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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26화 (126/151)

<126화>

펠리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펠리온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그가 살아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나는 세상이 뒤흔들리는 것 같아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펠리온을 잠깐 마음에 품었던 나조차도 그만큼 충격을 받았는데, 그는 무려 2000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 동안 나를 사랑했다.

반복되는 나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는 도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떻게 그 긴 절망을 견뎌 냈을까.

‘차라리 나를 잊을 것이지.’

왜 미련하게 버티고 있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제 인생을 바쳐 나를 사랑해 준 그에게 할 말은 아니었기에 말을 삼켰다.

대신 그를 끌어안고 화제를 돌렸다.

“말하지 못한 것도 저주와 관련 있는 거야?”

“응. 전생의 기억은 전부 영혼에 잠재되어 있는데, 공주님 스스로 그 기억을 떠올려서 전생에 만났던 나를 알아봐야 풀리는 저주거든.”

아주 오래전, 그를 안쓰럽게 여긴 바람의 정령이 펠리온을 도와준답시고 나에게 그의 저주와 정체를 알렸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돌연 심장이 멈춰 죽었다고 말하며 그가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가를 공주님이 치르게 되더라. 모든 게 내 죄인데, 우습지?”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나는 힘겹게 미소 짓는 그의 볼을 붙잡아 미소 짓지 못하게 했다.

“이번엔 왜 가만히 있었어? 내가 전생도 기억하고 있는데. 마법을 썼으면 금방 알아봤을 거 아니야.”

“항상 근처에 라파일이 있었어. 그게 아니더라도 누가 라파일의 사람일지 모르니까 조심했지. 그가 먼저 알아차려서 내 정체를 공주님한테 말하면 안 되잖아.”

나는 그를 끌어안고 등을 쓸어 주었다.

“잘했어. 그리고 고마워.”

펠리온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흐느끼는 소리는 없었지만 어깨가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며 위로하다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친 단어에 그를 떼어 냈다.

“그런데, 다른 사람 몸에 들어온 것도 환생한 것으로 쳐 주는 거야?”

“응?”

“나, 이라네리아 공주의 몸에 들어와 있잖아.”

“아아, 그거.”

펠리온이 물기 어린 얼굴로 생긋 웃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다른 사람 몸에 들어온 거 아니야.”

고개가 저절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몸과 달리 머리는 습관처럼 펠리온과 나눴던 대화를 복기하며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추론했다.

“설마……. 나, 환생해서 막내 공주가 된 거야? 유령으로 떠돌다가 이 몸에 들어온 게 아니라?”

“응. 말했잖아. 공주님은 공주님이라고.”

하지만 황제로서의 삶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처음 깨어난 장소. 화재가 난 방은 내가 누워 있던 침대 주변만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만약 화재가 단순한 사고고, 라파일이 나를 구해 주려고 불길을 막았던 것이라면 침대에 보라색 태양 문양을 달아 두진 않았을 것이다.

영혼을 옮기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말도 마음에 걸렸다.

“라파일이 무슨 짓을 한 건 확실한데……. 그게 내 영혼을 이 몸에 집어넣는 게 아니면 뭐지?”

“아마 이라네 황제일 때의 기억을 의식 위로 끄집어내고, 이라네리아 공주일 때의 기억을 무의식 아래에 봉인했을 거야.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기억 위치를 바꾼 거지.”

“나에게 영혼을 옮기는 실험이 곧 완성된다고 한 건……, 혹시 황제일 때의 기억만 다른 몸으로 옮기려는 건가?”

“그렇겠지. 라파일은 공주님이 다시 태어나 얻은 기억은 보석에 묻은 먼지처럼 여기는 모양이니까.”

펠리온이 나를 보듬으며 중얼거렸다.

깊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기댄 채 고개를 돌려 벽화를 보았다. 문자들과 함께 하나의 원이 두 개로 쪼개져 샤마흐와 레바나의 문장으로 바뀌는 그림이었다.

일단 그 그림을 머릿속에 새긴 뒤 난간에서 내려왔다.

“어쨌든 여긴 라파일의 본거지가 아닌 거네. 돌아가자.”

펠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 벽화가 있는 동굴을 나가려다가 위에 두고 온 제로스를 떠올렸다.

“그런데 몸이 깨끗하게 나아서 간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아마 신성력 덕분 아니었을까? 신에 관한 벽화는 신이 직접 새겼거든. 시간이 지나면서 동굴 천장에 있던 구멍이 밖으로 드러났고, 고여 있던 신성력이 새어 나온 거지.”

“그럼 거미는 신성력을 먹고 저렇게 커진 거야? 신수?”

