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국경 근처까지는 마을과 숲, 평야밖에 없기에 상단의 이동속도는 매우 빨랐다.
노숙, 이동, 휴식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국경을 넘어 레튜니아에 도착해 있었다.
로그리예는 체비어에게 신혼이라 둘만 있고 싶다면서 밥까지 마차로 받아서 먹었다. 멈췄을 때 가끔 바깥바람을 쐬는 게 아니면 우리는 거의 마차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레튜니아의 국경 지대에는 산적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한 소도시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마차 안에서의 시간은 무료해 주로 책을 읽다가 잠에 드는 일이 많았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잠들었지?’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졸음을 떨쳐 낸 뒤에야 내가 옆으로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을 돌려서 바로 눕자 로그리예와 눈이 마주쳤다. 로그리예는 눈을 접어 웃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살살 정리해 주었다.
“잘 잤어, 여보?”
시끄러운 창밖과 달리 평온한 인사말에 웃음이 나왔, 잠깐.
시끄러운 창밖?
움직이자마자 로그리예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몸을 일으켜 주었다.
나는 커튼을 젖히고 밖을 내다봤다.
딱 봐도 산적처럼 보이는 무리와 상단에서 고용한 용병들이 싸우고 있었다. 문제는 용병들이 점점 뒤로 밀려나 우리가 탄 마차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어깨 위에 무게가 느껴졌다.
은으로 뽑아낸 실처럼 부드럽고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이 귓가를 스쳤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조금만 움직여도 볼이 닿을 것 같았다.
나는 로그리예를 너무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써 정면만 쳐다봤다.
나른한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흘러들어 왔다.
“내가 나설까?”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목소리를 냈다.
“아니. 좀 더 보고.”
신분을 숨기고 움직이는 건데 주목받을 일을 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마법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검을 확인했다.
안에 손을 넣은 채로 커튼 틈을 응시했다. 산적 하나가 용병을 제치고 마차로 훅 다가왔다. 로그리예가 나를 뒤로 보내고 검을 뽑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갈색 머리의 남자가 산적을 베어 내고 용병들 사이에 합류했다.
싸우던 용병 한 명이 남자에게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알! 뭘 하다 이제 와?”
알이라고 불린 남자가 뭐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주변의 소음이 너무 심해 제대로 들리진 않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게 뒤통수가 익숙한 것 같단 말이야.’
기억을 더듬으며 남자를 빤히 쳐다보는데 뭔가가 허리를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자 로그리예의 팔이 보였다.
“여보. 한눈팔면 나 서운해.”
“그게 아니라, 쟤 좀 익숙하지 않아?”
“흠.”
로그리예가 드물게 심드렁한 소리를 내며 얌전히 정면을 응시했다.
갈색 머리 남자 한 명이 합류한 것뿐인데 형세는 어느새 용병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빼내며 감탄했다.
“아주 날아다니네. 쓸 만한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그리예의 체온이 쑥 멀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로그리예가 내 양 볼을 잡았다.
커다란 손바닥에 가려져 옆이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리려 하자 로그리예가 다시 내 얼굴을 제 쪽으로 당기더니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뭐지? 뽀뽀해 달라는 건가?
눈만 깜빡이는데 그가 뾰로통한 목소리를 냈다.
“나도 날아다닐 수 있어.”
“마법사야?”
뭐라 말하려던 그가 말문이 턱 막힌 표정을 지었다.
힘이 빠진 로그리예의 손을 끌어내리고 다시 창밖을 봤다. 그러고는 내 뒤에서 손을 뻗어 심술이 묻어나는 손짓으로 커튼을 닫아 버렸다.
그걸 보며 확신했다.
“너 쟤 아는구나?”
“아는데, 말 안 할래.”
아는 사람인데 알려 주기는 싫고, 갈색 머리에 애칭이 ‘알’일 만한 사람이면…….
“아르만?”
뒤에서 옅은 한숨이 들렸다. 로그리예가 패배를 인정하듯 다시 커튼을 열었다.
우리가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밖의 상황은 끝이 난 듯 보였다.
아르만은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을 닦고 있었다.
키는 나와 헤어지기 전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고, 몸은 설명하기도 귀찮을 정도로 다부져 보였다.
소년과 청년 사이에 서 있던 그는 완전히 어른이 되어 있었다.
‘잘 크긴 했는데 왜 용병을 하고 있지?’
몸 쓰는 일보다는 머리 쓰는 일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내가 시선을 떼지 못하자 로그리예가 나를 바짝 당겨 안고 작게 속삭였다.
