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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28화 (128/151)

<128화>

플로레타가 펠리온과 그냥 악수만 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막연하게 펠리온이 신수였던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화제를 전환해야만 했다.

역시나 플로레타는 펠리온의 정체에 의문을 품었던 것을 싹 잊고 그런 게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리아 그건, 진짜 악수했던 거였어! 그리고 나는 로그리예 공자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플로레타는 내게 변명하느라 로그리예의 정체에 관한 것은 까맣게 잊은 듯했다.

다시 그 주제를 꺼내지 않도록 조금 더 시간을 끌까 했는데 로그리예가 나를 제 품에 쏙 집어넣었다.

“이라네. 이제 안 그래도 돼.”

“뭘?”

“나를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펠리온을 지키려고 했다고?

그런 의도였던 건 아닌데 팔에 힘이 빠지며 팔짱이 툭, 풀렸다.

이상하게 안심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자 앞에 있던 플로레타가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리아 얼굴에서 독기가 저렇게 갑자기 쏙 빠지는 건 처음 봐…….”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자 플로레타가 어깨를 움츠렸다.

할 말 다 해 놓고 서는. 참 빨리도 무서워한다. 가볍게 혀를 차고 본론을 꺼냈다.

“어쨌든,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신의 흔적이 있는 동굴을 발견했는데, 조사할 사람이 필요해.”

“조사? 나 그런 거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데…….”

“너는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만 하고 자잘한 건 다른 놈들 시켜. 성녀처럼 권위 있는 자의 확인이 필요한 거니까.”

“궈, 권위…….”

플로레타가 부담스럽다는 듯 몸을 뒤로 뺐다. 나는 눈빛으로 대답을 종용했다. 그러자 플로레타가 우물쭈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가 해 볼게.”

“그래. 아! 혹시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곳 본 적 없어?”

“이상한 곳이라면 어떤……?”

“신성력이 이상할 정도로 뭉쳐 있는 곳.”

떠올리려면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단번에 대답이 돌아왔다.

“봤어.”

“정말? 다 기억해?”

“그럼!”

“어딘데?”

“으응, 다? 너무 많은데…….”

“많다고? 얼마나?”

“에피파네스를 중심으로 위쪽에만 천…….”

“처언?”

말끝이 휙 올라가자 플로레타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응. 신전이 세워지는 성역은 항상 그렇게 신성력이 뭉쳐 있으니까.”

그럼 그렇지.

“그런 거 말고, 이상하게, 뭔가 불길하다 싶을 정도로 막 풀풀 흘러넘치는 곳 없어?”

“신성력이 어떻게 불길해……. 그거 신성 모독이야, 리아.”

얘는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뼛속까지 신관이 된 거야?

헛웃음을 흘리고 주머니에서 전서구 하나를 꺼내 플로레타에게 내밀었다.

“비슷한 거 발견하면 연락해.”

“그런 거 없다니까…….”

“씁!”

플로레타가 겁먹어 움츠러들었다. 나는 가자는 의미로 허리에 감긴 펠리온의 손등을 툭툭 쳤다. 펠리온이 눈짓으로 돌아갈 건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플로레타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가려고?”

“가야지, 그럼.”

“포넨트도 와 있는데, 안 보고? 키네샤랑, 또……. 엄마랑 아빠도 있고…….”

“됐어. 언제 다 보고 가?”

“그래도…….”

플로레타가 내 소매를 붙잡아 살살 흔들었다.

그녀는 안 그래도 처진 눈꼬리를 더 늘어트린 채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얘가 내 진짜 언니라는 거지…….

헛웃음을 터트렸다가 플로레타의 손을 떼어 냈다.

“알겠어.”

“고마워, 리아. 다들 좋아할 거야.”

나는 펠리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지시스와 타솔라를 나와 펠리온인 것처럼 위장해서 보내놨으니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궁전에 있는 것을 들키지 않는 편이 낫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조심해야지.

손을 흔드는 플로레타를 뒤로하고 문밖으로 나와 펠리온에게 속삭였다.

“모습 안 보이게 해 줘.”

“응.”

창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걸음을 옮겼다. 펠리온이 맞잡은 손을 풀고 내게 팔짱을 꼈다.

“어디부터 갈까?”

“키네시아.”

