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키네시아는 자신을 못 믿는 것이냐며 소리치거나 상처받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담담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지시를 받긴 했지만, 내가 어떻게 부모님을 죽이겠어.”
“그럼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연락 수단이 없었던 것도 아니잖아.”
키네시아가 손으로 퍼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리아 너도 일이 있어서 궁전을 나간 건데 내가 자꾸 귀찮게 할 순 없잖아.”
저 말을 믿어야 할까? 혹시 라파일을 따르게 된 건 아닐까?
무슨 생각인지 들여다보려 했으나 키네시아의 눈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애정도 담겨 있지 않은 듯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은 마치……, 황제일 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그게 불안하고 섬뜩했다.
황제였을 때의 나는 그다지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탓이다.
나는 복잡한 심경을 다스리기 위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정말 그 이유뿐이야?”
키네시아의 표정 없는 얼굴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당장 대답하지 않고 나를 빤히 보다가 낮게 읊조렸다.
“날 믿지 못하는구나.”
“일부러 표정을 숨기고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널 믿겠어, 키네시아.”
“그럼 너는. 나에게 하나도 숨기는 게 없었어? 네가 왜 보라색 태양을 찾는지도, 그 문양의 주인이 성 라파일이라는 것도 말해 준 적 없잖아!”
“그걸 말하면 뭐가 달…….”
“잠깐, 잠깐!”
내 말을 끊고 펠리온이 키네시아와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에이. 왜 이렇게 살벌해? 오랜만에 본 건데 이러다 싸우겠네.”
펠리온이 내 어깨를 잡아 돌려 소파 쪽으로 밀며 키네시아에게는 와서 앉으라고 눈짓했다. 순순히 마주 앉았지만 싸늘한 정적은 여전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키네시아를 보았다.
사실, 내가 이렇게 화낼 만한 일은 아니었다. 키네시아는 왕세자이고, 자신이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일은 굳이 나에게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키네시아의 말처럼 나 역시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밝히진 않았다.
궁전을 나온 것만 해도 레바나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라파일의 실험을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황제는 쉽게 사과의 말을 올리는 게 아니지만, 지금 나는 황제가 아니니까.
“미안해.”
키네시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내가 너무 흥분했어. 네가 아주 예전부터 라파일과 아는 사이라고 생각했거든. 그의 편에 서서 가족들을 헤치진 않을까 무서웠어.”
“나는…….”
키네시아가 말끝을 흐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다가 의외의 말을 툭 꺼냈다.
“아무래도 저주에 걸린 것 같아.”
그녀가 장갑을 살짝 벗었다. 드러난 손등 위에는 보라색 불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게 뭐야? 라파일의 짓이야?”
키네시아가 모호하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아왔었어. 손을 잡았는데 그때부터…….”
나는 보라색으로 뒤덮인 키네시아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닿기도 전에 키네시아가 말을 멈추고 움찔거리며 손을 뒤로 뺐다. 그리고 장갑을 냉큼 올려버렸다.
소피아가 보낸 보고서 내용이 떠올랐다. 고문 후유증 같은 것을 보이던 키네시아의 모습이 말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펠리온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펠리온이 탁자를 건너와 그대로 내 앞에 걸터앉았다.
“보여 줘 봐.”
키네시아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펠리온은 손을 대지 않고 장갑 낀 손을 살폈다.
나는 그를 잠시 지켜보다가 키네시아에게 말했다.
“보라색 태양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건, 그때는 그게 라파일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야. 그냥 내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아서 개인적인 일이라고만 생각했어. 너희가 다칠까 봐 걱정도 됐고. 그때 너희는 어렸잖아.”
“네 말이 맞아, 리아.”
“그리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번에 궁전을 나간 것도 라파일 때문이야.”
“레바나의 약점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뭐, 그것도 겸사겸사 처리했어. 플로레타에게 말해 뒀으니 곧 너도 알게 될 거야.”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 손을 유심히 보는 펠리온에게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로그리예, 이런 쪽에도 조예가 있었어?”
로그리예는 능청스러운 미소와 함께 어깨를 한번 으쓱이곤 손을 들어 보였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은빛 기류가 손끝에 모여 반짝이는 구체가 되었다.
키네시아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이게, 이게 뭐야? 로그리예, 너 마법사였어?”
“아, 맞다. 얘는…….”
순간적으로 라파일이 떠올라 말을 멈췄다. 펠리온의 정체를 밝혔다가 라파일이 알게 되면 펠리온을 죽이려 할 것이다.
그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 그냥 마법사라고 하려 했는데 펠리온이 내 말을 이었다.
