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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30화 (130/151)

<130화>

키네시아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대마법사의 힘으로도 이 저주를 풀 수 없다는 말이……죠?”

이제야 펠리온이 대마법사라는 것을 믿게 되었는지 키네시아의 말투가 어색해졌다. 펠리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기침을 터트렸다.

키네시아가 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펠리온에게 건넸다.

“사실 플로레타를 부른 것도 이것 때문이었어……, 요. 그런데 플로레타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어서…….”

무작정 나에게 말을 안 한 게 아니라 키네시아도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궁전을 맡기고 나와 놓고도 아직 키네시아를 너무 어리게 보고 있었나 보다.

속으로 반성하며 펠리온을 부축했다. 방 안은 망가진 곳이 없이 멀쩡했다. 나는 제자리에 있는 소파로 향하며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저주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거야?”

“그냥 간헐적으로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 만약 라파일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그 강도가 더 세지고.”

키네시아가 대답하며 나와 펠리온의 맞은편에 앉았다. 펠리온은 기운이 없는지 내게 기대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키네시아의 손을 보았다.

온통 검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몰랐는데, 자세히 보니 손톱이 죄 빠졌다가 다시 난 흔적이 보였다.

내 시선을 느낀 키네시아가 다시 장갑을 꼈다.

하지만 이미 엉망이 된 그녀의 손을 보고 난 뒤였다.

‘저게 라파일 때문이라 이거지.’

가슴이 무겁고 갈비뼈가 조여드는 것 같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속이 상했다.

그래도 손을 보이기 싫어하는 키네시아의 마음을 존중하기로 했다. 나는 구태여 그녀의 손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펠리온의 시선 역시 키네시아의 손을 향해 있었다.

키네시아가 나와 펠리온을 번갈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고개를 들자 그녀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산책 좀 하고 올게.”

“자리를 피하려는 거지? 그럴 필요 없어.”

내 말에 펠리온이 몸을 바로 세웠다. 나가려던 키네시아의 몸이 둥실 떠오르더니 다시 소파에 앉혀졌다.

“이라네. 국왕 부부도 보고 갈 거지?”

“너 순간이동 같은 고위 마법 써도 괜찮겠어?”

“응. 그냥 밀어 내는 힘이 너무 강해서 잠깐 기절했던 것뿐이야. 이것 봐. 피도 안 토했잖아.”

그러더니 입을 쩍 벌려 내게 입 안을 보여 주었다. 나는 새하얀 치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손수 펠리온의 입을 닫아 주었다.

“룩소르와 오틸리에는 다음에 만나고 일단은 돌아가는 게 낫겠어. 더 시간을 지체하면 아르만이 텅 빈 방을 발견하고 걱정할 수도 있으니까.”

펠리온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자 키네시아가 당황한 얼굴로 우리를 따라 일어났다.

“가려고? 리아, 나는, 너희가 불편하다거나 쫓아내려던 건 아니었어.”

“알아, 키네시아.”

나는 탁자를 돌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색하게 팔을 뻗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키네시아를 꽉 끌어안았다. 키네시아가 한 손으로 나를 토닥였다.

“나도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너도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내게 말해.”

“……알겠어, 리아.”

한 박자 늦는 대답이 어쩐지 불안했다.

나는 포옹을 풀고 키네시아를 똑바로 마주 봤다.

“절대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마.”

“…….”

“이건 네 동생으로서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키네시아.”

눈을 크게 뜬 채 굳은 키네시아를 두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편지할게.”

말을 마치자마자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주변 풍경이 변했다.

아르만의 옆 방, 우리가 잡았던 여관방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쓸어 넘겼다. 키네시아의 보라색 손이 잔상으로 남아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리고 펠리온이 쓰러졌던 순간도.

거미가 있던 동굴은 너무 어두웠고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가 쓰러진 것을 목도하고 나니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펠리온.”

펠리온이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그 손을 꼭 맞잡았다.

라파일은 펠리온에게 보인 질투에는 살기가 섞여 있었다. 언젠가 라파일은 나와 마주할 것이고 펠리온도 알아보게 되겠지.

만약, 아주 만약에 라파일이 펠리온을 죽인다면? 펠리온을 잃으면 나는…….