“알은체할 거야?”
“신분을 속이고 있는데 뭐 하러 그래. 귀찮게.”
보지 않아도 로그리예가 활짝 웃는 게 느껴졌다. 이내 볼에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자 로그리예가 웃음을 터트리며 나를 더 꼭 끌어안고는 어깨에 이마를 비비적댔다.
“나는 진짜, 공주님이 너무 좋아.”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며 뜨거운 피를 온몸에 퍼트렸다. 파도처럼 몰려든 열기에 손끝까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로그리예를 밀어 내는 대신, 이 감정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숨을 천천히 내쉬고 있는데 초록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르만이 나와 로그리예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그리예의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는 듯했다.
마침 로그리예가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급하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눌렀다. 떨어지려던 이마가 다시 내 어깨에 붙었다.
“응? 이건 뭐야? 유혹?”
유혹은 네가 하는 게 유혹이고.
그의 헛소리를 가볍게 무시하며 조용히 물었다.
“인식 저해 마법은 원래 알던 사이에도 통해?”
“아니? 소용없지.”
“……아르만이 네 얼굴 알지 않니?”
“…….”
로그리예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손을 뻗어 느리게 커튼을 닫았다.
마차 안에 곤혹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내가 돌아앉자 로그리예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알아봤을까?”
“아닐걸.”
은색 머리가 흔하지 않긴 하지만 아예 없는 색도 아니고. 얼굴도 정면으로 본 게 아니니 아마 못 알아봤을 것이다.
“그리고 알아봐도 상관없어. 어차피 사랑의 도피라고 핑계 대 놨잖아. 아르만이 뭐라 그러면 나랑, 그러니까, 이라네리아랑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쳤다고 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그리예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싫은데. 소문이 날 수도 있잖아.”
“사실이 아닌데 뭐 어때.”
로그리예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공주님. 설마 내가 다른 여자랑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이 나게 해서 나와의 약혼을 파기하려는 건 아니지?”
단번에 부인하려던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이 몸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 나는 다른 몸으로 갈 건데 로그리예가 몸 주인하고 약혼한 상태면 곤란하지.
이라네리아가 몸을 되찾은 뒤에 로그리예의 반짝거리는 얼굴을 보고 반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일이 정말 곤란해진다. 후손의 약혼자나 뺏는 파렴치한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확실히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긴 했다.
“네가 사랑하는 게, 나야, 이라네리아야?”
뜬금없는 질문에도 로그리예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냉큼 대답했다.
“자기가 이라네리아잖아.”
“아니지. 나는 이라네. 몸 주인이 이라네리아.”
“둘 다 같은 사람인데?”
“……그러니까, 내가 이 몸에서 나온다면 누굴 선택할 거야?”
“그럴 수가 있어?”
아직 확답은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야지.”
“안 그러는 게 나을 텐데.”
저건 그냥 자기 희망 사항인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자마자 로그리예가 몸을 숙여 내가 안겨 들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상체가 뒤로 넘어가자 로그리예가 손을 위로 뻗어 내 뒤통수를 감쌌다. 그리고 내 몸을 뒤덮듯이 기대며 나를 올려다봤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나와의 추억이 많은 쪽을 선택할게.”
그 정도면 됐다. 2살에 처음 만나 6살에 헤어진 이라네리아 공주보다는 10년을 알고 지낸 나와의 추억이 더 많을 테니까.
나는 만족스럽게 로그리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이 싫으면 앞으로는 아르만하고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든가.”
상단과 동행하는 며칠 동안 아르만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르만은 상단 선두나 말미를 지키다가 옆이 뚫리기 직전이라는 말을 듣고 잠깐 도와주러 온 거겠지.
그러니 일이 끝나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처럼 외출을 자제하면 마주칠 일은 없었다. 로그리예도 같은 생각인지 내게 머리를 툭 기대며 중얼거렸다.
“행렬 앞이나 뒤쪽으로는 가지 말아야겠다.”
“그래. 일주일만 버텨.”
그때쯤에는 다른 도시에 도착할 테니까.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않는다면 정체를 들킬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허리를 펴기 위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르만과 마주쳤다.
그것도 로그리예가.
“역시 공자님이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으응. 그렇네.”
아르만이 막 내리려고 하던 나를 보았다.
“저분은……?”
나를 돌아본 로그리예의 표정이 순식간에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변했다.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로그리예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냉큼 로그리예의 팔을 끌어안고 삐딱하게 아르만을 쳐다봤다.
“이 사람 부인이요. 그러는 그쪽은 누구시죠?”
로그리예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