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펠리온은 이라네에게 가려고 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피가 역류했다. 다리는 신경이 끊긴 것처럼 축 처져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혼신의 힘을 쏟아 손을 뻗었다.
땅을 긁으며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제 연인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손끝이 관에 닿기도 전에, 위엄 있는 목소리가 동굴을 무너트릴 듯이 크게 울렸다.
“이 미련한 것! 금기를 범하지 말라고 했거늘!”
펠리온이 고개를 들어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보았다.
신이 손을 뻗자 펠리온의 심장 부근에서 뽑혀 나온 마력이 커다란 보석으로 빨려 들어갔다. 투명하던 보석은 금세 핏빛으로 물들었다.
“공주는 앞으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러나 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펠리온의 손이 힘을 잃고 툭 떨어졌다.
고개를 숙인 그의 위로 신의 음성이 쏟아졌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발설할 수 없으며, 공주가 세상에 없을 땐 그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네 사랑이 너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나 그 어떤 괴로움도 망각하지 못하리라. 죽음으로 도망치지도 못하리라.”
저주가 이어졌으나 펠리온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직 이라네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럴 순 없다. 어떻게 그 행복했던 시간을 잊는단 말인가?
“앞으로 네가 쓰는 모든 힘은 신성력을 거부할 것이며, 저주가 풀리기 전까지 네가 훔친 힘은 심장에 봉인되리라. 또한 너는 네 사랑이 다시 세상에 태어날 때까지의 시간을 온전히 홀로 견뎌야 할 것이다.”
펠리온은 저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신에게 간청했다.
“이라네를 살려 주세요. 저를 잊는다니, 그건 안 됩니다. 너무 가혹합니다. 제발……. 이라네를, 그녀를 제게 돌려주세요.”
신의 얼굴에 잠시나마 안타까움이 스쳤다. 신이 가여운 신수를 향해 마지막 자비를 베풀었다.
“저주를 지금 거둬주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주가 전생에서 만난 너를 먼저 알아본다면 저주는 깨어지리라.”
신은 빛과 함께 사라지고, 동굴에는 펠리온만이 남았다.
이라네와 함께 있을 때는 어색하지 않았던 인간의 팔다리가 새삼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심장이 몸 밖에 있었기에 원래의 모습으로도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이라네가 누워 있던 곳에 웅크려 누웠다.
저주 탓인지 그를 괴롭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라네와의 추억을 떠올려 보아도 가슴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뿐이었다.
펠리온은 암석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백 년의 시간을 견뎠다.
그러다 어느 순간, 햇살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볼을 스치는 바람이, 새의 지저귐이 느껴졌다.
온 세상이 이라네의 탄생을 그에게 알리고 있었다.
펠리온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이라네를 찾아다녔다. 이라네의 탄생을 느낀 해에 태어난 사람들을 남녀 가리지 않고 확인하다 보니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그렇게 펠리온은 어느 왕국의 공주로 태어난 이라네와 재회했다.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그는 단번에 그녀가 이라네임을 알아봤다.
“안녕, 공주님.”
눈물이 별똥별과 같은 궤적을 남긴 채 땅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펠리온은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끝맺었다.
“정말 오랜만이야.”
***
당연한 말이지만, 이라네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다. 펠리온은 혹시나 이름을 되찾으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 사람들을 세뇌해 공주의 이름을 이라네로 바꿨다.
그러나 이라네가 된 이후에도 그녀는 펠리온을 알아보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에게는 약혼자가 있었다.
펠리온은 강한 질투에 휘말려 그녀에게서 약혼자를 떼어 놓으려다가 들키고 말았다. 자신을 멀리하려는 이라네에게 펠리온은 간절하게 매달렸다.
“내가 네 유일한 사랑이잖아. 나와 영원히 함께하기로 했잖아. 이라네. 제발, 날 기억해 줘. 날 예전처럼 사랑해줘.”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경멸 어린 시선뿐이었다.
“펠리온 경. 저는 당신을 만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어요. 그런 약속도 한 적이 없고요. 더는 저와 제 약혼자의 사이를 방해하지 마세요.”
이라네는 결국 제 약혼자와 결혼했다. 그녀는 천수를 누리다 갔다. 펠리온이 할 수 있는 것은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펠리온은 그녀의 곁에서 수많은 사람과 인간관계를 맺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그의 성격적 결함 때문은 아니었다.
이라네가 죽고 나면 펠리온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잊기 시작했다. 친우도, 제자도, 부하마저도 10개월 안에 그를 완벽하게 잊었다. 그러고 나면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유령처럼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이라네가 항상 공주로 태어난다는 것을 깨달은 펠리온은 갈수록 그녀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라네가 태어난 것을 알게 되면 또다시 그녀를 찾고, 이름을 주고, 제 심장을 넘기고, 어김없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공주님.”
