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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13화 (113/151)

<113화>

혹시 놀랐나 싶어 고개를 돌리자마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내가 자기 부인이라 그런 게 그렇게 좋은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워 웃으려다가 아르만의 목소리에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미르 공자는 약혼자가 있는 걸로 압니다.”

“맞아요. 그래서 사랑의 도피 중이에요. 도망치던 중에 약소하게나마 식을 올렸고요.”

나는 로그리예의 팔을 더 끌어당기며 우리 관계에 쐐기를 박기 위해 물었다.

“그렇지, 여보?”

생전 처음 써 보는 호칭에 발끝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로그리예는 어떻게 맨날 이런 말을 달고 사나 싶을 정도였다.

민망해 눈빛으로 빨리 대답하라고 종용하자 로그리예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별안간 굵은 눈물을 후드득 떨어트렸다.

“너, 울어?”

당황해 뒤로 물러나며 로그리예를 돌려세웠다. 눈물을 닦아 주며 목소리를 낮춰 한 번 더 물었다.

“누가 노려봤어? 아니면 어디 아파?”

로그리예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끌어안았다. 내게 기대는 그의 머리를 습관처럼 쓰다듬으며 그 너머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로그리예를 의아한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그러나 아르만은 분석하는 눈빛으로 신중하게 우리를 관찰했다.

나는 로그리예를 매단 채 마차 쪽으로 물러나며 말했다.

“보다시피 제 남편이-”

“흐읍!”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요.”

남편이라는 말에 흐느끼는 로그리예를 마차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르만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도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로그리예는 의자 중앙에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 나는 커튼을 전부 닫고 로그리예 앞에 앉아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청보라색 눈동자는 이슬에 젖은 라벤더 같았다. 곧 꽃잎처럼 팔랑이던 속눈썹 아래로 눈물방울이 흘렀다.

눈물을 닦아 주려고 손을 뻗자 그가 내 손을 가져가 손바닥에 볼을 묻었다.

나는 가만히 손을 내어 준 채 물었다.

“그래서 왜 우는데?”

“공주님이 남편이라고 불러 준 게, 너무 감격……, 흡!”

고작 그거 때문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그의 옆으로 옮겨 앉았다. 로그리예가 내 어깨를 끌어 그에게 기대게 했다.

운 사람은 로그리예인데 꼭 나를 위로하는 모양새였다.

누구에게 기대 본 적이 거의 없어 어색했지만 불편하진 않았다. 조금 뒤척여 더 편하게 자리를 잡는데, 그가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우리 돌아가면 진짜 결혼하자.”

나는 그를 잠깐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어깨에 기대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든가.”

“정말?!”

로그리예가 벌떡 일어났다가 천장에 머리를 쿵 부딪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아프지도 않은지, 그는 내 양손을 붙잡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진짜? 진심으로? 농담 아니고?”

그대로 두면 비슷한 뜻의 단어는 전부 다 끌고 올 것 같았다. 저 입을 막아야 좀 진정을 할 것 같은데 부득이하게도 내 손은 전부 로그리예에게 잡힌 상태였다.

남은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 나는 그대로 그의 입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댔다.

“진짜로, 읍!”

로그리예의 청보라색 눈동자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이 보이자마자 입술을 떼어 냈다.

“정신 사나워서-!”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투덜거리면서 멀어지려는데, 로그리예가 내 말끝을 집어삼켰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휘어 감아 끌어당기고, 고개를 뒤로 빼지 못하게 목덜미와 뒤통수를 완전히 감쌌다.

나는 로그리예의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그의 품에 갇히고 말았다.

그의 입술은 아주 오랫동안 갈망하던 과일을 탐미하는 사람처럼 내 입술을 느리게 베어 물었다.

숨 쉬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아 숨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가슴이 조여드는 감각에 고개를 젖혀 공기를 들이마시자마자 다시 그의 입술이 따라붙었다.

고개가 젖혀진 그의 입맞춤을 받아 내다가 힘주어 로그리예를 밀어 냈다.

“하아…….”

끈적한 숨을 내쉰 그가 짙어진 눈동자로 내 입술을 집요하게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 위를 유영했다.

이내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로 야릇한 눈빛과 마주하자 주변의 공기가 뜨겁게 느껴졌다. 숨을 헐떡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로그리예가 입을 맞추며 물었다.

“계속 정신 사납게 굴면, 한 번 더 해 줄 거야?”

낮고 거친 목소리가 귓바퀴를 스쳤다.

