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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10화 (110/151)

<110화>

키네시아가 움찔거리며 손을 빼내려 하자 그가 돌연 먹잇감을 낚아채듯 키네시아의 손을 콱 움켜쥐었다.

“내 힘은 이 아래에 있을 겁니다. 그러니 괜한 반항심이 들 때면 이 고통을 떠올리세요.”

보라색 불길이 다시 키네시아의 팔에 휘감겼다. 그녀는 진짜 불을 떼어 내려는 사람처럼 팔을 털어 내며 울부짖었다.

라파일은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뒤로 물러났다.

접촉 없이도 그의 힘은 한동안 그녀를 괴롭히다가 키네시아가 탈진할 정도가 되어서야 사라졌다.

키네시아는 떨리는 몸을 끌어안으며 공기를 들이마시려 애썼다.

라파일은 무감한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다가 다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당신은 괴로움에 약하니 마음을 다잡는 데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할 말이 끝났다는 후드를 쓰고 몸을 돌렸다.

두려운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키네시아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어린 시절, 증오에 휩싸여 한 선택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무력감이 몸을 덮쳤다.

그러나 이대로 쓰러져 있을 수만은 없다.

키네시아는 눈물을 닦아 내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자 계단 아래에서 소피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피아는 벽에 붙어 서서 키네시아의 뒷모습을 관찰하다가 옥상 광장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는 다시 어둠에 잠겼다.

***

나는 로그리예가 준비해 둔 목걸이로 외모를 바꿨다.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 보자 갈색 눈동자와 긴 갈색 머리가 보였다. 외모는 아주 평범했다. 수도를 돌아다니다 보면 비슷한 사람 다섯 명 정도는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거울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어색한 곳이 없는지 확인하다가 툭 질문을 던졌다.

“너 혹시 마법사야?”

거울 너머로 놀란 눈을 한 로그리예가 보였다. 나는 외모 변환 마법이 걸린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이거 불법이잖아.”

불법이기만 한가? 살아 있는 것의 형체를 바꾸는 마법은 상당한 고등 마법이다.

직접 걸기도 힘든 마법을 목걸이에 담아 왔다니.

펠리온이 살아 있을 때라면 몰라도 마법사의 수뿐만 아니라 위력마저 현저히 줄어든 이 세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로그리예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일 뿐이었다.

“그렇지?”

그렇지? 그으렇지이? 반응이 저게 다야?

매섭게 노려보아도 그는 생글거리며 웃었다. 나는 떠보는 것을 멈추고 로그리예를 마주 봤다.

“너도 바꿔. 외모.”

“하나밖에 준비 못 했는데. 그리고,”

로그리예가 내게 제 머리를 들이댔다.

“이 머리카락하고 눈동자, 공주님이 좋아하잖아. 바꾸면 아깝지.”

“네가 아미르 공자라는 게 들켜서 소란스러워지는 것보다는 나아.”

“괜찮아. 나는 인식 저해 마법이 걸린 목걸이를 했거든. 헤어지면 내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 못 할 거야.”

신관을 마주치면 조금 곤란해질 수도 있지만 제대로 된 신관을 만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레바나의 신관은 신성력이 없고, 샤마흐의 신관은…… 그냥 없다.

플로레타가 열심히 돌아다니며 노력하고는 있으나 아직 그 수가 30명도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러니 인식 저해 마법을 써도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로그리예가 아주 자연스럽게 내 팔을 가져가 팔짱을 꼈다.

여전히 애정을 품은 청보라색 눈동자를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내 외모가 변했는데 신경 안 쓰여? 어색하다거나, 다른 사람 같다거나.”

사람은 생각보다 시각적인 것에 약하다. 나조차도 거울을 보고 이게 나인가 싶을 정도인데 로그리예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나를 대하는 게 평소와 똑같았다.

“나는 상관없어. 공주님이 어떤 모습이든, 공주님이니까.”

……이상한 놈. 나는 그의 눈을 피하며 말을 향해 걸어갔다.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

“응. 알겠어,”

내가 먼저 말에 오르자 로그리예도 내 뒤에 올라탔다. 그는 오른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고삐를 잡았다.

곧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빠르게 수도를 벗어나 인근 소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광장에 있는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구석진 자리에 로그리예를 밀어 넣고 의자를 끌어와 그의 옆에 조금 간격을 두고 앉았다.

품에서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치자 로그리예도 지도를 보았다.

“우리 목적지는 여기야.”

손가락을 들어 아미르 공작령 최남단에 있는 항구를 콕 찍었다.

“어떻게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로그리예는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 그의 표정 변화를 주시했다.

빤한 시선이 닿자 로그리예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완전히 끊겼다.

“에피파네스는 좌우로 길고, 그 끝에 붙어 있는 아미르 공작령은 위아래로 기니까, 아미르 공작령에 남쪽 끝에 있는 항구로 가려면 레튜니아를 통과해서 가는 게 빠른데…….”

항상 미소를 짓고 있던 입꼬리도 살짝 내려가고 볼도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미소가 점점 어색해졌지만 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계속해.”

