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펠리온이 왜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 없었는가를 설명하려면, 아주 오래전, 아직 인간이 번성하지 않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때는 분홍색 꽃이 피는 거대한 세계수가 세상 가운데를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던 시대. 신의 숨결은 세상 구석구석에 닿았고, 세상에는 신수와 정령, 온갖 이종족들이 어울려 살았다.
그때, 펠리온은 이름조차 없는 한낱 미물이었다.
드래곤들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해 눈을 뜨기도 전에 깊은 동굴 속에 버려졌다.
죽어 가던 그에게 닿은 것은 오직 그를 가엾게 여긴 신의 손길뿐이었다.
“아이야. 내가 너를 살려 주마.”
신성력이 온몸을 휘감고 이름 없는 용은 신수가 되었다.
그는 신성력을 흡수할 수 있게 되었고, 영원과 같은 시간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드래곤들은 본디 오만하고 수명이 천 년 가까이 되었기에 신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신수의 존재 역시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이름 없는 용은 여전히 동굴에 웅크려 있었고, 혼자였다.
공기 중에 있는 신성력만 흡수해도 살 수 있었기에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동굴 밖으로 보이는 작은 세상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기분이 좋은 날에는 다가오는 생물들을 구경하고 안 좋은 날에는 겁을 줘 쫓아냈다.
그렇게 2000년이 지났다.
못 보던 생물들이 탄생하고 인간들은 번성했다. 오만한 동족들은 하나둘씩 개체 수가 줄어 멸종에 다다랐다.
인간의 개체 수가 늘어남과 함께 여기저기에서 왕국이 생겨나고, 멸망과 부흥을 반복했다. 그 전쟁에 휘말려 온갖 이종족들은 멸종하거나 아주 깊은 곳으로 몸을 감췄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오직 그만이 정체되어 있었다.
“여긴 또 어디야?”
갑자기 나타난 소녀만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멈춘 것 같은 시간 속에서 멀미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이름 없는 용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두리번거리는 소녀를 보았다.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침 오늘따라 기분도 나쁘지 않은 터라 이름 없는 용은 신기한 마음으로 소녀를 지켜봤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악!”
놀란 소녀가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소리를 질렀다. 근처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높은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 그는 본능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소녀를 위협했다.
당장 겁을 집어먹고 도망갈 줄 알았던 소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었지만 그 사이로 희미한 호기심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이게 뭐지?”
“크릉.”
“신기하게 생겼네. 몸집도 크고.”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정령의 목소리만 들어 본 그에게는 그마저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는데 소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다시 위협하는 소리를 내자 소녀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마치 애완견을 어르는 듯한 소리를 냈다.
“우쭈쭈. 착하지? 괜찮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신수를 개처럼 다루다니.
이름 없는 용은 코웃음을 쳤다. 웃음과 함께 훅 빠져나온 바람이 소녀에게 쏟아졌다. 뒤로 밀려난 소녀가 둥글게 말린 건초처럼 데굴데굴 굴러갔다.
깜짝 놀란 용이 몸을 움찔거리자 땅이 거세게 흔들렸다.
커다란 소리에 용은 이번에야말로 소녀가 도망갔을 거라 여겼으나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의 얼굴에는 오직 호기심만이 가득했다.
“너, 사람 말 알아들을 수 있구나?”
용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무시였지만 소녀는 다시 용에게 다가왔다.
“내 이름은 이라네. 이 나라의 공주야. 너는?”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말을 모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몇천 년을 살았고, 그것이 아니라도 신수이기에 세상의 모든 존재와 소통할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이름 없는 용일 뿐이었다.
기분이 나빠진 그가 꼬리를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먼지 뭉치처럼 굴러간 인간 소녀가 떠올라 조용히 꼬리를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이라네리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그에게 더 다가왔다.
“그냥 말하지 마. 내가 지어 줄 테니까. 음……. 어디 보자. 덩치가 산만 하니까, 펠로그리온 산맥 이름을 따서 펠리온은 어때?”
“흥.”
“좋아, 펠리온. 만나서 반가워.”
이라네가 손을 뻗어 펠리온의 코에 손을 댔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비늘은 차갑고 아름다우며, 사람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부드러웠다. 그 감촉에 이라네가 감탄했다.
“펠리온. 너 정말 예쁘구나?”
막 가공한 보석처럼 커다랗고 반짝이는 눈으로, 펠리온이 이라네를 보았다.
그러다가,
“후―!”
입김으로 이라네를 날려 버렸다.
다시금 뒤로 나뒹군 소녀는 누운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펠리온은 그녀를 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게 이름 없던 용은 작은 나라의 공주와 만나 펠리온이 되었다.
