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키네시아는 성 꼭대기에 올라와 밑을 내려다봤다.
푸른 빛이 어스름한 새벽, 순찰병과 기사들이 든 불빛이 일정한 간격으로 궁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간혹 불시에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침입자가 있는지 면밀하게 살폈다.
제멋대로 움직이던 예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키네시아는 손에 쥔 쪽지를 만지작거리다가 펼쳤다.
[심란하면 옥상 광장에 가 봐.]
누가 황제 아니랄까 봐 필체에서도 힘이 느껴졌다. 글자와 글자를 잇는 곡선은 우아했으나 시작과 끝은 강하고 간결했다.
키네시아는 이라네 황제의 성격을 닮은 글자를 한참이나 응시하다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시선을 멀리 던졌다.
무너졌던 별관은 재건이 완료된 지 오래고, 관리가 안 되어 있던 정원과 숲도 제법 사람 손을 탄 티가 났다. 빠진 벽돌이나 사라진 조각상, 크리스탈을 팔아먹은 도금 벗겨진 샹들리에도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다.
이라네 황제 덕에 많은 것이 변했다.
그리고 이제 그 변화를 키네시아가 이어받아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10살부터 3년간, 폭력과 절망에 허우적대며 파라돈에서 지옥과도 같은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던 남자가 있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
“자신의 나약함에 치가 떨리지 않습니까? 자신의 무력함을 에피파네스의 백성들이 함께 느끼고 있을까 두렵지 않습니까?”
“……맞아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나라를 변화시킬 분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주 강하고 현명한 분이시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왕국을 제국으로 경험으로 만든 경험도 있으시고요.”
“그게 누구죠?”
“만나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위험한 사람은 아니겠죠?”
“걱정 마세요. 당신의 가족을 해치진 않을 겁니다.”
남자는 마치 키네시아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그녀의 불안을 정확하게 집어냈다.
키네시아는 위험한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었으나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달콤한 제안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상처투성이가 된 제 손등을 바라보며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의 도움을 받으면 에피파네스도, 저도, 강해질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대신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셔야 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아직 젖살조차 다 빠지지 않은 약소국의 공주는 자신의 말이 어떤 무게를 지녔는지 몰랐다.
그녀는 오랜 시간 공포에 노출되었었고, 나약함을 씻어낼 수만 있다면 악마의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키네시아가 보라색 태양을 손등에 새긴 남자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네. 뭐든 할게요.”
고국으로 돌아온 키네시아는 제 동생이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제 동생의 몸에 있는 사람이 남자가 말한 ‘당신과 당신의 나라를 변화시킬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게 하필 희대의 폭군이라 알려진 이라네 황제일 줄이야.
잠시 혼란에 빠졌지만 키네시아는 가족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말을 기억해냈다.
그 뒤로 후회 따위는 없었다.
이라네는 강하고 단단하고 현명했다.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며 주저앉으려는 나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운 은인이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지금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보라색 태양이 주변을 얼쩡거릴수록 불안해졌다.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찾아와 대가를 치르라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때가 온 것 같았다.
키네시아는 긴 숨을 내쉬며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을 향해 물었다.
“당신이죠? 폐하를 제 동생 몸에 집어넣은 게.”
키네시아가 서서히 몸을 돌렸다.
“며칠 전부터 저를 따라다니셨다는 거 알아요.”
입구를 등지고 서 있던 남자가 10년 전의 어느 날처럼 후드를 뒤로 넘기며 그녀 앞에 섰다.
생김새는 달랐으나 미소만큼은 10년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가볍게 맞잡아 늘어트린 손에는 보라색 태양 문양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새벽빛과 어우러진 모습이 어딘지 섬뜩해, 키네시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소개조차 하지 않았군요. 라파일입니다.”
“성 라파일?”
“한때는 그렇게도 불렸죠. 당신에게 저는……. 고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쯤 되겠군요.”
라파일의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그러나 키네시아는 그가 치료해 줬던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뒷걸음질 쳤다.
세상 물정 모를 때라면 저 목소리에 속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이제 말씀해 주시겠어요? 원하는 게 무엇인지.”
라파일이 손을 거둬들이며 대답했다.
