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동행할 상단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여긴 상단 통행이 잦은 수도 근처였고, 레튜니아는 에피파네스와 교류를 많이 하는 것으로는 파라돈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니까.
마침 제법 이름난 티핑벳 상단이 다음 날 오후에 레튜니아로 간다는 정보를 얻었다.
신뢰도가 높은 상단일수록 국경을 넘을 때 신분을 꼼꼼히 확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상단을 찾아갔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 수출의 총책임자였다.
“체비어다. 티핑벳과 동행하고 싶다고.”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우리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키는 또 얼마나 큰지, 거인 혼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로그리예도 작은 키는 아니었는데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사람인가?’
속으로 감탄하는데 남자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신분증. 없으면 뭐, 촌장이 쓴 신분증명서나 일하던 곳에서 써 준 추전장이라도 괜찮다.”
이럴 줄 알고 소피아를 시켜 수도 빵집에서 미리 받아 온 추천서가 있었다.
그걸 꺼내려는데 로그리예가 나를 품으로 끌어당겨 쏙 숨겼다. 그러더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누구인지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미친…….”
“쉿. 알아, 자기. 나도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거.”
로그리예 놈은 더없이 귀한 보물을 바라보는 눈빛을 한 채,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볼을 쓰다듬고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하지만 나는 자기를 위해서라면 더 미친 짓도 할 수 있어. 가문을 버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야.”
버린 적 없잖아.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마자 그가 내 눈두덩이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눈을 감자 로그리예가 다시 나를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었다.
“보시다시피 사랑을 위해 가문에서 도망치는 몸입니다. 도와주시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얘는 이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어이가 없어 올려보다가 그를 살짝 밀어 내고 고개를 돌려 상단 책임자를 봤다. 보나 마나 우리를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겠…….
“크흡! 크흐흑. 귀족이 가문을 버리, 흡!”
그는 주먹으로 입을 가린 채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참고 있었다.
된다고? 이게? 정말 된다고?
입이 살짝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로그리예는 체비어가 보기 전에 내 턱을 부드럽게 위로 쓸어 입을 닫아 주었다.
나에게 눈을 찡긋한 그는, 체비어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처연하게 눈썹을 늘어트렸다.
매일 마주치는 나조차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볼 뻔할 정도로 완벽한 표정 연기였다.
“크흐흠! 감동적인, 흡. 감동적인 이야기긴 하나 신분 확인이 없으면 동행하실 수 없습니다.”
로그리예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추천서를 쏙 뽑아 갔다.
“제 신분은 말씀해 드릴 수 없지만 제 부인의 신분은 확실합니다.”
“부인이시라고요?”
“네. 여기 오기 전 신전에 들러 약소하게나마 식을 올렸습니다. 그렇지, 라네?”
3초만에 유부녀가 된 나는 체비어를 쳐다봤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가 코를 훌쩍일 때마다 덥수룩한 수염이 들썩였다.
석연치 않아도 속아 넘어간 걸 이용 안 할 이유는 없기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체비어는 로그리예에게서 건네받은 종이를 펼쳤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다시 내게 종이를 돌려주었다.
로그리예는 체비어가 손을 치우기 전에 그에게 두둑한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이건 약소하지만 사례입니다. 아! 그리고 말씀은 편하게 하십시오. 저는 이제 귀족이 아니니…….”
“사례는 됐습니, 흠흠, 됐다. 100명도 아니고 고작 둘인데.”
“그래도 받아 두십시오.”
체비어가 마지못해 주머니를 받았다. 그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주머니 입구를 열었다가 턱이 빠진 사람처럼 쩍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보석과 금화를 얼마나 담아 뒀는지 햇빛에 반사된 오색 빛이 체비어의 얼굴 전체를 물들일 정도였다.
그는 언제 사양을 했냐는 듯 주머니를 품 안에 넣었다.
“두 분, 아니, 두 사람의 신분과 아름다운 이야기는 내가 무덤까지 가져가겠다.”
“감사합니다.”
“고마워요.”
체비어는 편하게 지내라면서 마차 하나를 더 가져와 통째로 내어 주었다. 궁전에서 쓰는 것처럼 화려하고 크진 않았지만 아늑했다.
며칠간 함께할 상단 사람들까지 소개받고 나니 출발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앞과 뒤에 뭉쳐있는 용병들은 중간중간 쉴 때 소개받기로 하고 우리는 마차에 올랐다.
나는 마차가 출발하자마자 뺀질뺀질한 얼굴로 웃고 있는 로그리예에게 물었다.
“너한테 과수원에서 얻어 온 추천장을 준 것 같은데.”
“응. 받았지.”
“그런데 왜 다른 핑계를 대? 놀랐잖아.”
로그리예가 진지한 얼굴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여보.”
