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14화 (114/151)

<114화>

***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르는 시간.

해와 달이 공존하는 그 시간이 되면 키네시아는 오른팔이 욱신거렸다.

라파일의 손길이 닿았을 때처럼 강렬한 고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치 얇은 철사로 피부를 촘촘하게 찌르는 것처럼 사람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 미약한 통증만으로도 그날 밤의 굴욕과 고통을 떠올랐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더라도 이따금 오른손에 보라색 문양이 떠올랐다.

“윽.”

지금처럼.

마치 제 존재를 잊지 말라는 듯이.

키네시아는 툭 떨어진 깃펜을 당혹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주우려 손을 뻗자 뾰족한 통증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그녀의 손이 멈칫하자 옆에 있던 소피아가 깃펜을 주워 준 뒤 하녀를 불러 이리저리 튄 잉크를 닦아 달라고 했다.

키네시아는 멍하니 지워지는 잉크를 바라보다가 소피아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아, 응. 고마워, 소피아.”

“아니에요. 그런데, 요즘 장갑을 자주 끼시네요.”

“…….”

키네시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매만졌다.

종종 떠오르는 문양을 감추기 위해 라파일을 만난 뒤로는 계속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소피아의 시선이 키네시아의 오른손에 닿았다.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키네시아는 소피아의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지 알고 있었기에 괜히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것보다, 소피아. 내가 저번에 준 전서구는 어떻게 됐어? 플로레타에게 빨리 전달되었으면 하는데.”

“성 플로레타께서 어제 파라돈의 수도로 향하셨다는 것을 확인해 따라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어디쯤인지 확인해 볼까요?”

“응. 부탁할게.”

소피아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 키네시아의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키네시아는 긴 숨을 내쉬며 제 오른팔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시선이 첫 번째 서랍에 닿았다. 열쇠로 잠가 둔 서랍 안에는 이라네리아가 준 전서구가 있었다. 그녀는 펜을 들어 한참이나 고민했다.

[폐하. 궁전에 라파일이 왔었는데…….]

키네시아는 종이를 구기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종이를 꺼내 ‘폐하, 사실은’까지 적었다가 구겨 버렸다.

이마를 짚은 채 책상에 기대 한숨을 내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키네시아는 엉망으로 구겨진 종이 두 장을 손에 말아 쥐고 몸을 바로 세웠다.

곧 문이 열리고 시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하. 셰피오 백작이 궁전에 도착했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줘. 나도 곧 갈게.”

허리를 숙인 시종이 문을 닫고 나갔다.

키네시아는 손을 펼쳐 끝맺지 못한 말들을 내려다보다가 그것들을 두꺼운 유리 상자 안에 넣고 불태웠다. 그리고 종이가 재로 변하자마자 뚜껑을 닫아 불을 껐다.

키네시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새 종이를 꺼내 짧은 글을 적고 그대로 첫 번째 서랍 안에 넣었다.

전서구 위에 종이를 두고 ‘이라네에게.’라고 말하자 종이가 빛에 휘감기더니 사라졌다.

키네시아는 서랍을 열쇠로 잠그고 일어나 응접실로 향했다.

***

선박 호위를 위해 바다에 나가 있었던 아르만은 반란이 끝나고 한참 뒤에야 그 소식을 접했다.

이마 3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당장 고국으로 돌아가 공주님의 안위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용병 대장에게 용병단을 관두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용병 대장은 귀나 후비다가 두툼한 손으로 아르만의 등을 툭 쳤다.

“야. 뭐가 그렇게 급해? 어차피 궁전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놈이.”

맞는 말이었다.

“기사 될 거랬지?”

“네.”

“그럼 토너먼트에서 3위 안에 들거나 기사의 종자로 들어가야 할 텐데.”

“일단 토너먼트에 나가 보려고요.”

용병 대장은 아르만을 쭉 훑어보더니 그가 줬던 사직서를 서랍 안에 넣었다.

“어차피 토너먼트는 한참 뒤에 열리니까 이번 상단 호위만 끝내고 가라.”

“싫어요.”

“야아. 치사하게. 우리도 일손 부족한 거 알잖아.”

“알긴 아는데, 마음이 급해서요. 죄송합니다.”

“아냐. 너 안 죄송해. 왜냐면 상단 호위 할거거든. 그거 다녀오면 딱 토너먼트 시기에도 맞고, 뭐냐, 내가 용병단에서 10년 있었다는 증명서에 추천장까지 써 줄게. 그거 딱 들고 가면 어? 너, 인마. 심사전하고 예선은 그냥 통과야.”

확실히 경력을 증명하는 문서와 추천장이 있으면 전투 없이 본선까지 갈 수 있었다.

