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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27화 (127/151)

<127화>

제로스의 엄마가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 침대에 사뿐히 안착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아르만이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 동굴은 공주님이 찾으시는 것과 연관이 없는 겁니까?”

“글쎄.”

라파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레바나 교와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벽화에 새겨져 있던 그림을 떠올리다가 펠리온에게 물었다.

하나가 둘로 나뉘는 그림 아래 작게 쓰여 있던 글자들. 문자 모양은 레튜니아의 언어와 비슷하지만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고대의 언어인 듯한데…….

“펠,”

아무 생각 없이 펠리온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제로스가 눈에 들어왔다.

대마법사의 이름을 들으면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라 말을 바꾸려는데 펠리온이 내 뒤에 찰싹 붙었다.

“애칭 같고 좋아. 앞으로 펠이라고 불러 줘.”

“……그래, 펠. 너 고대어도 읽을 줄 알아?”

“당연하지.”

신이 직접 새겼다는 벽화의 내용을 아무나 들어도 되는 건가 싶어 질문을 망설이는데 제로스의 주변에 빛무리가 반짝였다.

그러자 아이가 스르륵 눈을 감으며 옆으로 툭 쓰러졌다.

물론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펠리온이 마법으로 제로스를 옮겨 엄마 옆에 눕혀 주었다.

동시에 나와 펠리온, 아르만만 덮을 정도로 작은 반원 모양의 투명한 막이 생겼다.

“방음 마법 썼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만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정말 대마법사 펠리온 님이십니까?”

“너 말고.”

아르만의 질문을 차갑게 쳐 낸 펠리온이 마치 제집처럼 편안하게 식탁 앞에 앉더니 손을 꽃받침처럼 만들어 턱을 괬다.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예뻐 그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아르만의 시선을 뒤늦게 느끼고 손을 떼어 냈다. 그

러자 펠리온이 고개를 홱 돌려 못마땅한 눈으로 아르만을 응시했다.

딱 봐도 저걸 어디에다가 치워 버려야 잘 치웠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펠리온의 볼을 가볍게 당겨 다시 나를 보게 했다.

“애 눈치 주지 말고.”

“알겠어. 공주님에게 집중할게.”

“제가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아르만의 말에 펠리온이 그런 눈치가 있었으면 빨리 사라질 것이지 왜 아직도 여기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보는 아르만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고갯짓으로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펠리온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아르만을 싫어해?”

“이유를 꼽자면 한두 개가 아니지.”

빤히 쳐다보자 펠리온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위에 짧게 쪽 입을 맞춰 주자 뾰로통했던 표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기분이 좋아진 게 보이는데도 펠리온은 여전히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바라는 게 너무 빤히 보여 귀여웠다. 대답을 기다리는 걸 티 내자 그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을 죽이려고 했잖아. 물론 안 당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기분 나빠. 공주한테 맹목적인 것도 싫어. 흑심 있어 보여.”

그가 한참을 툴툴거리더니 내 어깨에 볼을 기댄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 질투할 자격 있는 거 맞지?”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 넌 내 남편이잖아.”

펠리온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그나저나, 고대어를 아냐는 건 왜 물어본 거야?”

“벽화 아래에 쓰여 있던 게 고대어 같아서.”

“맞아. 2000년 전, 레온하르타라는 제국에서 쓰던 언어야.”

“뭐라고 적혀 있던 건데?”

“‘본질은 하나.’”

그 위에는 하나의 원이 샤마흐와 레바나로 갈리는 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 본질이 하나라고 적혀 있었다면…….

“레바나와 샤마흐가 원래 같은 신이었어?”

“응. 원래는 ‘세뮬라’라는 유일신을 섬겼는데 세계수가 사라지면서 둘로 나뉘었어. 서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고.”

펠리온의 말을 들으니 샤마흐 교의 신성력과 레바나 교의 신성력이 어째서 동시에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는지 이해가 됐다.

두 교단은 운명을 같이한다. 본디 하나의 신을 섬기는 것이니까.

즉, 샤마흐 교의 신성력이 돌아온 뒤에도 신성력은커녕 그 비슷한 것도 쓸 줄 모르는, 남동 대륙의 레바나 교는 가짜라는 뜻이다.

“동굴의 존재를 밝혀야겠어. 고대어를 할 줄 아는 사람 한 명쯤은 있겠지.”

나는 잘 머물다 간다는 짧은 쪽지와 함께 보석 한 움큼을 접시 위에 올리고 티슈로 덮어 두었다.

밖으로 나오자 아르만이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있었다.

펠리온이 마법으로 이동시킬 때 말까지 같이 데려온 모양이었다. 기특해 쳐다보자 펠리온이 볼을 내밀었다.

