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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16화 (116/151)

<116화>

나는 다리를 꼬고 아르만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또 생각해 보지 못한 전개다.

쓸 만해 보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굳이 거둬야 할까? 어차피 이 몸에서 나가면 왕족도 아니고, 위협이 있을 것도 아닌데.

게다가 이놈의 진짜 목적도 모르고 말이다.

“기사가 되고 싶어서 그래?”

아르만이 고개를 저었다.

“무술은 공주님을 모실 때 필요할 것 같아서 배운 것뿐이지 기사가 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내 하인이 되라고 하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고민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로그리예가 팔짱을 끼고 앉아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 차가운 눈으로 아르만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얼굴을 빤히 지켜보는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로그리예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로그리예는 싸늘한 표정을 냉큼 지우고 보란 듯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시선을 떼지 않자 로그리예가 슬그머니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등받이를 훌쩍 넘어 내 등과 등받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말리지 않고 두자 그가 나를 다리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았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기댄 로그리예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신경 쓰지 마.”

나는 로그리예의 가슴에 편하게 기대며 팔을 뒤로 뻗어 그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었다.

그리고 앞을 봤는데 지시스와 타솔라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보면 내 뒤에 붙은 게 로그리예가 아니라 유령인 줄 알겠다.

“뭘 봐?”

가볍게 시비를 걸어 시선을 떨쳐 내고 아르만에게 물었다.

“너, 키네시아와 연락한 적 있어?”

“없습니다.”

“그럼 라파일과는?”

“그게 누굽니까?”

나는 말간 초록색 눈동자를 유심히 쳐다봤다. 라파일과는 모르는 사이인 것 같았다.

“같이 다니는 건 허락해 줄 테니까 몰래 따라오지 마. 네가 쓸모 있는지 없는지는 데리고 다니면서 판단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공주님.”

“공주 말고, 당분간 라네라고 불-.”

“싫어.”

로그리예가 툭 끼어들었다.

“애칭 같잖아.”

“……아가씨라고 불러.”

“네, 아가씨.”

나는 로그리예의 손을 떼어 내고 아르만에게 손을 뻗었다. 아르만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내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등 뒤에서 아주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외면하며 아르만을 일으켜 세워 준 뒤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팔을 활짝 펼치고 있는 로그리예를 끌어당겨 아르만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딱딱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아르만은 긴장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찬찬히 제 이야기를 했다.

땅을 되찾고 아버지를 고향이 모신 게 다 내 덕이라고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는 짙은 동경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무력을 기르고 경험을 쌓기 위해 용병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최근에는 북서 대륙으로 가는 선박을 호위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란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끊고 나를 보았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응. 멀쩡했어.”

“다행이에요.”

긴장이 완전히 풀렸는지 아르만의 말투가 조금 느슨해졌다.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묻고 싶었습니다. 괜찮으신지 걱정돼서요.”

긴장만 풀어 주고 넌지시 레그레시오에 대해 물으려고 했는데, 화제를 바꾸기 어려운 분위기가 되었다.

황제일 때도 충성심을 보이는 이들이 많긴 했으나 그때와는 달리 조금 더 친근했다.

어떻게 대답하고 넘어가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때마침 로그리예가 끼어들었다.

“그만! 나 질투 나려고 하잖아.”

나는 로그리예의 도움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환기됐다.

“네 이야기나 더 해 봐, 아르만. 북서 대륙은 어땠어? 우리 그쪽으로 가고 있거든.”

“북서 대륙에요?”

“그렇게 멀리 가십니까?”

아르만은 물론 지시스와 타솔라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들 우리의 행선지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그들이 ‘모든 것을 알고 따라붙었다’는 의심에서 ‘모든 것을 알고’ 부분을 지워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알아볼 게 있어서.”

“북서 대륙에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선박 호위였어서요.”

“레그레시오에 관한 건 들어봤어?”

아르만은 놀라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서 대륙에서 발생한, 교주를 살아 있는 신으로 모시는 종교 아닙니까?”

“맞아. 요즘 종종 남동 대륙에서도 보이는 것 같아서. 아직도 신도가 많아?”