그러면 체력을 아낄 수 있으니 우승할 확률이 높아진다. 어차피 토너먼트까지는 시간이 남으니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아르만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딱 이번 일까지만입니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용병대장이 두툼한 손으로 아르만의 등을 퍽퍽 쳐 댔다.

아르만은 그렇게 상단 호위에 합류했고, 거기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

로그리예 아미르 공자.

그가 마차 안에 있었다.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아닌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처음에는 잘못 본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부상자 때문에 호위 위치가 바뀌어 중앙으로 가자마자 마차에서 내리던 로그리예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역시 공자님이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으응. 그렇네.”

아르만은 인사했고, 로그리예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반겨 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반응이 지나치게 이상했다.

그가 아는 로그리예는 이렇게 말랑하게 대답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르만을 보는 눈빛에는 언제나 짙은 경계심과 미미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분명 자신이 로그리예보다 나이가 많음에도 왈칵 두려움이 몰려올 때가 많았다.

특히 이라네리아가 아르만을 아끼는 티를 낼 때면 저 눈빛을 마주했다가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목덜미가 섬뜩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로그리예가 아르만에게 살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오직 아르만뿐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라네리아가 함께 있을 때면, 로그리예는 아르만이 있는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꼭 실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딱 지금처럼.’

아르만의 시선이 마차에 있는 여자에게로 향했다.

평범한 머리와 눈 색. 특징 없는 외모. 그러나 옷은 고급스럽고 자세는 꼿꼿했다. 시선에도 알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지는 듯했다.

게다가 자신이 로그리예를 ‘공자’라고 불렀음에도 막무가내로 마차에 욱여넣는 손길은 거칠기만 했다.

‘듣기로는 평민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지만 평민이 귀족을 저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나?’

그녀의 행동은 이라네리아와 비슷했다.

공주님의 약혼자를 뺏은 여자에게 품었던 반감은 혹시나 공주님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렸다.

공주님은 이미 10년 전에도 비허가된 마법 물품을 쓴 적이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번에도 신분을 숨기기 위해 그런 것들을 썼을지도 모른다.

물론 로그리예 공자의 취향이 한결같은 것일 수도 있으나, 공주님과 약혼까지 했는데 무엇 하러 비슷한 사람을 찾아서 다시 만난단 말인가.

아르만은 티 내지 않고 두 사람을 관찰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마차에만 틀어박혀 좀처럼 나오는 법이 없었다.

가끔 몸을 풀러 밖으로 나오기에 마주치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순 없었다. 로그리예가 노골적으로 대화를 피하며 자칭 아내와의 대화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종일 주변을 맴돌았지만 아르만이 의문의 여자와 나눈 대화는 첫만남을 제외하면 고작 두 마디였다.

“안녕하세요. 아르만이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끝이었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고 로그리예의 행동까지 보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가끔 밖으로 나왔을 때도 여자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 어떨 때는 가질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듯한 눈으로, 또 어떤 때는 홀린 사람처럼 멍하니 여자를 보았다.

실없는 행동으로 여자를 웃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더 붙어있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었다.

여자를 제외하고 로그리예만 보면, 그는 이라네리아 공주와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여자 역시 외모를 빼면 로그리예를 대하는 이라네리아 공주 같았다. 조금 더 다정하고 수용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말투가 똑같았다.

덕분에 아르만은 확실했다.

‘공주님이네. 무사하셔서 다행이다.’

알은척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아 아르만은 일부러 그쪽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이라네리아가 상단과 어디까지 동행하기로 했는지 알아냈다. 그리고 헤어지기로 예정된 도시에 도착하기 전날 밤, 대장의 천막으로 갔다.

“저 그만둡니다.”

“이젠 건의도 아니고 통보냐.”

“다음 도시까지만 동행하고 공자님 따라가려고요. 어차피 여기서부터 수도까지는 산적도 거의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럼 토너먼트는?”

“아. 그건 혹시 모르니까 추천장하고 경력 증명서는 써 주세요.”

용병 대장은 투덜거리면서도 호위가 끝나자마자 주려고 했었던 서류 두 장을 꺼냈다.

원하는 것을 다 받았지만 아르만은 그 자리에 서서 용병 대장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용병 대장이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댄 채 삐딱하게 물었다.

“막상 가려니까 서운하지?”

“그게 아니라, 퇴직금을 주셔야 가죠.”

“……싸가지 없는 놈.”

용병 대장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주머니를 아르만에게 던졌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린 주머니가 아르만의 품에 안착했다.

아르만은 그 자리에서 주머니 안을 확인하더니 용병 단장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어. 꺼져. 빨리 꺼져.”

아르만은 투덜거리는 대장에게 한 번 더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상단주와 작별 인사를 마친 이라네리아와 로그리예가 상단 행렬에서 벗어나자마자 곧장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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