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했지.’
그럼 지금 상황에서 라파일이 무슨 짓을 해야 에피파네스를 예전처럼 돌려놓을 수 있을까?
내가 황제일 때의 에피파네스와 지금의 에피파네스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그중에 라파일이 바꿀 수 있는 것은 군주와 영토 정도였다.
내가 궁전에 없는 지금, 그가 가장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국왕 부부를 처리하는 것이다.
‘룩소르와 오틸리에부터 지켜야 해.’
두 사람을 죽이고 파라돈이나 레튜니아 둘 중 한 곳에만 뒤집어씌워도 대륙은 순식간에 전란에 휩쓸릴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그가 원하는 것이 한꺼번에 해결된다.
나는 로그리예의 몸 위에서 내려오며 그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이건 상이야.”
“상이 너무 짧은데?”
따라오는 그를 내버려 두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펜을 들어 소피아에게 짧은 쪽지를 보냈다.
[셰피오 백작과 기사단장에게 말해 룩소르와 오틸리에를 지켜.]
미약한 빛에 휘감겨 사라지는 종이를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당장 궁전으로 돌아가 국왕 부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라파일의 멱살을 잡아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나를 다른 몸에 집어넣을 건지, 그런 뒤에 몸 주인은 어떻게 되는 건지부터 알아내야 해.’
실험 결과물들을 파괴해야지 라파일을 막을 수 있다. 내가 온전한 이라네가 되지 못하면 그는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고, 목적이 사라지니 다른 사람을 해치지도 않겠지.
라파일의 본거지부터 찾자. 그러면서도 궁전의 상황을 꾸준히 살펴야 한다.
방향이 잡히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외투를 챙겨 입었다. 그의 힘은 신성력이고, 실험을 위해 많은 신성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신성력은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그 본거지가 남서 대륙에 있을지 북서 대륙에 있을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옆방에는 나 대신 움직일 사람들이 많았다.
“가자.”
“어딜? 북서 대륙? 안 자고 바로 출발하게?”
“아니. 북서 대륙으로 바로 넘어가진 않을 거야.”
로그리예는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나를 따라 외투를 챙겨 입었다. 나는 그가 나갈 준비를 마치자마자 바로 옆방으로 향했다.
어색하게 둘러앉아 있던 세 사람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주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타솔라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다가온 타솔라에게 내가 걸고 있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집이 나만큼 작아지고 외모 역시 내가 목걸이를 착용했을 때와 똑같아졌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로그리예를 타솔라 옆으로 보냈다.
그러나 로그리예는 내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 흐르듯 내 옆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에 그가 어디 있는지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내게 팔짱 끼려는 그를 다시 타솔라 옆에 두자 로그리예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주님?”
“왜 불러.”
“내가 좀 잘못된 곳에 서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다가오는 그의 가슴을 밀어 냈다.
“너희는 북서 대륙에 다녀 와.”
“나? 얘나 쟤가 아니고……, 나?”
로그리예의 손가락이 지시스와 아르만을 찍고 다시 본인에게로 돌아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타솔라에게 라파일이 있을 만한 곳의 특징을 알려주었다.
“찾아보되 없으면 그냥 돌아와. 아! 돌아올 때는 레바나의 신관도 한 분 모셔 오고.”
“알겠습니다.”
타솔라는 믿음직스러운 표정으로 단번에 대답했다. 그러나 로그리예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공주님이 여기 있는데 내가 왜 북서 대륙에 가?”
“그쪽도 찾아보긴 해야 하니까. 네가 북서 대륙 공용어를 할 줄 안다며. 따라가서 통역해 줘야지.”
“이유는 그것뿐이야?”
“네가 옆에 있으면 나중에 감시자가 따라붙더라도 타솔라가 나인 줄 알 거야.”
“그것 말고는?”
“없어.”
로그리예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우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지시스에게 주었다. 지시스가 반사적으로 손안에 들어온 것을 움켜쥐었다.
로그리예는 지시스를 타솔라 옆으로 끌어내고 다시 내 옆을 차지했다.
뭐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내 팔을 꼭 끌어안았다.
“저거 통역 마법이 걸린 반지야.”
지시스가 손을 펴자 마정석이 박힌 실반지가 보였다. 지시스가 반지를 끼자마자 로그리예가 알 수 없는 말로 뭐라 말했다.
지시스의 얼굴이 단번에 떨떠름해졌다. 나는 호기심이 일어 그에게 물었다.
“로그리예가 뭐래?”
“공주님 옆자리는 자기 거라고 했습니다.”
어이가 없어 쳐다보자 로그리예가 생긋 웃었다.
“머리카락은 날이 밝는 대로 마법 상점에서 염색 물약을 사서 마시면 되겠다. 그렇지?”
