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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20화 (120/151)

<120화>

제로스가 문틀을 짚으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왔다.

“제가 길을 알아요.”

살아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곳에 아직 성인도 아닌 애를 데리고 갈 순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길은 우리도 찾을 수 있어.”

“저는……. 엄마한테는 말 못 했지만, 의사가 제 몸 상태로는 1년밖에 못 산다고 했어요. 제가 죽으면 엄마는 혼자예요. 아버지도 병으로 잃었는데, 저까지 엄마를 남겨 두고 죽을 순 없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로스가 제 옷자락을 움켜쥐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에게 제가 죽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어른에게 기대지 못한 채 혼자 삶의 무게를 버티려 하는 게 키네시아와 비슷해 보였다.

“너, 몇 살이니?”

“열넷이요.”

심지어 키네시아가 나를 만났을 나이도 비슷했다. 차마 단호하게 외면할 수가 없어 이마를 짚고 긴 한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거실로 돌아오던 제로스의 엄마가 충격받은 얼굴로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게, 그게, 무슨 말이니? 죽는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엄마…….”

“네가 왜 죽어! 너 같이 어린애가, 왜, 왜 죽어! 왜 그런 말을 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 내는 그녀에게 제로스가 달려갔다.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모자를 보자 마음이 불편해졌다.

데려가는 게 옳을까, 두고 가는 게 옳을까 고민하던 차에 로그리예가 나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 데리고 가자.”

“위험할 수도 있어.”

“알아. 그렇지만 두고 가면 여보 마음이 아프잖아.”

“…….”

“그리고 강한 신성력이면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완화될 수 있으니까, 위험하지 않은 곳까지만 동행하면 되지.”

로그리예의 말이 들렸는지 흐느끼고 있던 제로스와 그의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두 쌍의 눈에 깃든 희망을 도무지 내 손으로 꺾을 수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같이 가. 대신 위험해 보이면 바로 돌아가야 해.”

제로스는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됐어. 아직 치료된 것도 아닌데.”

우리는 다 같이 밖으로 향했다. 아르만이 집 근처에 묶어 두었던 말을 끌고 왔다.

체력이 제일 약한 제로스와 그의 엄마를 말에 태우고 산을 향해 걸었다. 산에 오르고부터는 제로스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우리를 안내했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체력이 빠르게 고갈되었다.

지친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는데 로그리예가 내게 등을 내밀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여보, 업히세요.”

“넌 괜찮아?”

“그럼. 나를 뭐로 보고.”

나는 사양하지 않고 로그리예의 등에 업혔다. 산세가 험해지자 말을 타고 오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말은 나무에 묶어 두고 아르만이 제로스를 업었다.

제로스가 시키는 대로 가고 있는데 로그리예의 목덜미가 창백해지는 게 보였다.

“너 어디 아파?”

“으응? 아니?”

반응을 보니까 아픈 게 맞네.

나는 내려놓으란 의미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나 로그리예는 내 신호를 못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아무런 말도 없이 아르만을 따라갔다.

그러나 내 다리를 끌어안듯 바친 팔에도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그리예의 등을 밀며 몸을 뒤로 뺐다. 로그리예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놓아주고 잠시 휘청거렸다.

“아르만. 잠깐만.”

아르만이 멈춰 서서 제로스를 내려놓았다. 나는 로그리예의 양 볼을 감싸 들어 올리며 제로스에게 물었다.

“동굴은 얼마나 더 가야 해?”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요. 정상에 있거든요. 엄청 커서 아마 바로 보일 거예요.”

나는 로그리예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창백한 피부와 핏기가 가신 입술. 흐릿한 눈동자와 식은땀. 이런 증세는 저번에도 본 적이 있었다.

라파일이 그에게 신성력을 주입했을 때, 그리고 플로레타가 성녀로 발현한 날.

둘 다 신성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기적의 동굴에서 나오는 건 신성력이 맞다. 그리고 로그리예는 마법사다.

내게 왜 그 사실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사인 게 확실하다.

로그리예의 볼을 놓아주고 정상을 보며 섰다. 숨을 들이마시자 청량함이 느껴졌다.

“신성력이 여기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으니까, 제로스 너는 어머니와 여기 있어.”

“네.”

나는 다시 로그리예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힘든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일어서려는 그의 어깨를 눌렀다.

“로그리예. 너는 여기 있어.”

“아니야. 같이 가.”

“고집부리지 마. 또 피 토하려고?”

로그리예가 아름다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속이 답답해 딱밤을 때려 주고 허리를 폈다.

한 번 더 붙잡을 줄 알았는데 그는 창백한 얼굴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별일이네.’

좀 불안하긴 하지만 저 몸 상태로 쫓아오진 않겠지.