***
공주는 매일같이 용을 찾아왔다. 어떤 날은 예쁜 꽃을, 어떤 날은 반짝이는 보석을, 어떤 날은 맛있는 음식을 들고 산을 올랐다.
처음에는 왜 저러나 싶었던 펠리온도 슬슬 오늘은 뭘 가져올까, 하며 공주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라네 공주가 아무 대가도 없이 가져온 것을 펠리온에게 준 것은 아니었다.
“공주님. 해 봐. 자, 착하지? 공주님.”
어이없게도 소녀는 용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려 하고 있었다.
인간의 말은 물론 정령과 인어의 말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던 펠리온은 코웃음을 쳤다.
펠리온은 사실 소녀가 저 어이없는 짓거리를 시작한 날 당당하게 욕을 날려 소녀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콩후힝.”하는 이상한 소리뿐이었다.
덕분에 깔깔 웃던 이라네는 펠리온의 입바람에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능숙하게 뒤로 굴러간 이라네는 잔디에 누워 한참을 웃다가 옷에 묻은 풀을 털어 내고 다시 우아한 공주로 돌아갔다.
“오늘 기분이 별로였는데 웃겨 줘서 고마워. 내일 또 올게.”
언제 바닥을 굴러다녔냐는 듯 등과 어깨를 쭉 펴고 떠나는 공주를 보며 속으로 ‘공주님’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그 뒤로 이라네가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오면 따라 하는 척을 해 주고, 내키지 않는 날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혼자 있는 날이면 ‘공주님’을 연습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공주님’과 비슷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며칠간 이라네가 찾아오지 않았다.
첫날은 기다리다가 해가 지고 말았다. 둘째 날에는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셋째 날이 되었을 때, 펠리온은 참지 못하고 몇천 년간 나가지 않았던 동굴 밖으로 머리를 빼냈다.
그리고 넷째 날. 그가 완전히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이라네가 찾아왔다.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그녀는 밖에 나와 있는 펠리온을 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햇빛 아래서 반짝이는 그를 홀린 듯 보던 이라네는 이내 펠리온의 콧잔등에 엎드려 눈물을 쏟아냈다.
“언니가 죽었어. 새로 사귄 친구를 소개해 주기로 했었는데, 너를, 너를 소개해 주려고 했는데…….”
펠리온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 누군가를 위로하고 싶어졌다. 그녀처럼 온기를 가진 몸으로 안아주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괜찮다며 다독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너무나도 컸고 손톱은 날카로웠다.
펠리온은 자신이 공주를 위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
울음이 뚝 멈추고, 이라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미소 지었다.
“날 위해 연습한 거야?”
펠리온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라네는 고맙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눈물을 흘렸다. 볼을 타고 흐르는 진주 같은 눈물은 드래곤의 비늘만큼이나 반짝거렸다.
펠리온은 이라네가 자신과 같은 드래곤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이라네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가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
“아니야. 이 말은 잊어 줘. 나는 네가 뭐든 네 하나뿐인 친구야. 그러니까 너는 날 두고 죽으면 안 돼. 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알겠지?”
펠리온은 긍정의 대답으로 그녀에게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녀는 양팔로 펠리온에게 매달려 눈물을 흘리다가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산을 내려갔다.
홀로 남겨진 펠리온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짝이던 별 하나가 공주의 눈물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졌다.
‘내가 사람이었으면 너와 함께 내려갈 수 있었을까?’
그는 눈을 감았다. 바람의 정령에게 들었던 인간 남자에 관한 것을 떠올렸다.
키는 이라네보다 크고, 팔다리는 단단한 근육으로 감싸져 있고, 넓은 어깨와 그보다는 가늘지만 튼튼한 허리. 엉덩이는 탄력 있고 봉긋해야 인기가 많다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 남자의 몸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동안 흡수했던 신성력들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몸이 비틀리며 점점 작아졌다. 그의 몸에는 있을 리 없는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나 등을 덮었다.
그는 호수 앞에 주저앉아 제 모습을 바라봤다.
이라네가 아닌 인간은 처음 보는 것이라 제대로 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공주보다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는 날이 밝은 것조차 느끼지 못한 채 불만스러운 얼굴로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산으로 올라온 이라네가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남자를 경계하며 유심히 바라보다가 넋을 놓고 말았다.
남자는 신화에서 갓 튀어나온 것처럼 성스러워보였고,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몸 역시 마치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해 놓은 것처럼 완벽했다.
호수의 표면처럼 새하얗게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던 이라네가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펠리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펠리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공주의 미소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안녕, 공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