입을 맞출 때, 그의 욕망까지 들이마신 것인지 가슴에 뜨거운 증기가 가득 찬 것만 같았다.

나는 숨을 고르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정신 사나운 건 싫으니까 그냥-.”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

대낮임에도 빛 한 점 들지 않는 방. 거대한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방으로 쏟아지는 복도의 환한 빛이 문 앞에 선 페라포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트렸다.

얇은 캐노피가 쳐진 침대에 페라포네의 그림자가 닿았을 때, 문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페라포네는 안으로 들어가 침대 옆에 있는 촛대에 불을 밝혔다. 어스름히 일렁이는 불빛 아래 병색이 완연한 황제의 모습이 드러났다.

페라포네는 침대 옆, 간이 의자에 꼿꼿하게 앉은 채 수심에 잠긴 목소리를 냈다.

“폐하.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그녀는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 해 주며 혼잣말처럼 황제에게 말을 걸었다.

“곧 성녀가 파라돈 수도에 온다고 해요. 폐하의 상태를 알게 되면 아마 치료하려고 하겠죠?”

그녀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달싹인 입술 사이로 진심이 흘렀다.

“그러니……. 그 전에 죽어 주세요, 폐하.”

페라포네는 주머니에서 작게 뭉친 약 한 알을 꺼내 황제의 목구멍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그녀는 기침을 쏟아 내는 황제의 입을 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의 목젖이 크게 움직였다. 페라포네는 황제의 입 안으로 손을 넣어 그가 정말 약을 삼킨 게 맞는지 확인하고 몸을 돌렸다.

그녀가 문으로 향하는 사이, 등 뒤의 숨소리는 점점 잦아들었다.

페라포네는 돌아보지 않고 느긋하고 우아한 걸음으로 황제의 침실에서 나와 곧장 알현실로 향했다.

시종이 문을 열어 주자마자 그녀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단상 앞에 서서 그 위에 있는 황자에 잠시 시선을 둔 그녀는 곧 단상에 올라 황좌 옆에 앉았다.

그리고 주변을 쭉 훑어봤다.

폭이 넓은 융단 양옆으로 귀족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페라포네는 고개 숙인 귀족들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회의 시작하시오.”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고 페라포네가 정권을 잡은 지 일주일째.

파라돈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페라포네의 성정은 포악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기에 다른 후계자를 지지하던 자들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몰라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지지자들보다 더 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후계자로 거론되었던 왕족들이었다.

특히 제일 앞에 선 요르고스는 페라포네의 눈빛을 받을 때마다 목덜미가 섬뜩했다.

꼭 오늘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요르고스가 괜히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페라포네의 지지자이자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공작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죠?”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페라포네가 미소를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는 다음으로 미루겠소.”

그녀는 평소와 같은 걸음으로 붉은 융단을 밟으며 귀족들 사이를 지나쳤다.

요르고스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지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가 한 박자 늦게 페라포네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들은 황제의 침실로 향했다.

황제는 눈이 시리다며 방 안을 어둡게 유지할 것을 명령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커튼이 환히 열려 있었다.

황제가 살아 있다면 절대 열리지 않았을 커튼이.

요르고스는 문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페라포네는 제 오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도착해 있던 황후가 막내를 꼭 끌어안아 페라포네의 시선으로부터 자식을 보호했다.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는 궁정의에게 물었다.

“사인은?”

“욕창으로 인한 고열입니다.”

“그렇다는군요, 황후 폐하.”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겠죠, 페라포네.”

황후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페라포네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모두 나가게.”

사람들이 순식간에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자마자 황후가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면, 우릴 살려 줄 거죠?”

페라포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막내 왕자는 배다른 형제이긴 해도 황제의 피를 이어받았다. 정권은 이미 그녀의 손에 있는데 무분별하게 황실의 피를 끊을 필요는 없었다.

에피파네스도 대가 끊겨 룩소르 같은 자가 왕이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것을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페라포네는 황후가 두려움에 떨도록 내버려 둔 뒤 문으로 향했다.

“일단 가만히 계세요. 그런 핏덩이보다 눈에 거슬리는 건…….”

요르고스 앞에 멈춰 선 페라포네가 넋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제 오빠를 발끝으로 툭 쳤다.

“너야, 요르고스. 너는 살기 위해 뭐를 할래?”

“……에피파네스로 갈게.”

“그래. 가서 결혼 동맹 승낙을 받아 와. 할 수 있지?”

“…….”

“할 수 없어도 해야 할 거야.”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는 요르고스를 뒤로하고 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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