낯선 호칭으로 나를 부른 로그리예가 허벅지에 팔꿈치를 세워 꽃받침처럼 펼친 손 위에 제 얼굴을 올려 두었다.
“이 얼굴이 어딜 봐서 과수원에서 일한 얼굴이야? 이 머릿결을 좀 봐. 그리고 햇볕에 그을린 적 없이 매끄러운 피부는 또 어떻고.”
“…….”
“과수원 같이 직사광선이 내리쬐는 곳에서 일하다 왔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걸? 분명 의심받았을 거야.”
매우 유감스럽게도 로그리예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미리 외모를 바꾸는 목걸이를 준비하라고 했던 거지만, 내가 좋아해서 그냥 두었다는데 어쩌겠어. 봐줘야지.
사실 저 반짝이는 외모가 없었다면 여행길이 퍽 지루했을 것 같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상의라도 해. 놀라게 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 주는 거야?”
“그럼 뭐?”
“딱밤이라도 때릴 줄 알았는데.”
나는 녀석을 향해 슬그머니 주먹을 들어 올렸다.
“……맞는 거 좋아하니?”
“공주님 손이라면, 뭘 하든 좋아.”
그가 내 주먹을 끌어 쪽 입을 맞췄다.
요사스러운 미소를 마주하자 말문이 턱 막혔다.
심장이 갈비뼈를 난폭하게 쳐 댔다. 목덜미가 조금 뜨거운 것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못 하고 굳어 있자 로그리예가 조금 더 앞으로 당겨 와 앉았다. 다리와 다리가 스치고 얼굴이 가까워지자 나는 당황해 몸을 뒤로 뺐다.
내가. 황제인 내가 뒤로 물러나다니!
입을 벌려 숨을 들이마시고 좀 진정한 뒤, 그의 몸을 옆으로 젖혀 버렸다.
로그리예가 저항 없이 넘어가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어어?”
“너, 자.”
“갑자기?”
“갑자기.”
“그럼 공주님 무릎 베고 잘래.”
저 얼굴을 마주 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말없이 마차 한쪽으로 붙자 로그리예가 냉큼 건너와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이러면 얼굴을 안 볼 줄 알았는데, 자겠다던 로그리예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다시 목덜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손수건을 꺼내 로그리예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응? 자기, 나 혹시 죽었어?”
“자라고 가려 준 거야.”
“흐응. 나 자면 뭐 하려고 자꾸 재우려고 해?”
나는 손수건을 반만 걷어 로그리예의 반듯한 이마를 아프지 않게 찰싹 내리쳤다.
“조용히 하고 자. 나도 잘 거야.”
“그럼 자세 바꿀까? 자기가 누울래?”
“됐어. 빨리 자.”
손수건을 다시 접어 로그리예의 눈 위에 덮어 준 뒤 나도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로그리예의 숨소리가 점점 규칙적으로 변했다. 그런데 나는 내 허벅지에 올려진 로그리예의 머리가 너무 신경 쓰여 잠이 오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보다 내 심장 소리가 더 큰 것 같았다.
나는 로그리예를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걷어 냈다.
순은을 녹여 만든 것 같은 속눈썹이 곱게 닫힌 눈꺼풀을 따라 신비로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틀에 기대 이마를 짚었다.
‘어쩌려고 이래, 진짜…….’
내가 그에게 호감을 품었다는 건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그 마음이 더 자라지 못하도록 막아 두었는데 그럼에도 깊게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로그리예의 유혹이 농밀해지자마자 정신을 못 차리고 끌려다니는 걸 보니 말이다.
그가 펠리온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이런데, 만약 펠리온이면?
나는 그때도 곱게 성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까?
‘그럴 리가.’
지금이야 누릴 것을 다 누려 봐서 미련이 없어 성불이나 하겠다는 것이지만, 손에 넣고 싶은 게 생기면 말이 달라지지.
심지어 얘는 나를 좋아하잖아.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후손의 몸과 인생을 빼앗진 않을 것이다.
‘키네시아 말대로 고양이 몸이라도 빌려? 이 목걸이만 있으면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고민하며 로그리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순간 라파일이 떠올랐다. 두 번째 마음마저 그에게 향하지 않은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죽음은 이미 우리를 한 번 갈라놓았고 시간과 마음은 흘렀다. 그를 설득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렇지 못한다면…….
일단 이다음의 일은 라파일이 말한 ’실험‘이 무엇인지 확인한 뒤에 결정해야겠다.
나는 창에 머리를 기대고 다시 로그리예를 바라봤다.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는 긴 다리가 좀 안쓰러워 보였다.
‘괜히 누우라 그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확실해졌다.
내가 진짜 얘를 좋아하긴 하는구나.
눈치도 없이 찾아온 감정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