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키네시아는 일부러 먼 길을 선택해 오래도록 걸었다.
걷는 도중에 부글부글 끓던 머리가 서서히 제 온도를 찾았다.
그녀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요르고스 황자의 말이 옳아.’
에피파네스가 성장했다고는 하나 아직 파라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황제의 청혼을 명분도 없이 거절할 수 없고, 거절해서도 안 되는 입장이었다.
키네시아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하인들을 시켜 복도로 빼 두었던 책상을 가지고 들어오게 했다.
그녀는 스페르모가 보낸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어찌 되었든 전쟁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 된다.
아직 라파일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상태로 전쟁이 벌어지면 그 정신 나간 성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게다가 아직은 동맹국이 완벽히 형성되지 않아 파라돈과 레튜니아, 둘 중 어느 쪽이 전쟁에서 우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해.’
그녀는 종이를 꺼내 펜을 들었다. 그리고 스페르모에게 현재 상황을 알렸다.
황제를 막을 수 있는 건 황제뿐이다. 그러니 레튜니아에서도 청혼서를 보낸다면 시간을 벌 수 있다. 어차피 둘 중 한 곳을 선택해 동맹을 맺을 생각이었으니 계획에도 차질이 없었다.
하지만 편지에 노골적으로 청혼해 달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상황만 알려도 레튜니아가 알아서 적당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 에피파네스의 전력을 파라돈이 가져가게 둘 순 없을 테니까.
아쉬운 소리는 레튜니아가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때 해도 충분했다.
그녀는 편지에 인장을 찍어 마무리 짓고 하인을 불렀다.
“스페르모 황자님께. 마법 우편을 이용해서 최대한 빨리 보내 줘.”
“예, 공주님.”
한시름 덜어 낸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긴 숨을 내쉬고 며칠 전 소피아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플로레타에게 전서구를 전달했다고 했었지.’
그녀는 혹시 편지가 온 게 있나 열쇠로 서랍을 열어 보았다.
전서구 위에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키네시아는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바로 쪽지를 빼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갈게. 지금 에피파네스 근처이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F-]
그녀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서랍을 닫았다.
이라네에게는 라파일의 뜻대로 하라는 허락을 받았으니 플로레타가 올 때까지 협조하는 척 버티면 된다.
‘되도록이면 플로레타가 올 때까지 미친 성자가 아무것도 시키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녀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른쪽 손에서 수천 개의 바늘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진통제를 먹기 위해 힘겹게 걸음을 옮겨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보라색 태양 문양이 그려진 카드가 있었다. 그 카드를 들어 올리자마자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라파일이 보낸 게 분명했다. 그녀는 긴장 한 채 조심스럽게 카드를 펼쳤다. 안에는 소박하지만 반듯한 글씨로 잔인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4개월 드리겠습니다. 국왕 부부를 죽이세요.]
***
“이제 이 마을만 지나면 됩니다.”
아르만이 마을 입구로 들어서며 말했다.
“정확한 위치는 찾아봐야 알겠지만, 뒤쪽에 보이는 산 어딘가에-”
“그 애 좀 잡아 주세요! 제발요!!”
절박한 외침이 아르만의 말을 잘라냈다. 나는 로그리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로그리예가 고삐를 틀어 달려오는 소년의 앞을 막았다.
소년은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는지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 행로도 아르만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소년은 초조한 듯 뒤를 힐끔거리며 말과 말 사이로 지나가려고 했다. 그사이 달려온 중년 여성이 소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제로스, 그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거니!”
“이, 이거 놔!”
“제발 엄마 말 좀 들어, 응? 차라리 성녀님께 가자.”
“그런 고귀한 분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만나 줄 리 없잖아!”
소년이 몸을 비틀어 기어이 제 엄마를 떨쳐 냈다. 그 반동으로 밀려난 중년 여성이 다급하게 손을 뻗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소년에게 닿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중년 여성 대신 소년의 앞을 막았다.
로그리예가 내 옆에 나란히 서서 허리에 손을 얹고 엄한 척을 했다.
“어허! 엄마 말 들어야지, 꼬마야.”
“누가 꼬마야?”
고개를 홱 치켜든 소년이 로그리예의 얼굴을 보고 넋 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소년이 방심한 틈을 타 아르만에게 눈짓하자 그가 소년을 번쩍 들어 어깨에 걸쳤다.
