면 펠리온은 놓치지 않고 그의 속을 긁으며 놀려 먹었다.
그렇다고 라파일을 원망하거나 증오한 건 아니었다. 그런 마음을 품기엔, 펠리온은 20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오랜 시간을 적인 듯 친구인 듯 모호한 관계로 지냈다. 펠리온은 라파일도 자신을 그 정도로 생각하리라고 여겼다.
라파일이 폭주한 날, 그가 펠리온의 숨과 맥박을 확인하며 절규하던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탓이었다.
라파일은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않고 며칠이나 펠리온의 옆에 앉아 있다가 어느 날 돌연 사라졌다.
펠리온이 몸을 회복한 것은 라파일의 행적을 알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죽지 않았었으니까.”
라파일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천천히 펠리온을 훑어봤다.
드래곤의 심장은 신에게서 훔친 힘과 드래곤의 마력을 영혼에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것을 돌려받은 펠리온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기운은 아주 오래된 고목처럼 압도적이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런 힘을 25살도 되지 않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당신, 다시 태어난 게 아니군요.”
“응. 네가 폭주했을 때는 내가 너를 막느라 마력을 너무 많이 써서 육체가 죽은 것처럼 보였던 거야.”
펠리온은 라파일이 이런 기행을 벌인 이유가 죄책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리고 죄책감을 덜어 주면 적어도 대화를 할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일단 말이 통하면 그를 설득할 자신도 있었다.
“그러니까 라파일. 넌 아무도 죽인 적이 없어. 이라네도-”
“그럼 당신은 로그리예로서 계속 폐하 곁에 있었던 겁니까?”
말을 끊어 낸 라파일이 전혀 엉뚱한 말을 꺼냈다.
피가 흐를 것처럼 충혈된 흰자위와 흐린 홍채. 라파일의 눈동자는 마치 광기를 색으로 만들어 담아 놓은 것만 같았다.
“말해 보세요, 펠리온. 로그리예로 위장해 폐하의 곁을 독차지하려 했습니까?!”
갑자기 격양된 목소리에 펠리온은 당혹스러웠다. 그는 제 멱살을 잡아챈 라파일의 손을 떼어 놓고 뒤로 물러났다.
“진정해, 라파일. 나는 대화를 하러 온 거야.”
라파일은 흐리멍덩한 눈으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펠리온이 들고 있던 손수건이 화염에 휩싸였다.
펠리온은 마력으로 불을 진압하며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손수건은 이미 추적 능력을 상실한 후였다.
손수건을 가루로 만들어 털어낸 펠리온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말 좀 들어 봐. 오늘 키네시아에게 갔다가 알아낸 게 있어. 이라네는 아무래도 독에 당한 것 같아. 알겠어? 네가 죽인 게 아니라는 뜻이야.”
라파일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미소 지었다.
“제가 그걸 모를 것 같습니까?”
이라네가 죽은 뒤, 라파일은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그녀의 방에 있었다.
몇 날 며칠을 기도만 하자 시종장이 제발 물이라도 드시라며 그에게 이라네의 방에 놓여있던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주었다.
라파일은 시종장의 성화를 이기지 못해 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마자 신성력이 목과 위장 쪽으로 모여드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건 독이었다.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나 독이 확실했다. 라파일은 비밀리에 범인을 색출해 냈다. 그러나 추궁을 하기도 전에 범인은 한 방울씩 섞어 쓰던 독약을 병째로 들이켰다.
라파일은 범인을 살리려 했다.
그가 성자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범인이 쉽고 편하게 죽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범인을 살려서 배후를 추궁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선사하기 위해 그는 신성력을 사용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순식간에 범인을 감쌌다. 그러나 해독이 되기는커녕, 범인은 병에 걸린 나무처럼 검게 물들며 말라비틀어져 버렸다.
그때, 라파일은 깨달았다.
제 신성력이 이라네의 생명을 아주 천천히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의 일들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아주 작은 상처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했다. 그럴 때면 이라네는 항상 그를 말렸다.
“이 정도는 그냥 내버려 둬도 나아.”
“남편이 성자인데 왜 굳이 아프려고 하십니까, 폐하.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이라네가 신성력을 거부할 때도 라파일은 기어이 신성력으로 그녀를 치료했다.
이라네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런 순수한 의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이 끝나자 신전에서도 은근히 라파일의 복귀를 원했다. 민심을 들먹이며 그녀의 곁에 있었지만 이라네 황제를 향한 국민들의 지지와 사랑은 커져만 갔고, 민심조차 궁전에 머무는 핑계가 될 수 없었다.
이라네에게 그는 더 이상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라파일은 이라네의 곁에 남으려면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자리는 상대적으로 더 쓸모 있는 펠리온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 수단으로 라파일은 신성력을 사용했다. 그녀를 치료하고 보호해 자신이 쓸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계약이 끝났음에도 이라네의 곁에 있고 싶다는, 마음을 얻진 못해도 몸만은 제 곁에 두겠다는 욕망으로 신의 힘을 사용했다.
자신의 집착이, 욕망과 질투가, 이라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설명한다 한들 펠리온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는 뭐든 쉽게 포기하니까.’
라파일은 증오가 넘실거리는 눈으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그는 라파일을 신전으로 보내고 이라네의 약혼자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라네의 선택을 존중하며 라파일을 받아들였다.
이라네의 죽음 앞에서도 어쩔 수 없다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런 주제에 또 폐하의 곁을 차지해?’
라파일은 손을 들었다. 세계의 법칙을 만들었던 힘이 순리를 거스르는 육체에 담겼다.
그러자 라파일의 몸이 검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그 힘을 날카롭게 변형시켰다.
“펠리온. 내가 이 힘을 어떻게 얻었는지 아십니까?”
“…….”
“당신이 죽은 뒤, 나는 저주스러운 샤마흐의 신전을 무너트리고 신관들을 죽여 그들의 신성력을 빨아들였습니다.”
펠리온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가 충격에 휩싸여 빈틈을 보이자마자 라파일은 손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벼려진 기운이 피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펠리온은 본능적으로 방어 막을 여러 겹 둘렀다.
-쾅!
방어 막에 부딪힌 라파일의 힘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땅에 손톱자국 같은 상처를 남겼다.
암석이 쪼개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며 사방으로 돌이 튀고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일단 제압해야겠어.’
펠리온은 바람으로 먼지를 날려 보내며 순간 이동으로 라파일의 뒤에서 나타났다.
마력을 느낀 라파일이 뒤돌아 펠리온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