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나는 곧 닥칠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자마자 뭔가가 허리를 홱 낚아채는 게 느껴졌다. 괴물이었으면 몸에 가시가 박혔을 텐데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아르만인가 싶어 눈을 떴다.
희미한 빛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펠리온.”
익숙한 이름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자마자 로그리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단순히 소리가 나서 돌아본 게 아니었다. 마치 제 이름에 반응한 것처럼 나를 보던 그가 이내 청보라색 눈동자를 커다랗게 떴다.
그러나 어떤 대화를 나눌 새도 없이 거대한 그림자가 우리를 덮쳤다.
본능이라고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로그리예가 나를 밀어 냈다. 이내 쾅! 하고 섬뜩한 소리를 내며 괴생물의 다리가 로그리예를 후려쳤다.
옆으로 날아간 로그리예가 동굴 벽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로그리예!”
나는 그에게 달려가며 검을 뽑았다. 동시에 두두두두 소리를 내며 땅이 흔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괴생물이 희미한 빛 쪽으로 걸어 나오며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를 공격했던 것은 마차 두 대를 합쳐 놓은 것만큼 큰 거미였다.
‘저렇게 큰 거미가…… 존재할 수 있나?’
너무 놀라 몸이 굳었다. 동시에 거미 다리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검의 옆면으로 겨우 막긴 했으나 거미의 힘을 이기지 못한 몸이 뒤로 쭉 미끄러지다가 나뒹굴었다.
순간, 쇄도하는 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내가 있던 자리에 거미의 다리가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달려온 아르만이 높이 뛰어올라 떨어지는 힘을 이용해 거미의 다리를 잘라 냈다.
“키이이익!”
거미가 비명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커다란 몸이 벽면에 부딪히자 모래가 안으로 쏟아지며 빛을 가렸다.
나는 아르만의 팔을 잡고 로그리예가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거미가 모래를 뚫고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아르만이 막아섰지만 이내 로그리예처럼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크륵, 크르르르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새까맣고 반질반질한 여덟 개의 눈에 내 모습이 비쳤다. 이 자리를 안전하게 빠져나갈 자신은 없지만 검을 고쳐 잡았다.
그때, 눈앞에 붉은빛이 보였다. 그 빛은 옷 속에 있는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혼자 붕 떠올라 옷 밖으로 나온 붉은 보석이 로그리예가 있는 쪽으로 날아가려 했다.
불길한 빛은 아니었으나 거미의 눈길을 끌 것 같아 가리려는데 거미가 내 쪽으로 빠르게 돌진했다.
나는 급하게 빛을 뿜는 보석을 움켜쥐고 잘린 거미 다리 쪽으로 몸을 굴렸다. 거미가 나를 따라 몸을 홱 비틀었다. 그리고 다리가 아니라 뾰족한 집게 모양의 입을 들이밀었다.
나는 재빨리 드러난 거미의 입을 향해 칼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칼은 거미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오히려,
-쨍그랑!
거미의 집게 입에 끼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물리면 몸이 반토막 나고 말 것이다. 마른침을 삼키며 목걸이만 꽉 쥐고 있을 때, 등 뒤에서 로그리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주님, 숙여.”
주저앉자마자 머리 위로 거대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휩쓸린 머리카락들을 뒤로 넘기며 앞을 보자 바람으로 이뤄진 거대한 칼날이 보였다.
그러나 아주 순간뿐이었다. 칼날의 움직임을 눈에 담기도 전에 로그리예가 망토로 나를 휘어 감으며 몸을 돌렸다.
머리 위까지 완전하게 덮은 망토 너머로 비가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멈추고 망토를 치워 내자 비리고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했다.
방금 로그리예가 쓴 것은 마법이었으니까.
“너 도대체-”
“씻으러 가자.”
“뭐?”
입을 열기가 무섭게 로그리예가 내게 팔짱을 끼고 무작정 걸어 나갔다.
“이런 데서 이야기하기 싫어.”
자는 주변을 둘러봤다. 널브러진 거미의 잔해와 아르만……, 아르만?
“잠깐, 아르만이,”
“괜찮아, 괜찮아. 안 죽었어. 뼈가 많이 부러진 것 같긴 한데, 여긴 신성력이 충만하니까 금방 회복될 거야.”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그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손을 까딱이자 아르만의 몸이 떠올라 우리에게로 천천히 날아왔다.
나는 깜짝 놀라 로그리예를 쳐다봤다.
“너 괜찮아?”