“아악! 이거 놔! 너희 누군데 날 방해하는 거야!”
“아르만, 꽉 잡고 있어. 도망 못 가게.”
“네, 아가씨.”
그의 호칭에 내게 다가오던 중년 여성이 움찔거렸다. 난동을 피우던 소년도 잠잠해졌다.
나는 중년 여성을 향해 말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안내해.”
“아, 아니, 안 그러셔도…….”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됐어. 어렵지도 않은 걸 가지고, 뭘.”
여성은 우리를 집으로 데려갔다. 제로스라 불린 소년은 잠깐 잠잠해졌다가 다시 버둥거렸다. 그러나 격렬했던 움직임도 곧 잦아들더니 잠들었는지 소년의 몸이 축 처졌다.
저렇게 빨리 잠든다고? 황당해 쳐다보고 있는데 제로스의 엄마가 다 쓰러져 가는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예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여자의 몸을 보았다. 뼈대도 가늘고 근육도 없는 게, 잠든 아들을 혼자 집으로 안아 들고 가긴 힘들 것 같았다.
“아르만. 침대에 눕혀 놓고 나와.”
“아니에요! 귀족분들을 이렇게 누추한 곳에, 괜찮, 괜찮습니다.”
“우리 귀족 아니야. 나는 그냥 돈이 엄청 많은 것뿐이고, 얘는 내 약-”
“남편.”
“남편, 쟤는 내 호위.”
그녀는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우리를 살피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같은 평민이라는 말에 안도한 모양새였다.
“귀족분들인 줄 알고 긴장했어요. 그럼 방까지만 부탁드릴게요. 제일 안쪽 방에 눕혀 놓으시면 돼요.”
“네.”
아르만이 안으로 들어가자 중년 여성이 우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도와주신 것도 감사한데, 잠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실래요?”
“그러지 뭐. 괜찮지, 로글?”
“난 여보가 괜찮으면 다 괜찮지.”
부인은 우리를 안으로 안내하고 차를 내주었다. 제로스를 내려놓고 온 아르만도 우리 옆에 앉았다.
“그런데 쟤는 왜 그런 거야?”
턱으로 제로스가 누워 있는 방을 가리키자 중년 여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산꼭대기에 어떤 병이든 치료해 주는 곳이 있어요. 20년 전에 사고로 실명한 사람이 들어갔다가 씻은 듯이 나아서 나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거길 가려고 저러는 거예요.”
“지병이라도 있어?”
“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는데, 요즘에는 멍이 잘 들더라고요. 그러더니 며칠씩 앓는 날이 많아져서……. 체력이 많이 안 좋아졌다는데 좋은 것 사 먹일 돈은 없고…….”
여자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손수건을 건네자 여자가 손을 내저어 사양하고는 손으로 급하게 눈물을 닦아 냈다.
“흡, 죄송해요. 정말, 처음 뵙는 분들에게 주책이네.”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지병이 있다면 산에 가는 게 더 낫지 않아?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말려?”
“병이나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더 많거든요.”
소름이 돋는지 여자가 팔뚝을 문질렀다.
“사람들은 기적의 동굴이라고 부르지만, 지금까지 거기에 갔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4명뿐이에요. 게다가 상처나 병이 다 나아도 다들 미친 사람처럼 변해서는, 어쨌든 제로스는 그냥 체력이 바닥난 건데 목숨을 걸 필요는 없잖아요”
“몇 명이 들어갔는데?”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제가 아는 건…….”
여자가 마른침을 한번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약 300명 정도예요.”
“300명?”
“네. 처음에는 기적이라면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왔었거든요. 그런데 들어간 사람들이 대부분 돌아오지 못하자 발길이 뚝 끊겼어요.”
나는 로그리예를 보았다.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기적의 동굴이라는 곳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병과 상처가 나아도 실성하고, 그게 아니면 실종되어 버리다니.
신성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제정신이 아니고, 수도를 반파해 많은 사람을 죽인 라파일의 상태와 비슷하지 않은가?
게다가 영혼을 다른 몸으로 옮기는 실험이라고 했으니 사람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들어간 사람들이 실종된 것과도 앞뒤가 맞는다.
‘가 봐야겠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아르만과 로그리예를 툭툭 치고 눈짓으로 뒷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려는데,
“저도 데려가 주세요.”
방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