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로그리예가 내게 착 달라붙어 여관으로 가면서 속삭였다.
“자기. 이상한 게 붙었는데 어쩔까? 따돌려?”
“널 따라온 것 같은데, 알아서 해.”
“아닌데? 자기 따라온 것 같은데?”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따라와.”
“정말 모를까?”
“어떻게 알겠어. 말도 한마디 안 섞어 봤는데.”
“나는 말 한마디 안 섞어도 자기인 걸 알아볼 수 있는데.”
“그건 너니까 그렇고.”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사랑의 힘이라는 뜻이야? 자기도 나 단번에 알아봐 줄 거야? 응? 으응?”
로그리예가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알짱거렸다.
한 번 예쁘게 보이니까 이젠 저러는 것도 마냥 귀엽게 느껴졌다. 여전히 좀 미친놈 같긴 하지만 말이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로그리예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볼에 쪽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뭐 하는 거야? 길거리에서.”
“뭐 어때. 저기 봐. 요즘 애들은 다 이러고 다녀.”
그가 가리킨 곳에는 작은 새 두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서로 부리를 비비고 있었다.
기가 차 웃자 로그리예도 따라 웃으며 나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나는 그를 매단 채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반짝이는 게 등에 달라붙어서 그런지 평범한 외모로 바꿨음에도 사람들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빨리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곧장 주인에게 다가갔다.
“방 두,”
“하나요. 제일 좋은 방으로.”
로그리예가 내 말을 채 가며 카운터 위에 금화 한 개를 내려놓았다.
“하룻밤 묵을 겁니다.”
“헙! 네! 최고급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이 양손으로 공손하게 열쇠를 바쳤다. 로그리예가 그것을 내게 건네주었다.
방을 하나 더 잡을까 하다가 그냥 열쇠를 받았다.
내가 몸을 돌려 계단을 오르자 로그리예가 신이 난 강아지처럼 냉큼 달려왔다. 등 뒤에서 다른 손님에게 우리 옆 방을 배정해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갔다. 곧 옆방에서도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저걸 어쩔까 고민하는데 로그리예가 내 이마 주변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 정리해 주며 몸을 붙였다.
“여보 먼저 씻을래? 아니면, 나 먼저?”
나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며 웃고 그대로 화장실 문을 열어 로그리예를 집어넣었다.
안에서 박력 있다며 감탄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시하고 한쪽에 마련된 탁자로 가서 전서구가 들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제법 두툼한 서신과 작은 종이 쪽지 한 장이 손가락에 걸렸다.
두꺼운 것은 소피아가, 짧은 것은 키네시아가 보낸 것이었다.
누구 것을 먼저 읽어야겠다고 결정하기도 전에 키네시아의 단정하고 폭이 일정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라파일을 만났어. 조심해.]
그게 다였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짧은 문장들을 유심히 보았다.
급하게 휘갈겨 쓴 게 아니다. 문자와 문자 간의 간격도 일정하고, 이어지는 획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키네시아는 고심하고 고심하다가 ‘라파일’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최대한 줄인 것이다.
손등에 보라색 태양 문양이 있는 남자, 레그레시오의 교주, 수상한 남자 등등. 그를 설명할 단어는 충분히 있는데도 말이다.
‘뭘 숨기고 있구나.’
나는 그녀에게 레그레시오를 뒤쫓고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곳에 수장이 라파일이라는 것은 더더욱. 입에 올린 적조차 없었다. 지난 몇 년간 보라색 태양에 관한 관심을 아예 끊은 것처럼 굴었다.
그렇기에 키네시아가 굳이 보라색 태양에 대해 조사해 봤을 리도 없었다.
키네시아가 알기에 라파일은 내 전남편일 뿐이다. 그런데 ‘라파일’을 만났으니 조심하라고 말하다니.
‘혹시 전에도 라파일을 만난 적이 있나? 그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만약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면 키네시아가 내 정체를 금세 알아차린 것도 설명이 가능하다.
어쩌면 이미 라파일과 한통속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 이 조심하라는 말은 나를 진짜 걱정해서 하는 말일까, 아니면…….
나는 갈비뼈 중앙이 조여드는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깨물고 키네시아의 쪽지를 램프 안에 넣어 태웠다.
재가 되어 날리는 종이 쪼가리를 보다가 소피아가 보낸 두툼한 편지를 들었다.
나는 소피아에게 궁전에서 발생한 일을 주기적으로 보고해 달라고 부탁하며 수정구를 주고 왔었다.
만일 중요한 일이 일어나면 정해진 날이 아니어도 보고서를 보내라고도 했었다.
‘그리고 오늘은 정해진 날이 아니지.’