“이라네.”

그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끊어 냈다.

펠리온이 내 볼을 감싸 시선을 맞춰 왔다. 그의 눈동자는 내가 알던, 시리도록 파란색이었다.

그가 이마를 맞댔다.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가정에 휩쓸리지 마. 나는 지금 네 곁에 있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은 라파일을 찾아 그의 계획을 막아야 한다. 이제는 키네시아에게 걸린 저주까지 풀어야 했다.

스페르모가 라파일의 부하라고 했으니 그의 주변을 뒤지면 단서가 나오겠지.

“펠리온. 레튜니아 황실에 잠입할 수 있겠어?”

“당연한 말을.”

펠리온이 장난스럽게 오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또 퍽 어울려 웃음이 나왔다.

당장 떠나자고 하려는데 펠리온이 나를 끌어안은 채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깐 펠리온을 보았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벗어나려 하자마자 펠리온이 내 허리를 휘어 감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신발이 저절로 벗겨져 침대 아래에 가지런히 놓였다. 곧 시원한 기운이 몸을 감싸더니 찜찜한 느낌이 사라졌다.

“그런데 지금은 쉬자, 자기야. 어제도 그렇고 한숨도 안 잤잖아.”

“하지만…….”

“‘하지만’ 금지. 무조건 쉬어야 해. 쉬어야 갈 거야.”

나는 하는 수 없이 몸에 힘을 빼고 펠리온의 품에 안겼다. 그가 나를 단단하게 안으며 내 머리카락에 볼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이제 잘 시간이야, 공주님.”

그 말을 끝으로 의식이 수면 밑으로 깊게 가라앉았다.

***

펠리온은 잠든 이라네리아의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수면이 필요하지 않은 몸을 가졌지만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키네시아의 손등에 있던 무늬를 떠올렸다.

그 안에 담긴 힘은 영혼을 옭아맬 정도로 거대했다.

일반적인 성자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그렇다고 펠리온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키네시아의 손등에서 문양을 지우지 못한 이유는 그것이 저주가 아닌 탓이었다.

그건 계약이었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의 동의하에 맺어진 것.

아마 키네시아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라파일에게서 무언가를 받았을 것이다. 물질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없애면 그만이지만, 물질적인 게 아니라면 계약을 깨는 게 조금 복잡해진다.

‘이라네가 알면 신경 쓰겠지.’

아까도 키네시아의 손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었다.

환생할 때마다 성격이나 표현하는 방법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라네리아는 자기 사람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러니 그녀가 신경 쓰기 전에 맹약을 깨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라파일을 찾아가겠지. 그 정신 나간 놈과 이라네리아가 마주치는 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펠리온은 못마땅함에 한숨을 내쉬었다가 제 옆의 이라네리아를 보고 녹아내리듯 미소 지었다.

그는 이라네리아가 더 깊이 잠들도록 한 다음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이라네. 잠시 나갔다 올 테니까 푹 쉬고 있어.”

펠리온은 이라네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품에서 키네시아의 손수건을 꺼냈다.

폭발이 있을 때, 키네시아에게서 빼내 온 기운을 손수건에 불어넣자 손수건에 보라색 태양 문양이 떠올랐다.

“너에게 깃든 힘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알려줘.”

펠리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수건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펠리온은 손수건을 한번 본 뒤 이라네에게로 돌아와 이불을 잘 덮어 주고 마법으로 종이에 글을 새겼다.

[공주님 주무시니까 방해 금지]

쪽지를 아르만의 방에 이동시킨 펠리온은 방 안에 보호 마법을 중첩으로 설치하고 손수건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곧 보랏빛이 펠리온을 집어삼켰다.

펠리온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여관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새까맣게 죽어 버린 공터 위에 세워졌던 순백의 사원. 한때는 웅장한 모습을 자랑했으나 지금은 그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붕은 무너지고 기둥은 금이 가거나 부러져 있었다.

그는 툭 건들면 무너질 것 같은 건물 안으로 향했다. 바닥의 대리석은 깨지거나 위로 불쑥 치솟아 있었다.

울퉁불퉁한 땅을 밟으면서 걸어 들어가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찾아왔나 했는데, 로그리예 공자였군요.”

펠리온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라파일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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