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펠리온은 이라네가 달려와 따뜻한 몸으로 자신을 안아 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세이렌에 홀린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펠리온을 바라볼 뿐이었다.
“공주님?”
펠리온의 목소리에 잠시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아래로 내리다가 급하게 들어 올렸다. 이라네의 새하얀 얼굴이 점점 발갛게 달아올랐다.
펠리온은 처음 보는 광경에 고개를 기울였다.
카멜레온도 아닌데 피부색이 변하다니. 그는 신기한 마음에 다가가 손을 들어 올렸다.
이라네도 처음 만났을 때 신기하다며 펠리온을 만졌으니 이 정도는 용납해 줄 터였다.
그러나 그가 다가갈수록 이라네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 물감처럼 번진 빛은 목덜미와 귓가까지 빼곡하게 물들였다.
펠리온은 신기한 마음보다 다른 기분이 앞섰다. 이라네의 얼굴에 떠오른 붉은빛을 만져 보지 않고서는 못 견딜 것 같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가 가까워졌을 때, 이마를 향해 작은 주먹이 날아왔다.
-딱!
곧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이마가 따끔거렸다.
신수가 된 이후 처음 느껴 보는 통증에 펠리온이 이마를 감싸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라네는 본능적으로 딱밤을 때린 제 손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별안간 몸을 홱 돌려 뛰어가 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펠리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펠리온은 서러웠다. 이라네가 사람이 되길 원한다고 해서 사람이 되었는데 보자마자 도망치다니.
‘내 모습이 이상한가?’
그렇다고 저렇게 기겁하며 달아날 일인가? 다신 나를 안 찾아오면 어떡하지?
그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코끝이 시큰거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기운을 내뿜어 쫓아내려던 그는 익숙한 발소리에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공주님?”
“그래. 나, 흠! 나야.”
“공주님!”
벌떡 일어나려는 펠리온을 향해 이라네가 다급하게 외쳤다.
“일어나지 마!”
“응?”
“일어나지 말고 이거 입어.”
이라네는 고개를 돌린 채 펠리온에게 옷을 내밀었다. 펠리온이 옷을 받아 들며 생글거렸다.
“선물을 안 가져와서 급하게 내려간 거였구나?”
“뭐래. 그런 거 아니거든?”
“응. 알겠어. 고마워. 그런데 이건 뭐야?”
“옷이야. 내가 입고 있는 것 같은 거. 사람들은 그거로 몸을 가려야 해.”
“왜?”
“그게 예의니까.”
그렇게 대답한 이라네가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거 안 입으면 너 안 볼 거야.”
“내가 흉측해? 가리지 않으면 다신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나를 떠날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정면으로 보지 않겠다는, 아니, 못 보겠다는 거야. 사람 몸으로 벗고 있는 건 창피한 일이니까.”
“알겠어. 그런데 어떻게 입어?”
이라네는 망설이다가 손을 뒤로 뻗었다. 펠리온은 눈치껏 그녀의 손에 옷을 올려놓았다. 이라네는 옷을 펼쳐본 뒤 바지를 내밀었다.
“작은 구멍 두 개에 다리를 한 짝씩 넣는 거야. ……다 됐어?”
“응.”
이라네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에게 허리끈을 묶는 방법과 윗옷을 입는 걸 알려 준 뒤에야 평소처럼 펠리온을 마주 볼 수 있었다.
펠리온은 소매 단추를 잠가 주는 이라네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예뻐?”
“뭐?”
“종종 예쁘다고 해 줬잖아. 예뻐?”
이라네의 얼굴에 다시 붉은빛이 돌았다. 그녀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예뻐.”
“얼마만큼? 공주님만큼 예뻐?”
“너는,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다시 이마에 주먹이 날아들었다.
“아야.”
힘 조절은 한 것인지 생의 두 번째 딱밤은 그렇게 아프지 않았지만 놀란 마음에 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그러자 이라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펠리온의 이마를 문질러 주었다.
“미안. 장난으로 살살 때렸는데. 아팠어?”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펠리온은 이라네의 손길이 좋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내릴 때쯤 양팔을 벌려 이라네의 몸에 둘렀다. 포옹이라기엔 어색한 몸짓이었으나 이라네의 심장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라네가 당혹스러움에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연신 팔락거렸다.
그 끝이 턱에 스치자 펠리온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라네는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터질 듯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이거 뭐 하는 거야?”
“그냥. 안아 주고 싶었어. 공주님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그러기 위해서 사람이 된 거야.”
이라네는 자신을 위해 사람이 된 용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풀어 제 몸에 제대로 몸에 감았다.
“그런 거면 이렇게 해야지. 허리를 안고, 서로에게 얼굴을 기대는 거야.”