안 그래도 키네시아만 소식을 전하지 않아 찝찝하던 차였는데 이참에 보고 가야지.

다행히 잠든 건 아닌지 방문 밑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노크하기 위해 손을 들자 동시에 펠리온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바싹 붙은 그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안에 남자가 있어.”

“누구?”

“처음 듣는 목소린데? 잠깐만.”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던 펠리온이 고개를 돌렸다.

“스페르모 황자.”

소피아의 보고서를 통해 스페르모 황자가 직접 청혼서를 들고 궁전에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스페르모 황자가 키네시아와 가까운 사이였나?

고민하는 사이 다시 펠리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라네. 들어가서 두 사람이 하는 대화를 듣는 게 좋겠어.”

무슨 일이냐고 물을 틈도 없이 주변이 바뀌며 키네시아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게 뭐죠?”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키네시아는 스페르모가 내려놓는 작은 유리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병은 고작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될까 말까 한 크기였다.

안에는 아주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었다. 언뜻 보면 그냥 물이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진주를 곱게 갈아 한 꼬집 섞어 놓은 것처럼 이따금 오묘한 빛이 돌았다.

스페르모가 그 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독입니다.”

저놈은 왜 남의 집 귀한 첫째한테 독약을 주고 그래?

눈을 부라리며 스페르모를 노려보는 사이 약병을 보던 키네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 말했다시피 독을 써 봤자 플로레타가 신성력으로 치료할 거예요.”

“그걸 위한 독약입니다.”

나는 키네시아를 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하지만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생기와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걱정스러워 당장에라도 무슨 일이 있는지, 독약은 어디에 쓰려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스페르모가 어떤 놈인지 모르는데 섣불리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다.

나는 인내하기 위해 펠리온의 손을 꼭 쥐었다.

펠리온의 시선이 느껴짐에도 고개를 돌리지 않자 그는 크고 따뜻한 손으로 내게 깍지를 꼈다.

온기가 손바닥과 손등을 감싸 주니 속이 조금 진정되었다.

나는 긴 숨을 내쉬며 스페르모가 주절거리는 것을 들었다.

“이 약을 마시고 신성력에 노출되면 몸에 있던 생명력이 빠져나갑니다. 한꺼번에 먹이면 몸이 말라비틀어져 티가 나니 식사에 한 방울씩 타서 서서히 죽여야 합니다.”

키네시아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약병에 시선을 주었다.

“만약 이 약을 성녀나 신관이 마시면 어떻게 되죠?”

“관련된 기록이 없습니다.”

“아주 예전부터 사용되었나 보죠? 저는 이런 약이 있다는 건 들어 보지 못했어요.”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키네시아가 약의 출처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스페르모는 침묵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 냈다.

약의 효능에 대해서는 잘만 나불대더니 약의 출처에 관한 질문이 나올 것 같으니 입을 딱 다물어 버린 것이다.

키네시아는 끈기 있게 스페르모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초침이 째깍대는 소리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키네시아는 정적을 깨고 유리병을 집어 들었다.

“더 구할 순 없나요?”

스페르모가 여전히 입을 다문 채 눈빛으로 키네시아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는 모든 걸 전부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면 성자에 자리를 되찾아야 할 텐데, 플로레타가 거슬리지 않겠어요?”

“그럼 성녀부터 처리하고 국왕 부부를 죽이십시오.”

스페르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어차피 한배를 탄 사이니 결혼 동맹도 레튜니아의 손을 들어 주리라 믿겠습니다.”

키네시아가 붙잡지 않자 그는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고개만 까딱여 보이곤 곧장 키네시아의 방에서 나갔다.

키네시아가 약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나는 펠리온의 손을 놓았다.

가서 키네시아의 멱살을 잡고 국왕 부부를 죽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다.

그때, 키네시아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읍!”

키네시아가 비명을 삼키며 심장을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펠리온이 마법을 푼 모양이었다. 나는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보며 놀라 주저앉은 키네시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내가 암살자면 어쩌려고 주저앉아?”

키네시아의 코앞까지 다가가 쪼그려 앉아 눈을 맞췄다. 키네시아는 시선을 피한 채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야?”

“연락했으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키네시아를 바라보았다.

“오틸리에와 룩소르를 죽이고 은폐하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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