“신수는 직접 신과 접촉해야 될 수 있고, 저건 그냥 괴물. 신성력을 잔뜩 머금은 인간들을 잡아먹고 커진 거지. 저게 죽었으니 이제 곧 신성력도 자연으로 흩어질 거야.”

“그럼 제로스는? 그 애, 아프다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이 안으로 들어오면 호전될 순 있을걸?”

키네시아를 닮은 애에게 도움을 못 주고 가면 마음이 안 좋을 뻔했는데, 다행이다.

나는 제로스를 어떻게 데려올까 고민했다. 밖에 나가서 데려올 만한 시간이 되려나? 물어보려는데 펠리온이 내 양 볼을 감싸고 이마를 맞댔다.

“그 어린애가 신경 쓰이는 거지? 가서 데려올까? 마법으로 슝?”

“마법 써도 괜찮아? 저번처럼 피 토하는 거 아니야?”

“저주가 풀려서 괜찮아. 사실 내 힘은 신성력에 더 가깝거든.”

“순간 이동 마법은 협회에 감지될 텐데.”

“괜찮아. 내가 다 이겨.”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 게 제법 유쾌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럼 데려와.”

“네, 공주님.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펠리온이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르만은 펠리온이 눕혀 놓은 자리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얼굴에 그늘이 지자 아르만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었어?”

아르만이 당황한 기색으로 주춤주춤 아래로 내려가더니 내 앞에 공손한 자세로 앉았다.

“마법을 썼으면 알아봤을 거라는 말부터 들었습니다.”

너무 오래 기절해 있다 싶어서 찔러 본 거였는데,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었네.

펠리온의 저주도 풀렸고 이 몸도 남의 걸 쓰는 게 아니라 내 거라니까, 들었어도 상관없겠지.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아르만이 양팔로 땅을 짚고 앞으로 몸을 숙여 제 목덜미를 내놓았다.

“엿들어서 죄송합니다. 어떤 벌이든 받겠습니다.”

“아니, 뭐 벌씩이나.”

“그래도 두 분의 비밀을…….”

“됐어. 일어났을 땐 우리가 이미 이야기하는 중이었을 텐데 네가 뭘 어쩌겠어. 굴러 나가기라도 할 거야?”

“다음부터는 굴러 나가 보도록…….”

나는 헛소리를 하는 아르만의 이마에 딱밤을 때려 주었다.

그리고 툭툭 두드려 주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해맑은 표정의 펠리온이 보였다. 그 옆에는 기절하기 직전인 제로스와 그의 엄마가 나무토막처럼 서 있었다.

펠리온은 자신이 데려온 두 사람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협박하는 중이었어? 도와줄까?”

협박이라니? 되물으려다가 내 자세를 떠올렸다.

나는 골목길의 불량배처럼 쪼그려 앉아서 무릎을 꿇고 반쯤 엎드린 아르만의 머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황제로서의 위엄과는 거리가 먼 자세였기에 헛기침하며 냉큼 일어났다.

왔냐고 인사를 하려는데 펠리온의 뒤에 서 있던 제로스의 엄마가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마, 마법, 마법사…….”

그러더니 그녀의 무릎이 툭 꺾였다. 모두가 깜짝 놀란 순간,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대마법사 정도 되면 이런 건 보지 않고도 할 수 있구나. 감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펠리온이 우쭐댔다.

“왜? 반했어?”

“원래 반해 있었어.”

넋이 나간 펠리온을 뒤로하고 제로스에게로 다가갔다. 아이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다가 돌부리에 툭 걸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여기 오니까 어때? 좀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어?”

“……잘, 잘 모르겠어요.”

데려가 달라고 나서던 패기는 어디 갔는지, 제로스는 꿈에서 덜 깬 사람처럼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아이가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 펠리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얘 상태 어떤지 알겠어?”

“응. 한참은 있어야 제 나이 또래처럼 뛰어놀 수 있을 것 같은데.”

“더 빨리 치료할 방법은 없나? 우리도 할 게 많잖아.”

펠리온이 주변을 쭉 둘러보더니 사라졌다가 신들이 있는 벽화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제로스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제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펠리온이 순간 이동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벽화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벽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와 제로스의 몸에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제로스의 안색이 좋아졌다.

“몸이……, 몸이 가벼워요!”

“운 좋은 줄 알아. 이제는 신관이 아니면 여기서 신성력을 느끼기 힘들 테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제로스가 훌쩍이다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아이를 보며 펠리온에게 손을 뻗었다. 그가 단숨에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동시에 우리는 한꺼번에 제로스의 집으로 이동되었다.

나는 순식간에 바뀐 풍경을 보며 오래 말을 타느라 고생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편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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