“……내 말 듣고는 있는 거지?”

고개를 끄덕이고 눈빛으로 로그리예를 종용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실 설명은 들을 필요도 없었다.

지도만 보면 대충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기도 하고, 어느 길이 안전한지, 항구까지 최단시간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정도는 이미 출발하기 전에 다 계획해 놨다.

그런데도 로그리예에게 설명해달라고 한 건, 말투를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실수로라도 펠리온의 말투가 나오거나 자신이 펠리온이라는 사실을 흘리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티는커녕 자꾸 말을 흐리는 탓에 로그리예의 말투가 어땠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말끝은 왜 자꾸 흐려?”

상체를 조금 더 앞으로 기대자 로그리예의 얼굴이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그는 곁눈질로 나를 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슬쩍 물러나려 했다.

나는 재빨리 그의 후드 자락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대답은 해야지.”

“……공주님 시선을 독차지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둘만 있었던 적 많잖아.”

“나한테 온전하게 집중해 준 적은 없었잖아.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미약한 원망이 깃든 눈동자가 드디어 내게 머물렀다.

보라색과 옅은 푸른색이 파도의 포말 같은 무늬를 그리며 뒤섞여 동공을 향하고 있었다. 까맣고 깊은 동공은 마치 심해의 구덩이처럼 보였다.

나는 우리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그의 깊은 눈동자를 홀린 듯 들여다봤다.

그러자 원망이 서서히 걷히며 애정이 드러났다.

시야를 가득 채운 청보라색 눈에 점차 푸른 빛이 짙어졌다. 내 눈에 머물던 그의 시선이 콧날을 타고 흘러 입술에 닿는 게 느껴졌다.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탁자 위에 올려진 내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여린 살을 훑으며 들어온 손끝이 내 손등을 가볍게 쥐었다. 그의 마디와 나의 마디가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맞물렸다. 굵고 모양 좋은 엄지가 내 검지 옆면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면 이런 건 달랐다.

펠리온은 이렇게 관능적으로 내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도대체 펠리온인 거야, 아닌 거야?’

답답해 미치겠다. 내 성격에 가장 어울리는 방법은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것이나 그건 이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가 만약 펠리온이고 정체를 밝힐 생각이 있있었다면 내가 이라네 황제였다고 말한 순간 그도 자신이 펠리온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펠리온이 아니라고 단정 짓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 많았다.

‘확실한 증거라도 있으면 몰아붙일 수 있을 텐데.’

뭐가 있을까. 그의 눈을 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청보라색이 점점 가까워졌다.

이상하게 목이 타는 것 같았다. 요사스러운 빛에 홀린 듯 가슴께가 뻐근해졌다. 심장이 지나치다시피 크게 뛰었다.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숨을 쉬다가 이마가 맞닿고, 코가 겹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 해?”

“이런 분위기 아니야?”

로그리예가 능청스럽게 웃으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런 분위기였다.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런 것이긴 하지만, 나 역시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심장이 요동칠 정도로 당황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의식하기도 전에 마른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나는 놀란 것을 티 내지 않으며 상체를 뒤로 물려 등받이에 바싹 붙어 앉았다.

“까불지 마.”

목소리도 평소보다 작았으나 다행히 떨리거나 감정이 묻어나진 않았다.

왠지 눈을 마주치기가 힘들어 지도를 보는 척 시선을 떨어트렸다.

로그리예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나는 한참을 지도만 들여다보며 길을 확인하는 척했다.

생각보다 놀랐는지 두근거림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조금만 옆으로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손끝, 내 쪽으로 기운 상체, 숨소리 같은 것 따위가 감각 위를 솜털처럼 굴러다니며 내 신경을 간질였다.

“야. 너 좀 떨어져 봐.”

“으응? 으으응?”

내 말에도 로그리예는 능글거리며 오히려 더 붙으려고 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쭉 밀어 내 거리를 벌리고 벌떡 일어나 그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로그리예에게로 굴러가려는 눈동자를 겨우 달래 음식점 내부를 쭉 둘러봤다.

광장 중앙에 자리 잡은 음식점은 술집도 겸하고 있었고, 2층부터는 여관이었다.

저녁에는 사람이 차 떠들썩할 테니 정보를 얻기엔 제격이었다.

물론 미리 알아보고 온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오늘은 여기서 묵으면서 합류할 상단을 찾자.”

국경을 넘을 때는 신분을 확인하니 들킬 염려가 있었다.

하지만 거대 상단의 행렬에 포함된 사람들은 일일이 신분을 확인하지 않았다.

산적이나 짐승들을 피해 상단에 돈을 내고 보호받는 사람들도 더러 있으니 상단에 합류하면 의심받을 일도, 귀찮을 일도 없었다.

설명한 적은 없지만 로그리예는 내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방을 잡을게. 나란히 붙은 방 두 개면 되겠지?”

나는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3년이나 밤사이 그의 출입을 막았으니 다른 방을 쓰려고 하는 게 당연하다. 로그리예는 내가 진심으로 거부한 일은 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왜 서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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