나는 입을 맞추는 대신 가볍게 꼬집어 주고 아르만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미소 비슷한 것을 짓고 있긴 했는데, 표정이 썩 밝진 않았다.

“이야기 잘 나누셨습니까?”

“응. 근데 왜 이렇게 시무룩해?”

“저 때문에 헛걸음하신 것 같아서요.”

“아니야. 덕분에 궁전을 나온 목적 중 하나는 해결했어.”

아르만의 얼굴이 조금 나아졌다.

“그럼 계속 동행해도 됩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 동굴 말고 다른 곳은 없어?”

“제가 알기론 없어요.”

로그리예에게 혹시 아는 게 있느냐고 눈짓했지만 그도 고개를 저었다.

그럼 도대체 라파일 놈은 어디서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 거야?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봤다. 동굴에서 오래 있었는지 이미 주변은 어두웠다.

“일단 근처 여관으로 가자. 거기서 다음 행선지를 정해야겠어.”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저번에 와 본 적이 있거든요.”

우리는 아르만을 따라 여관으로 들어왔다.

나는 방을 잡자마자 전서구가 들어 있는 주머니부터 확인했다.

안에는 포넨트, 룩소르, 오틸리에가 보낸 편지와 소피아가 보낸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키네시아의 편지는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스러워 소피아의 보고서부터 읽었다.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즘 키네시아의 일이 많다는 내용뿐이었다. 그리고 플로레타가 궁전을 방문해 머물고 있다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마침 동굴을 조사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잘됐어.’

동굴이 레튜니아의 땅에 있으니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약속국의 막내 공주보다는 성녀가 하는 말이 더 잘 먹히겠지.

종이에 플로레타의 이름을 적고 동굴에서 발견한 것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펠리온이 뒤에서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들어오자마자 일이야?”

“응.”

“편지 말고 직접 다녀오는 건 어때?”

“……직접?”

에피파네스까지 거리가 얼만데, 라고 말하려던 나는 반짝이는 청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작게 감탄했다.

“아.”

“대마법사가 남편이잖아. 그렇지?”

나는 편지를 대충 구겨서 주머니에 집어넣고 펠리온의 손을 잡으며 일어났다.

“그렇게 먼 거리도 순간 이동이 가능해? 마법진이나 다른 보조 마법사들 없이?”

“당연하지. 나를 그런 인간들이랑 똑같이 여기면 서운해.”

“100년 전에도 먼 거리를 이동할 때 반드시 마법진을 이용했잖아. 보조 마법사도 두고.”

“인간미를 위해서였지. 너무 잘나면 인간 같지 않다고 하길래. 내가 인간이 아니긴 하지만.”

“그럴 거면 외모부터 바꿨어야지.”

“그건 안 돼. 내가 공주님 취향을 다 때려 부어서 만든 얼굴이란 말이야.”

나는 허리를 뒤로 더 젖혀 그의 얼굴을 한눈에 담았다.

펠리온의 얼굴과 로그리예의 얼굴은 생김새만 보자면 확연히 달랐지만, 이제 보니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했다.

“확실히 그렇긴 한데, 눈은 왜 청보라색이야?”

펠리온이 당황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답을 재촉하기 위해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올려다봤다.

그가 내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동시에 주변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어딘가에 훅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을 때, 펠리온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공주님이 매일 라파일의 눈동자를 칭찬했잖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어이가 없어 눈을 번쩍 뜨자마자 비명 소리가 들렸다.

“꺄악!”

플로레타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황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베개를 몽둥이처럼 들고 있는 플로레타가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를 응시하더니 슬그머니 베개를 내렸다.

“리아? 로그리예 공자?”

“오랜만이야, 플로레타.”

“까꿍. 놀랐지?”

그녀가 얼빠진 얼굴로 나와 펠리온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더니 곧 활짝 미소 지었다. 그녀는 침대를 뛰어넘어 내게 확 안겼다.

“리아! 정말 보고 싶었어.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야? 레튜니아에 있다고 들었는데…….”

플로레타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펠리온을 노려보았다.

“로그리예 공자……. 무슨 일 있으셨나요? 기운이 달라진 것 같아요.”

맞다. 플로레타는 성녀니까 영혼을 느낄 수 있겠구나.

“그건 페, 로그리예가 마법사라서 그래.”

“응. 그건 알아. 그런데 그래도 예전엔 사람 같았는데 지금은…….”

“알았다고? 언제부터?”

플로레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펠리온에게로 향했다. 나는 플로레타의 품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일부러 화난 척 표정을 굳히며 팔짱을 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저번에 손잡고 있었지? 침대에서. 그런데 나도 모르는 비밀도 공유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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