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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24화 (124/151)

<124화>

바람의 정령은 인간들이 혼란에 빠졌다는 소식을 펠리온에게 전했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야 혼란스럽겠지만 결국 세계는 균형을 맞추며 원래대로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라네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매일 그를 찾아오고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같은 이유로 제네르바라는 연금술사가 세계수를 되살리는 연구를 진행한다는 소식에도 펠리온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라네도 그 일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세계수는 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신수인 펠리온이 모습을 드러내면 흥분한 사람들이 그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른다.

펠리온은 덩치만 컸지 순수하고 사랑스러웠다. 아직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도 많았다. 이라네는 자신이 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계수에 관한 것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가 이라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 아버지와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펠리온에게 말했다.

“펠리온. 나 결혼해야 해.”

이라네를 제 배 위에 올려놓고 체온을 만끽하던 펠리온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이라네를 끌어안은 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라네는 펠리온의 허벅지에 앉은 채 그와 마주 봤다.

펠리온이 경건하게 이라네의 손을 잡았다.

이라네를 만난 후 바람의 정령이 전해 주는 인간들 이야기에 제법 귀를 기울였기에 결혼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았다.

결혼은 신 앞에서 두 사람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의식이다.

그렇기에 펠리온은 이라네가 말하는 결혼의 대상이 다른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디서, 언제 할까? 혹시 증인이 될 인간들도 필요해? 음. 아직 다른 인간들을 만나는 건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지만 이라네가 원하면 산에서 내려올게.”

“아니. 나는 여기서 널 독점하는 게 더 좋아. 넌 밖에 꺼내 놓기엔 너무…….”

“너무?”

“너무 예뻐.”

펠리온은 자신이 예쁜 것과 산에만 있어야 하는 게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래서 결혼은 지금 해?”

“아니. 그리고 너랑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깜짝 놀란 펠리온이 이라네의 볼을 양손으로 잡았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잖아. 날 사랑하지 않아?”

순수한 질문에 이라네가 웃음을 터트리며 펠리온을 끌어안았다.

“사랑해. 그런데 왕족의 결혼은 그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어. 나는 아버지가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해야 해.”

“……다른 사람과,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겠다고?”

펠리온은 처음 겪는 감정에 이라네를 밀어 냈다.

용암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부터 배 속까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로 화가 났다.

“난 싫어.”

이라네가 웃음을 터트리며 펠리온을 끌어당겨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나도 싫어.”

이라네의 말을 듣고 나서야 펠리온은 속이 좀 가라앉았다. 이라네는 표정이 누그러진 펠리온을 다시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너랑 결혼하는 걸 허락받아서 올게.”

“그냥 여기서 둘이 하면 안 되는 거야?”

“응. 안 돼. 나는 공주니까. 공주에게는 공주의 의무가 있어.

이제껏 내가 살면서 누린 것에 대한 책임이고, 난 그걸 저버릴 수가 없어.”

“…….”

“그러니까 당당하게 허락을 받아서 올게. 그때까지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고 여기서 얌전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날 기다려 줘야 해.”

“응. 걱정하지 마. 잘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 돌아오면 꼭 나와 결혼해 줘야 해.”

“당연하지. 네가 내 유일한 사랑이니까. 돌아오면 영원히 네 곁에 있을게.”

펠리온이 이라네의 허리를 바싹 끌어안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이라네는 고개를 숙여 펠리온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펠리온은 다음을 기약하며 이라네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이라네는 돌아오지 않았다.

펠리온은 그저 기다렸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고 숨어 있기만 하면 이라네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않았고, 바람의 정령을 통해 세상의 소식을 전해 듣는 게 전부였다.

세계수를 살리려던 실험의 실패. 그로 인해 퍼지는 전염병.

그리고 이라네리아 공주의 죽음.

“그럴 리 없어. 돌아온다고, 나에게 돌아온다고 했는데…….”

펠리온은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이라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동굴 밖으로 나와 사람의 모습으로 인파 사이에 섞였다. 그리고 신성력을 사용해 기척을 지운 후 궁전으로 숨어들었다.

펠리온은 바람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뿐이었다. 펠리온만이 이라네가 그의 눈 색과 잘 어울린다며 선물해 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은 뒤늦게 펠리온을 발견하고 웅성거렸다. 누구냐고 묻거나 끌어내라고 소리치는 자들도 있었으나 아무도 펠리온에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사람들이 무형의 기운에 떠밀려 가며 길을 만들었다. 펠리온은 검은 옷이 만든 물결 사이로 들어가 관에 다다랐다.

그 안에는 썩은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진 모습의 이라네리아가 있었다.

“이라네.”

펠리온은 떨리는 손으로 관 속에 누워 있는 제 연인의 볼을 쓸었다.

“돌아온다고 했잖아. 나에게, 나와 결혼해 주겠다고 했잖아. 아, 아아! 이라네, 도대체 왜……, 왜 네가……!”