“펠리온이야.”
본인이 정체를 밝히자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펠리온?”
키네시아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키네시아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야.”
키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펠리온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펠리온? 위대한 대마법사? 드래곤의 화신이었던, 그 펠리온?”
“그렇지.”
키네시아의 말에 펠리온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 좋네. 더 해 봐, 처형.”
뒤따라온 호칭에 키네시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내가 왜 네 처형이야?”
“왜냐면 우리가 결혼했거든. 그렇지, 여보?”
펠리온이 내게 팔짱을 끼며 머리를 기댔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허공에 떠 있는 은색 구체를 보았다.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저거나 좀 어떻게 해 봐.”
“응.”
펠리온의 산뜻한 대답 뒤로 키네시아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부정을 안 해? 진짜 결혼이라도 한 거야?”
못 들은 척하자 펠리온이 슬쩍 웃더니 키네시아의 손을 들어 올렸다. 닿기만 해도 통증이 느껴지는지 키네시아가 이를 악물었다.
저렇게 아픈데 그동안 일은 어떻게 한 거야?
저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의 손을 보는데 펠리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파일의 힘을 밀어 내 볼게. 조금 아플 거야.”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보라색 불꽃 문양을 보고 있었다. 이내 은색 구체가 키네시아의 손등 위에 닿았다.
키네시아가 단번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윽!”
거대한 벽을 억지로 밀어 내는 것처럼 은빛 구체가 서서히 스며들었다.
그럴수록 키네시아의 얼굴 위에도 고통스러운 기색이 짙어졌다. 꽉 다문 턱이 어긋나며 이 가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 이가 상하겠다 싶어 나는 손수건을 말아 키네시아의 입에 밀어 넣었다.
비명을 지르려는 듯 입을 벌렸던 키네시아가 손수건을 꽉 깨물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나는 키네시아의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닦아 주며 펠리온을 보았다.
그 역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곧 펠리온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은빛 기류가 강해지더니 곧 그와 키네시아를 완전히 감쌌다.
그 상태로 펠리온은 구체 위에 손을 올렸다. 그가 억지로 구체를 밀어 넣자 보라색 불꽃이 사람의 손처럼 뻗어져 은빛 기체에 덕지덕지 붙었다.
동시에 키네시아의 몸이 뒤틀리고 기어이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악!”
나는 몸부림치는 키네시아를 끌어안으며 펠리온에게 소리쳤다.
“이러다 애 잡겠어! 효과 있는 거 맞……!”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앞에서 빛이 터졌다. 곧 쾅! 하는 소음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나는 키네시아를 안은 채로 펠리온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펠리온에게는 닿지 않았다.
대신 나와 키네시아 주변에도 동그란 막이 생기고, 그 너머로 펠리온의 몸이 폭발에 휩싸인 게 보였다.
손쓸 새도 없이 우리는 동시에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이 심하게 욱신거려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창문 근처에 펠리온이 쓰러져 있었다.
키네시아는 창백해지긴 했어도 정신은 잃지 않은 상태였다. 펠리온이 날아가면서도 마법으로 우리를 보호한 것이었다.
나는 키네시아를 놓아주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줘 펠리온에게 달려갔다.
“펠리온!”
그의 앞에 주저앉아 머리를 끌어안았다. 딸려 온 상체가 무거웠다. 팔은 아래로 축 늘어졌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보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더듬어 체온을 확인하고 고개를 숙였다. 미약한 숨결이 볼을 스쳤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나는 펠리온을 끌어안았다.
눈이 쓰라리고 뜨거워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펠리온의 팔이 나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이라네. 나 괜찮으니까 울지 마.”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
고개를 들자 그의 위로 굵은 물방울 몇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펠리온이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제대로 올라오지 못하는 그의 손을 끌어다가 눈물을 닦아 내고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펠리온이 입술을 벌렸다. 그러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방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비명이 들려서 왔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분명 폭발하는 소리가 났는데 비명만 들렸다고?
고개를 들자 언제 쳐 놓은 것인지 펠리온이 방음 마법을 쓸 때마다 보였던 막이 방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키네시아가 펠리온을 쳐다보자 막이 사라졌다. 그러자 문 근처에 있던 키네시아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악몽을 꾼 것뿐이에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
경비병이 떠나고 나자 키네시아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장갑을 벗자 새하얗게 변했던 그녀의 손등 위로 다시 보라색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키네시아가 통증을 참는 얼굴로 펠리온을 보았다. 의문이 가득한 눈빛에 펠리온이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라파일이 신의 반열에 오른 모양이야. 조금……. 안 좋은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