“이라네리아. 그녀가 제게 오도록 도와주세요.”
키네시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리아는 지금 여기 없어요. 그 몸 안에 들어있는 건 이라네 황제예요.”
“다만 몸은 그대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저는 폐하가 전처럼 완벽해지시길 원하니까요.”
키네시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대화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라파일은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어딘지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포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노력하며 라파일의 손등에 새겨진 보라색 태양을 바라보았다.
반란 전 보았던 샤마흐의 신관, 무너진 별관, 그리고 게텔린 부인까지. 생각해 보면 어딘가에 보라색 태양이 하나씩은 꼭 끼어 있었다.
‘폐하가 그걸 몰랐을 리 없어.’
레바나는 핑계고 레그레시오의 근거지와 목적을 알아내러 간 것이라면?
거기서 일이 잘 풀리면 성불을 하겠지만 무력이 더 필요하다면 다시 궁전으로 돌아올 것이다. 키네시아는 자신이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결론을 내렸다.
‘폐하가 하려는 일을 무사히 끝마치도록 시간을 끌어야 해.’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폐하를 만나게 해 준 당신께는 감사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폐하는 이미 약혼한 상태니까요. 부모님의 허락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본인이 원해야 해요.”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라파일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허락이라, 그렇군요.”
“네. 괜찮으시면 궁전에 머물면서 두 전하의 마음을 얻는 건 어떨까요? 이라네는 레바나 신전의 비밀을 알아보기 위해 떠났으니 궁전에 머물러도 그녀에게 들킬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굳이 미소 짓지 않았다. 긴장한 기색은 있었으나 편안한 표정을 내보였다.
속내를 파헤치려는 듯 집요한 시선이 키네시아에게 닿았다.
그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시선을 피하거나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라파일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키네시아. 허락은 필요 없어요.”
나긋하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폐하는 원래 내 것이었습니다. 나는 신이 빼앗아 갔던 것을 되찾아 오려는 것뿐이에요.”
떠오르는 해를 품은 눈동자에 광기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빛이 어렸다.
키네시아는 멋대로 물러나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두려움이 몰려오자 그녀는 이라네를 떠올렸다.
“폐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요?”
“…….”
“저는 10년간 폐하를 닮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녀의 신념, 행동, 사고방식. 지금 폐하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건 저예요.”
라파일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키네시아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라파일에게 한 발 다가갔다.
“당신도 제가 반드시 필요하니까 접근한 거 아닌가요?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면 어떻게 돕겠어요. 아시다시피 폐하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요. 계획이 필요해요.”
키네시아가 라파일에게 악수를 청했다.
라파일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폐하 곁에 있어서인지, 훌륭하게 성장하셨군요.”
그는 키네시아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키네시아는 능숙하게 안도하는 기색을 숨겼다. 그리고 라파일의 손을 한번 가볍게 쥔 뒤에 악수를 끝내려 할 때였다.
라파일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며 그녀의 뼈를 으스러트릴 듯 옥죄었다.
“윽.”
키네시아가 신음을 흘리며 팔을 비틀었으나 라파일은 오히려 더 거센 악력으로 키네시아의 손을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검보라색 기운이 불길처럼 번지며 키네시아에게 옮겨 갔다.
“흐, 으윽! 헉!”
살이 타들어 가고 뼈가 녹는 듯한,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에 키네시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라파일은 평온한 얼굴로 공포에 질린 키네시아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계획 따위는 필요 없어요. 키네시아. 당신은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됩니다.”
보라색 불꽃무늬가 어깨까지 번지자 혈관이 터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끔찍한 감각이 이성을 집어삼키자마자 키네시아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아아아아아악-!”
라파일은 신성력으로 장막을 쳐 비명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았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는, 도망칠 생각조차 못한 채 벌벌 떨고 있는 키네시아의 턱을 움켜쥐어 시선을 마주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나는 주었고, 당신은 받았죠. 이번엔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겁니다. 이 계약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전까지 끝나지 않아요.”
라파일은 다정한 낯으로 마치 아이를 달래듯 키네시아의 눈물을 닦아 주고, 고통이 일었던 손등을 다정스레 쓸어 주었다.
“잊으실 것 같으니 종종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절대 잊을 수 없는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