이라네가 알려 준 것은 사랑뿐이었기에, 펠리온은 제 절망을 감당하지 못했다. 속이 녹아내리는 듯한 슬픔을, 상실감을, 그 괴로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절규했다.

그는 이라네의 관을 끌어안은 채 공간을 이동해 제 동굴로 돌아왔다.

그녀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신성력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녀는 실체를 잃어 갔다.

펠리온은 원인을 알 수 없어 바람의 정령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 와 달라고 부탁했다.

세계수가 무너진 날, 연금술사 한 명이 세계수를 연구하겠다고 나섰다. 연금술사는 세계수의 진액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국가에게 다시 자라날 세계수의 소유권을 나눠 주겠다고 말했다.

연금술사는 사람들 앞에서 돼지에게 세계수의 진액을 주입해 아무런 해가 없음을 증명했다.

이라네리아의 아버지는 쉬운 연구를 도우면 세계의 중심을 거머쥘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이라네리아는 자신이 실험을 돕는 대신 실험이 끝난 뒤에 공주의 신분을 벗어나게 해 달라고 했다.

왕은 그 제안에 응했고, 이라네는 실험체가 되었다.

그러나 돼지에게 주입했던 것은 가짜였고, 진짜 진액을 주입받은 사람은 모두 썩은 나무처럼 말라비틀어져 죽었다.

알고 보니 그 실험은 사람들의 생명력을 빼앗아 세계수에 주입하는 것이었다.

뒤늦게나마 신관들이 신성력을 사용했으나 썩은 세계수의 진액을 주입받은 몸은 신성력을 독으로 인식했다.

그중, 가슴에 술식을 새긴 자들은 제법 오래 버텼다. 그러나 결국 단 한 명만을 남겨 두고 모두 같은 결과를 맞이했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 놓고도 세계수는 돌아오지 않았다.

연금술사는 더 많은 생명이 필요하다고 했으나 군주들은 그를 믿지 않았고 그에게 현상금을 걸어 수배를 내렸다.

연금술사는 범죄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이라네 역시 영영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펠리온은 오열하며 신에게 빌었다.

“제발, 신이시여. 이라네를 살려 주세요. 뭐든 하겠으니 제발…….”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건조했다.

“네 연인은 다시 한번 세상에 내려올 것이다. 기다려라.”

펠리온은 분노했다.

기다리라고? 기다리다가 이라네를 잃었다. 그는 더 이상 그 어떤 것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신은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그의 진짜 몸을 두고 성녀와 동행하고 있었다.

펠리온은 몰래 그 몸에 접근해 신의 권능을 훔쳤다. 그러나 그가 미처 자리를 떠나기도 전에 신이 한쪽 눈을 떴다.

펠리온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라네를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신은 훔친 신의 조각을 꾸역꾸역 삼키는 펠리온을 보며 안쓰러움을 느꼈다.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하는 데에 신경 쓰느라 제 손으로 살린 아이가 슬픔에 허덕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엽고 어리석은 아이야. 내가 어찌 너의 슬픔을 벌할 수 있겠느냐. 네 마음대로 쓰되 금기만 범하지 말 거라.”

펠리온은 훔쳐 온 신의 일부를 모두 흡수했다. 그러자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이라네를 되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금기를 범하지 말라는 신의 음성이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신의 일부를 얻었으나 펠리온은 여전히 고통스러웠다. 그는 몇 년 동안 눈물만 흘렸다.

성녀의 희생으로 세계의 멸망은 막았으나 그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그의 세계는 여전히 무너진 채였고, 이라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었다.

그때, 거대한 시간의 뒤틀림이 느껴졌다.

신이 성녀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 것이었다.

주저앉아 있던 펠리온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이라네도 살아나지 않았을까? 성녀를 살리며 이라네도 살려 주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의 희망은 헛된 것이었고, 관 안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왜……. 성녀와 이라네가 다른 게 뭐라고. 둘 다 사람인데 왜 이라네는 되살아나지 않는 거야?”

펠리온은 손을 뻗었다.

“신이 하지 않는다면, 이라네. 내가 널 살릴게. 우리 영원히 함께하자…….”

그의 몸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백골에 살이 붙고, 피가 돌았다. 푸석하던 머리카락에선 윤기가 흘렀고 입술은 점차 붉어졌다.

그러나 영혼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라네에게 빨려 들어갔던 신의 힘은 다시 밖으로 새어 나와 허공에 흩어졌다.

“안 돼, 이라네, 제발. 제발 살아나 줘……!”

신성력이 펠리온의 생명력까지 끌어들이며 이라네에게로 옮겨 갔다.

몸속이 뒤틀리고 망가져 입 밖으로 피를 토했지만 펠리온은 멈추지 않았다.

그때 그의 위로 벼락이 내리쳤다.

펠리온이 아주 잠깐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다. 찰나의 시간이었으나, 이라네는 다시 백골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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