***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상은 멸망을 겪고 살아남은 인간들이 다시 문명을 일으켜 세웠다.
인간들은 암흑 같은 시대를 견뎌 냈고, 펠리온은 여전히 이라네를 찾아다녔다.
그녀는 종종 찾아내기도 전에 죽고, 어떨 때는 반란에 휘말리고, 또 어떤 때는 아주 오래 살며 나라를 부흥시켰다.
그 와중에 이라네가 펠리온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서로 엇갈려 버리기 일쑤였다.
언젠가는 펠리온을 지켜보다가 답답해진 바람의 정령이 이라네에게 펠리온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펠리온은 기대를 품었으나 이내 바람의 정령은 사라져버렸고, 이라네는 모든 것을 잊은 채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그녀가 먼저 알아봐야 한다는 규율을 어긴 대가였다.
그러던 중, 펠리온은 운 좋게 에피파네스의 공주로 태어난 이라네를 3년 만에 발견했다.
그는 기억을 조작해 백작의 아들이 되어 5살에 이라네의 친구로 궁전에 들어갔다.
“안녕, 공주님? 오랜만이야.”
“뭐야? 우리 본 적 있어?”
펠리온은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 같이 놀자.”
“본 적 있냐니까?”
“뭐 하고 놀까?”
그는 이라네의 유일한 친구가 되려고 했다. 그렇게 곁을 지키다가 유일한 사람이 될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튜니아의 왕자 렘브로스가 이라네의 곁을 얼쩡거렸다. 다행히 이라네는 렘브로스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렘브로스는 툭하면 이라네에게 고백을 했다.
“나와 결혼해. 내 왕비가 되어 줘, 이라네.”
“나는 군주가 될 몸인데 어떻게 왕비가 돼? 정 결혼하고 싶으면 네가 에피파네스로 오든가.”
이라네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덕분에 펠리온은 4000년 된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렘브로스의 목을 틀어쥐었을 것이다.
그는 제 질투를 드러내는 대신, 보란 듯이 이라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라네는 펠리온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듯 쓰다듬고 제 할 일을 했다. 타는 듯한 렘브로스의 시선이 펠리온에게로 향했다.
렘브로스의 눈은 날이 갈수록 더 음험하고 어두워졌다.
“나와 이라네 사이를 방해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너도 이라네도 후회하게 될 거야.”
펠리온은 코웃음을 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 기도가 이어졌다.
그러나 신수이자 대마법사인 펠리온을 죽이긴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대마법사인 펠리온을 암살하기란 불가능했다.
렘브로스의 구애는 끊이질 않았으나 이라네가 라파일과 결혼을 하자 잠시 잦아드는 듯했다.
펠리온은 또다시 실패한 사랑에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이라네가 결혼을 준비할 때부터 다음 생을 기약했다. 그리고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도록 영혼에 추적 마법을 걸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신성력을 남발해 대는 라파일 때문에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곧 다른 방법을 찾아냈다. 제 영혼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 넣어 이라네가 어디 있는지 몸이 반응하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렇기에 병색이 완연한 이라네가 옅을 숨을 내쉬며 앙상한 손을 내밀어도 슬픔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었다.
“즐겁냐?”
죽어 가던 이라네가 물었다. 즐겁냐니. 네 죽음은 수십 번을 겪어도 언제나 영혼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인데.
그러나 펠리온은 떠나는 그녀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의연하게 미소 지었다.
“그럴 리가. 그래도 최악은 아니니까.”
다음번엔 꼭 제일 먼저 너를 찾아내서 곁에 붙어 있을 거야. 이제 그럴 수 있어. 그때도 널 사랑할게.
그는 혀끝을 맴도는 고백을 삼켰다. 그녀의 죽음이 가벼울 수 있도록.
펠리온은 점점 기다리고, 지켜보고, 인내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는 이 장황한 이야기를 단 몇 줄로 줄였다.
***
“약 2000년 전에 공주님하고 나는 결혼을 약속했어.”
펠리온이 손가락으로 벽화를 가리켰다. 성녀가 숭고한 희생으로 세계의 멸망을 막는 벽화였다.
“그런데 저 일에 휘말려서 공주님이 죽었고, 내가 욕심부려서 공주님을 되살리려다가 신의 저주를 받은 거야.”
“무슨 저주였는데?”
푸르게 변한 그의 눈동자는 깊은 도랑에 고인 눈물의 색과 같아서, 나는 눈물을 닦아내듯 그의 볼을 쓸어 주었다.
펠리온이 내 손을 잡아 제 입가로 끌어내려 손바닥 깊숙한 곳에 입을 맞췄다.
“기다림.”
입술이 달싹이며 피부를 간질였다. 그 감촉마저 애틋했다.
그는 2000년 전, 나와 결혼을 약속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그와의 첫 만남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년 전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혹시 내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