즉, 궁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종이를 펼쳐 처음부터 천천히 읽었다. 안에는 밤에 키네시아를 발견한 것과 그녀가 어떤 상태였는지, 그녀가 있었던 옥상 광장의 상황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글자만 읽어도 현장의 상황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상세했다.
자신의 의견은 한 줄도 들어있지 않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적어 놓은 보고서를 쭉 읽고 그것 역시 불태워 없앴다.
종이 뭉치는 사라졌지만 보고서의 내용은 눈앞에 생생했다.
[손에 항상 장갑 착용. 이따금 오른손과 팔에 통증 호소. 손 떨림이 간헐적으로 10분 이상 지속. 반복적인 악몽을 꾸는 것으로 보임.]
그 아래에는 키네시아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날의 날짜와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소피아가 키네시아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적어 놓은 묘사와 그 후의 기록을 다시 한번 되짚었다. 그 속의 키네시아는 마치 고문을 당하고 후유증을 겪고 있는 사람 같았다.
깍지 낀 손을 탁자에 세우고 이마를 기댔다.
그때 욕실 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옷까지 다 갖춰 입은 로그리예가 욕실 밖으로 나왔다. 나를 보고 기도하는 거냐는 둥, 실없는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로그리예는 조용했다.
주변을 눈으로 훑던 그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궁전에 무슨 일 있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데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그리예는 편하게 소파에 기대 있었다.
나는 한숨을 한번 쉬고 입을 열었다.
“가서 옆방에 있는 놈 데려와.”
“응? 우리 방으로? ……알겠어.”
로그리예는 싫은 티를 내면서도 내 기분이 저조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군말 없이 창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 창에서 떨어트려 놓고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고는 얌전히 문으로 나갔다.
혼자 남자마자 나는 키네시아에게 전달할 짧은 글을 썼다.
[키네시아에게. 라파일이 시키는 대로 해. 그래야 네가 안 다쳐.]
나는 뒷말은 찢어 버릴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멍하니 있다가 다시 펜을 들었다.
[네 말대로 고양이 몸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종이 뒷장에 키네시아의 이름을 적고 주머니에 넣었다. 키네시아에게 보내라고 말하자 안에 있던 종이들이 사라졌다.
나는 소피아에게 키네시아를 주시하면서 보호하라는 쪽지를 한 장 더 보낸 뒤 펜과 잉크를 정리했다.
탁자 위가 깨끗해질 즈음, 문이 열렸다.
안으로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로그리예였다. 그의 뒤에는 아르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두 사람이나 더 들어왔다.
“타솔라? 지시스?”
쟤네가 왜 여기 있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시스가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문을 닫았다.
로그리예가 나쁜 짓을 한 동생을 이르는 것처럼 내 곁으로 다가와 다른 사람에게도 다 들리게 속닥거렸다.
“쟤네가 글쎄 우리 미행했대.”
그 말에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움찔거렸다.
내가 이마를 짚자 로그리예가 내 어깨를 끌어 제품에 기대게 했다. 나는 잠깐 기댔다가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아르만이야 그렇다 치고, 로그리예. 타솔라랑 지시스가 쫓아 오는 거 알고 있었어?”
“응.”
“왜 말 안 했어?”
“공주님도 아는 줄 알았지.”
전혀 몰랐다. 고개를 홱 돌려 두 사람을 쳐다보자 타솔라가 냉큼 배후를 밝혔다.
“키네시아 공주님이 몰래 호위하라고 하셨습니다.”
“행적도 보고하랬니?”
“그런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나를 감시하라고 두 사람을 보낸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둘 다 내가 고른 놈들인데 뭘 믿고 감시를 맡기겠어. 지금도 이렇게 술술 부는데.
나는 세 사람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로그리예에게 미행이 더 있는지 눈짓으로 물었다. 로그리예가 고개를 저으며 나를 소파 상석으로 안내했다.
정작 자기는 내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려고 하길래 옆으로 밀어 세 사람의 맞은편으로 보냈다.
“나는 옆방에 있는 놈을 데려오라고 했는데.”
“응. 저 셋 중에 어떤 놈을 데려와야 할지 몰라서 그냥 다 데려왔어.”
“세 사람이 같은 방에 있었어?”
내 질문에 타솔라가 대답했다.
“공주님을 미행하기에 수상한 놈인 줄 알고 처리하려고 했는데, 아르만이라 잠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아르만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는 설렘과 존경 같은 감정을 단단하게 굳혀 만든 것처럼 반짝거렸다. 나는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너는 왜 몰래 따라다녀?”
“공주님께서 정체를 숨기고 싶어하시는 것 같아서 몰래 따라왔습니다.”
“알면 그냥 모른 척하지 뭐 하려고 따라와?”
아르만이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저는 다시 공주님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