“어쨌든 여기 있어. 자세한 건 돌아와서 이야기해.”

로그리예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얌전히 제라스 옆에 앉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다가 한 번 더 따라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뒤 몸을 돌렸다.

“아르만, 가자.”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으나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제로스의 말대로 조금 더 올라가니 정상이 나왔다.

신성력의 영향 때문인지 나무와 풀들이 올라오면서 봤던 것들보다 확실히 크고 생기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이건 동굴이 아니라 구덩이인데?”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깔때기 모양으로 생긴 구덩이의 입구는 어지간한 집 한 채도 들어갈 정도로 컸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졌다.

상대적으로 좁아 보이지만 그마저도 성인 남성 다섯 명이 동시에 통과할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심지어 경사면이 모래라 발을 헛디디면 기어 나올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여기로 들어가야 하는 거겠지?”

“그런 것 같습니다.”

나와 아르만은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저 구덩이 말고는 동굴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근처의 커다란 나무에 묶여 있는 밧줄 여러 개도 전부 그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

나는 아르만과 함께 제일 튼튼해 보이는 밧줄 하나를 끌어 올렸다.

“땅에 끌린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게. 도대체 저 구멍은 얼마나 깊은 거야?”

“다른 밧줄들을 끊어서 연결할까요?”

“그러자. 그리고 중간중간에 두껍게 매듭지어. 발 디딜 수 있게.”

“예, 아가씨.”

대부분 선박을 묶을 때 쓰는 것처럼 두껍고 튼튼했기에 한 번씩만 매듭을 지어도 발을 디딜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와 아르만은 밧줄 몇 개를 끊어 상태를 확인하고 우리가 끌어올린 줄과 묶어서 길게 연결해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다시 구덩이 속에 던져 넣었다.

밧줄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두두두두.

땅이 흔들리는 게 느껴지며, 모래가 구멍 안으로 물처럼 빨려 들어갔다.

모래의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자 아르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망토를 끌러 밧줄과 제 몸을 한데 묶었다.

“제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그래. 나도 바로 따라 내려갈게.”

“네.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아르만이 어느 정도 내려간 뒤에 나도 밧줄을 잡았다.

그가 했던 것처럼 망토로 허리와 밧줄을 한꺼번에 꽉 묶고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좁은 구멍을 통과하자마자 주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위에서 흘러든 빛이 아니었다면 내부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밧줄의 마지막 매듭은 허공에서 3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 밑은 매듭이 없는 그냥 밧줄이었다.

아르만은 뛰어내려 땅에 무사히 착지했다. 나는 그와 나 사이의 높이를 가늠한 뒤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받아!”

“네?”

손을 놓자 망토에 묶인 몸이 밧줄을 타고 쭉 미끄러졌다.

곧 단단한 팔이 내 몸을 안정적으로 받아 냈다. 나는 바로 다리를 내려 아르만의 팔을 벗어나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잘했어.”

“감사합니다…….”

아르만이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칭찬받은 게 쑥스러운가 싶어 그의 어깨를 몇 번 더 두드려 주는데, 내 손바닥이 그의 어깨에 부딪힐 때마다 둥, 둥, 바닥이 울렸다.

내 힘이 이렇게 셌나? 거대한 동굴이 다 울릴 정도로?

당연히 그럴 리 없지.

슬그머니 아르만에게 올려 두었던 손을 떼고 검을 뽑자 아르만도 검을 뽑았다.

우리는 입을 꾹 다문 채 소리가 들린 쪽을 응시했다. 순간, 검고 거대한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저게, 뭐야……?”

내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가시인지 털인지 모를 것이 잔뜩 박힌 무언가가 어둠을 뚫고 튀어나와 바닥에 쾅 틀어박혔다.

통나무 굵기만 한 그것은 마치 곤충의 다리 같았다.

그게 뽑혀 나간 자리는 사람의 무릎이 잠길 정도로 깊은 홈이 파여 있었다. 나는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이며 밧줄을 잡았다.

“아르만!”

“먼저 가십시오, 어서!”

나는 밧줄을 잡으며 아르만을 끌어당겼다.

“너도 빨리 밧줄 잡아!”

아르만이 밧줄을 잡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도 곧장 밧줄을 타고 올라 첫 번째 매듭에 발을 디뎠다.

나는 아르만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보기 위해 아래를 확인했다. 그는 어느새 밧줄을 놓은 채 곤충 다리를 피하고 있었다.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그를 부르려는데,

-휘이익!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머리 위로 뾰족하고 징그러운 다리가 스쳤다.

단번에 두꺼운 줄이 잘리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손쓸 새도 없이,

“공주님!”

몸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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