이라네가 펠리온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펠리온이 어디에 기대야 할지 몰라 방황하자 이라네가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제 머리에 기대게 했다.
펠리온은 순순히 이라네의 손길을 따랐다.
평생 혼자였던 그에게 다른 생물과 하나처럼 붙어 있는 건 이상하고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마치 제 것처럼 뛰는 심장은 안정적이었고, 몸에 스치는 숨결은 어느 봄날 산등성 위로 스며드는 햇살만큼이나 따스하고 포근했다.
평생 이렇게 얽혀 있어도 행복할 것만 같았다.
***
시간은 흘러 소녀는 여자가 되었다. 이라네는 몇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펠리온을 찾아왔다. 오지 못하는 날에는 미리 말해 두곤 했다.
펠리온은 이라네가 오는 시간이면 사람으로 변해 그녀가 준 옷들을 곱게 차려입었다.
그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이라네는 펠리온에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었다. 펠리온은 금방 익숙해졌지만 머리카락을 관리하는 것만큼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머릿결이 원체 부드러운 덕분에 빗는 데에 힘이나 요령이 필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긴 탓에 금세 헝클어지곤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이라네와 함께 산을 산책할 때 나뭇가지에 머리카락이 걸린다든가, 함께 잔디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이야기를 나눌 때 팔이나 어깨 밑에 끼어 고통을 주었다.
그는 제 긴 머리카락을 원수처럼 움켜쥔 채 노려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이라네가 잠시 웃음을 터트렸다가 펠리온의 어깨에 기댔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왜 길게 만들었어?”
“길지 않은 것도 있어?”
“그럼. 짧은 머리로 사는 사람도 많아.”
“나는 공주님 머리가 길어서 다 긴 줄 알았지. 그럼 자를까?”
“음…….”
이라네가 고민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으로 펠리온의 머리를 빗어 내렸다.
“편하면 그렇게 해. 그런데 아깝긴 하다. 이렇게 예쁜데.”
“예뻐?”
“응.”
“얼마나? 공주님만큼 예쁜가?”
“그 질문 좀 그만하라니까!”
이라네가 펠리온의 이마에 가볍게 딱밤을 때렸다. 펠리온은 아픈 척을 했지만 이라네는 더 이상 속지 않았다.
이마를 문질러 주지 않자 그는 입술을 삐죽이며 이라네를 안고 옆으로 쓰러졌다.
“그럼 그냥 둘래.”
“난 좋아. 네 머리카락은 맑은 날의 새하얀 설원만큼이나 반짝거리거든. 정 불편하면 땋아 줄까?”
“그게 뭔데?”
“돌아앉아 봐.”
이라네가 펠리온을 앉히고 그의 머리를 빗어 하나로 땋아 주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편하지?”
“응. 공주님이 최고야.”
펠리온이 드러눕는 이라네 위로 몸을 겹쳤다. 이라네는 그를 눈을 바라보다가 그의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펠리온. 그런데 너는 왜 나를 공주님이라고 불러?”
“공주님이 처음 알려 준 말이니까.”
이라네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펠리온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라네라고 불러 줘.”
“그렇게 부르면 뭐가 달라?”
“응. 아주 소중한 사람한테만 허락한 이름이거든.”
“그럼 소중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부르는데?”
“너처럼 공주님이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이라네리아라고 불러. 혹은 둘 다 합쳐서 이라네리아 공주님이라고 하거나.”
“이라네…….”
곱씹은 단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존재감 없던 심장이 크게 뛰며 몸의 말단까지 뜨거운 피를 전달했다.
그는 어느 날의 이라네처럼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에 이라네의 입술이 가득 들어찼다. 그는 뜨거운 숨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이상해.”
“뭐가?”
“가슴이 뛰고 입을 맞추고 싶어. 이라네의 눈을 보고 있으면 세상이 환해지고 자꾸 웃음이 나. 그런데 이게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어. 이라네는 알아?”
“응.”
“이게 뭔데?”
“……사랑.”
그녀의 대답이 끝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맞붙었다. 펠리온은 이라네의 숨을 모두 삼켰다.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 그녀의 영혼까지 취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면. 이대로 하나가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
두 사람의 관계는 나날이 발전했다.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몸을 어루만졌다. 마음과 일상을 공유했다.
그러던 중 펠리온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챘다.
세상을 받치고 있던 세계수의 꽃이 지고, 그 가지가 시들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펠리온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제 곁에 이라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만 제 곁에 있다면 세상이 무너져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수천 년간 이어진 외로움도 영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복 또한 영원히 그들의 곁에 머무르지 않았다.
결국 세계수는 썩어서 무너지고,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