로그리예의 얼굴은 알려진 편이 아니고, 지시스와 체구도 비슷하니 후드를 제대로 쓰고 다니면 들키지 않을 것이다.
“좋아. 내일 협회로 가서 순간 이동 마법진을 쓰게 해 달라고 해.”
“순간 이동을?”
로그리예가 목소리를 높였다. 고개를 돌리자 그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순간 이동을 쓰면 흔적이 남잖아.”
“상관없어.”
순간 이동은 고등 마법이라 반드시 마법진, 정확한 위치, 다량의 마정석과 여러 명의 마법사가 필요했다.
그리고 사용하기만 하면 협회에 기록이 그대로 남는다.
지금까지야 몰래 움직여야 하니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타솔라와 지시스가 기록을 남기고 가면 나는 오히려 돌아다니기 편해질 것이다.
“협회 마법진을 이동하려면 레튜니아 수도로 가야 하는데, 거기보다는 아미르 공작성이 더 가까울 거야.”
“아미르 공작성에도 마법진이 있어?”
“응. 공주님이 부르면 언제든 가려고 만들어 놨지.”
로그리예가 내 손등에 쪽, 입을 맞추고 말을 이었다.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려 놓을 테니까 성에서 순간 이동으로 항구까지 가면 돼.”
가만히 듣고 있던 지시스가 슬쩍 손을 들었다.
“그러면 배를 탈 필요 없이 순간 이동으로 북서 대륙까지 가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르만이 그 질문에 대답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북서와 남동 대륙 사이에 ‘신성한 고리’라고 불리는 거대한 신성력이 흐릅니다. 순간 이동을 잘못 사용했다가는 상체만 도착할 수도 있습니다.”
다들 같은 장면을 상상했는지 침통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로그리예가 정적을 깨고 설명을 덧붙였다.
“신성력이 흐르는 부근에는 섬도 없고, 선박도 정체하지 못해. 아무리 무거운 닻을 내려도 떠밀려 가거든.”
“그러면 전서구도 못 쓰겠네.”
로그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나란히 서 있는 지시스와 타솔라에게 말했다.
“보고는 못 할 테니까 가능하면 북서 대륙에서 있었던 일을 그때그때 기록해 놔. 돌아오자마자 나에게 보내고.”
“네, 공주님.”
“너희는 우리가 쓰던 방에서 자고 아침에 떠나. 로그리예, 우리는 가자.”
머리카락을 후드 안으로 집어넣으며 밖으로 나왔다.
졸고 있는 여관 주인을 지나쳐 여관을 나서자마자 아르만이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공주님. 아까 하신 말씀 말입니다.”
“응?”
“저도 아는 곳이 있습니다.”
걸음을 멈추고 아르만을 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근처에만 가도 모든 병과 상처가 씻은 듯이 낫는다는 소문이 도는 곳 말입니다.”
***
키네시아는 날이 갈수록 수척해졌다. 눈 밑은 거뭇하고, 통증으로 인한 피곤이 가득했다. 미소를 짓는 법이 거의 없었고 입술에도 혈색이 돌지 않았다.
그야말로 병색이 완연한 자의 얼굴이었다.
보다 못한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키네시아를 말리고 들었다.
“키네샤, 안색이 안 좋구나.”
“그래. 아가. 혹시 어디 아픈 것 아니니? 너무 무리하지 말렴.”
“괜찮아요. 쉬엄쉬엄하고 있어요.”
키네시아는 부모님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 지었지만 오히려 룩소르와 오틸리에는 더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두 사람은 키네시아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달래도 키네시아는 일이 끝나기 전에는 집무실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 했다.
룩소르와 눈빛을 주고받은 오틸리에가 찻잔을 든 채 바닥을 보며 넋을 놓고 있는 키네시아에게 말했다.
“키네샤. 엄마 좀 도와줄래? 궁전 내부 수리 예산을 짜야 하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어렵구나.”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오틸리에가 이끄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멈춰 선 곳은 키네시아의 방 앞이었다.
“전하?”
“아가. 힘들면 푹 쉬어야 능률도 오르는 거란다. 오늘은 산책도 하고, 책도 읽고, 낮잠도 자면서 푹 쉬렴. 엄마 부탁이야. 그래 줄 수 있지?”
오틸리에가 키네시아의 양손을 꼭 잡으며 애정과 걱정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키네시아는 차마 제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오틸리에는 키네시아를 소파에 앉히고 손수 스툴을 가져와 발까지 올리게 한 뒤에야 방을 떠났다.
키네시아는 오틸리에의 말대로 조금 늘어져 있다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책상으로 갔다.
그러자 귀신같이 나타난 오틸리에가 하인들을 끌고 책상을 복도 밖으로 빼 버렸다.
졸지에 빈 공간에 덩그러니 앉아 있게 된 키네시아가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