로그리예는 대답하는 대신 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거대 거미의 사체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징그러우면 눈 감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분명 마법을 썼는데, 그의 얼굴은 멀끔해 보였다. 오히려 떨어지는 나를 받아 냈을 때보다 더 생기가 돌았다.
한참을 걷던 그가 한쪽 벽에 자리한 좁은 굴을 지나 나를 내려놨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환한 빛이 주변을 밝혔다.
나는 둥둥 떠다니던 아르만이 깨끗한 바닥에 바로 눕혀지는 것을 확인하고 내부를 둘러봤다.
궁전의 대연회장만큼 큰 아치형 동굴은 새하얀 돌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분홍색 꽃이 핀 거대한 나무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꽃이 핀 가지가 천장을 완전히 뒤덮어, 마치 거대한 꽃나무 아래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가 어디야?”
“2000년 전에 어떤 팔불출 황제가 자기 부인의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서 만든 곳이야. 그 옆엔 신이 직접 그들의 탄생을 새겨 넣었지. 나도 와 보는 건 처음이야.”
로그리예가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동굴 중앙, 커다란 연못에 있는 물들이 떠올라 내 몸을 휘어 감았다. 그리고 더러운 것들만 씻어내리고 사라졌다.
깨끗해진 몸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로그리예가 내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빛 한점 들지 않는 동굴인데도 주변에는 풀과 나무가 무성했고, 고여있는 물 역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연못 중앙에는 오래된 사원 같은 것이 있었는데, 지붕은 없고 기둥과 난간만 있는 것으로 보아 벽화를 편하게 감상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커다란 나무 벽화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성녀의 여정이, 오른쪽에는 신의 탄생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오른쪽을 보고 서 있는 로그리예를 잡아끌었다.
“이제 설명해 봐. 여긴 어떻게 알고 있어? 마법은 어떻게 된 거고? 아니, 그것보다……. 너 도대체 누구야?”
“답은 이미 알고 있잖아, 공주님.”
로그리예가 장난기 없는 얼굴로 나와 눈을 맞췄다. 이미 확신하고 있지만 그래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시야를 가득 채운 청보라색 눈동자에 푸른색이 짙어졌다가 다시 제 색으로 돌아왔다.
찰나의 순간 지나갈 푸른색 눈동자는 내게 너무 익숙한 것이었다.
“……펠리온.”
한숨 같은 호명에도 그는 대답했다.
“응.”
“너, 진짜 펠리온이야? 라파일은 네가 죽었다고 했는데, 역시 그의 착각이었던 거야?”
“거의 죽긴 했었지. 심장이 잠깐 멈췄었으니까.”
펠리온이 제 심장을 잠깐 내려다봤다가 내 목에 걸린 줄을 검지에 걸어 목걸이를 옷 밖으로 끄집어냈다.
“그런데 진짜가 공주님한테 있어서.”
목걸이 줄을 타고 미끄러진 펠리온의 손이 붉은 보석을 감쌌다.
나는 혼란스러움에 뒷걸음질 쳤다.
보석이 펠리온의 손아귀를 벗어나 내 가슴께로 툭 떨어졌다.
“그러니까, 드래곤의 심장이 네 심장이어서 네가 살았…….”
말을 하다 멈춘 나는 보석과 로그리예를 번갈아 보았다.
잠깐, 드래곤의 심장이 제 심장이라면…….
“너 사람이 아니야?”
“응.”
나는 혼란스러워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인데 펠리온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입을 떡 벌리고 보다가 기가 찬 숨을 내뱉었다.
그럴 수가 있나? 드래곤은 그냥 신화 속에 나오는 환상의 동물 아니었어? 그것보다, 드래곤씩이나 되는 분이 왜 내 주변을 맴돌아?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인가?
질문이 많아질수록 그와 내 사이가 멀어졌다. 나도 모르게 계속 뒷걸음질을 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기가 무섭게 펠리온이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
펠리온은 하라는 대답은 하지 않고 나를 번쩍 들어 난간에 앉혔다. 바짝 붙어 허리를 감싸는 게 도망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나 역시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펠리온의 행동이 제법 괘씸했다.
그의 손을 풀어내자 펠리온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나를 간절하게 올려다봤다.
“절대 공주님을 기만하려던 건 아니었어. 내가 다 설명할게.”
시선을 내려 눈을 맞추자 펠리온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펠리온을 응시하다가 목걸이를 빼내어 그의 목에 걸어 주었다. 내 행동이 거절을 뜻한다고 생각했는지 펠리온이 고개를 번쩍 들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기 전에 턱을 붙잡아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처음부터, 낱낱이,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게 좋을 거야.”
펠리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점차 슬프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