“지금은 아닙니다. 듣기로는 교주가 몇 년간 두문불출하더니 에리오라고,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던 자들까지 종적을 감춘 모양입니다.”

“그래?”

“네. 지금은 다시 레바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

레바나 교 역시 라파일의 폭주 이후로 신성력이 사라졌다고 들었다.

샤마흐 교처럼 신관들이 갑자기 죽어 나가거나 신전이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꾸준히 신도와 신관이 줄어들어 신전은 텅 비었고 레바나는 거의 사장된 종교가 되었다고 했다.

“레그레시오가 북서 대륙에서 물러났다고 레바나 교가 갑자기 살아날 순 없었을 텐데.”

“레바나 교에도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100년 전,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두 종교가 번성과 몰락을 함께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레바나는 그렇다 치고…….’

라파일의 행적이 마음에 걸린다.

처음 로즈라에게 정보를 들었을 때는 라파일이 나를 북서 대륙으로 유인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영혼을 옮기는 실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궁전에서는 진행할 수 없을 테니까.

반쯤은 함정이라는 것을 알지만 레그레시오가 북서 대륙에 있는 것은 사실이니 직접 가서 라파일을 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곧장 움직이면 그가 파 놓은 다른 함정에 빠질 수 있으니 일부러 시간을 두고 궁전을 떠난 것이었는데, 그는 내가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궁전에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궁전에 감시할 사람을 뒀다는 걸 그가 모르진 않을 텐데?’

라파일을 막으려면 다시 궁전으로 돌아가야 할까? 만약 그게 라파일이 원하는 것이면 어쩌지?

그게 아니면 들킬 거라는 생각을 못 한 건가?

머릿속이 어지러워 이마를 짚자마자 로그리예가 나를 감싸 안고 토닥였다. 나는 잠시 그 온기를 받다가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다들 잠깐 옆방에 가 있어.”

“네, 공주님.”

세 사람이 나와 로그리예에게 짧게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나는 몸을 옆으로 틀어, 팔걸이에 등을 기대고 로그리예의 허벅지에 다리를 걸쳤다.

다시 생각에 잠기려 하자 그가 내 종아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날 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라파일. 아, 너는 모르겠지만-”

“알아.”

“……안다고?”

“응. 자기 전남편이잖아.”

질투가 묻어나는 말투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다 살다 라파일을 내 전남편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처음이네.”

“맞잖아. 현 남편은 나고, 그 사람은 전남편이고.”

다시 소리 내어 웃자 로그리예가 내 몸을 타고 올라왔다.

“웃을 때가 아닐 텐데.”

아름다운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며 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모양 좋은 입술이 위험한 곡선을 그렸다.

그러나 위협적이기보다는 유혹적이었다.

나는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럼 어떡해야 할 때인데?”

“현 남편이 삐졌으니까 그것부터 풀어 줘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풀리는지 말해 봐.”

빤히 바라보자 그가 입꼬리를 씰룩이더니 고개를 푹 숙이며 그대로 몸에 힘을 빼 버렸다. 적당히 묵직한 몸이 나를 완전히 뒤덮었다.

“사실 벌써 풀렸어.”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몸이 홱 돌아갔다.

나를 제 위에 올려놓은 로그리예가 내 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물었다.

“그래서 전남편에 대해 고민하는 게 뭔데? 나도 머리를 보탤게. 빨리 해결책이 나오면 그만큼 그 사람 생각을 덜 할 거 아니야. 그렇지?”

나는 그의 가슴에 엎드려 턱을 괴었다.

“라파일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예전이라면 쉽게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제정신이 아니거든. 나를 북서 대륙으로 유인하려는 건지, 아니면 가지 못하게 붙잡으려는 건지 감이 안 잡혀.”

“제정신이 아니면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흥분한 황소처럼 목표만 보고 달리는 거지.”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에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는 이제껏 라파일은 정해진 계획대로 아주 치밀하게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함께 살 때도 그는 즉흥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하지만 아까 말한 대로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사람이 모든 것을 치밀하게 계산했을 리 없다.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은 라파일의 목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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