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의문이 들 즈음 마차가 멈췄다. 그러나 내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몸을 움직이면서 머릿속에 펠리온과 로그리예를 나란히 세웠다.
머리카락 색은 똑같았으나 키와 체형, 이목구비, 목소리는 완전히 달랐다.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펠리온이 환생했거나 혹은 나처럼 로그리예의 몸에 들어간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내 추측이 틀렸으며, 펠리온과 로그리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있다.
‘말투는 좀 비슷한가?’
펠리온도 행동이 조금 가벼운 편이긴 했지만 로그리예는 그것보다 더했다. 둘 다 방정맞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로그리예가 펠리온이라면 내게 정체를 안 밝혔을 리가 없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당장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니 확신을 내리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단서가 필요했다.
‘로그리예를 데려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생각하며 대충 마무리지으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등을 보인 채 방 중앙에 서 있는 키네시아가 보였다. 그녀는 팔을 늘어트리고 내 옷장 근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뭐 해?”
키네시아가 뒤돌며 활짝 펼쳐진 짐 가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뭐야?”
“아. 내가 말 안 했나?”
키네시아가 눈만 깜빡였다. 나는 그녀를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말 안 했구나.”
나는 짐 가방을 들여다보며 서랍을 열었다.
“레바나의 약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직접 갈 거야.”
“사람을 보내지 않고?”
라파일이 실험이라고 부르던 것을 발견하면 바로 성불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사람을 보낼 순 없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으로 가서 내가 써 두었던 자서전을 키네시아에게 내밀었다.
키네시아가 얼떨결에 내 자서전을 받아 들었다.
“이걸 왜……?”
“레바나에 대해 알아보면서 나를 이 몸에 넣은 놈에 대해서도 알아볼 거야. 네 동생 몸에 무리가 가는 일이 생기면 돌아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구나.”
키네시아가 서운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아직…….”
그녀는 말을 하다가 울컥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입을 다물었다. 나는 키네시아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며 끊어진 말을 이어 주었다.
“군주가 되지 못했지. 하지만 에피파네스의 사정이 전보다 나아졌어. 군사력도 안정적이고 귀족들도 모난 놈이 많지 않고, 제국에서도 동맹을 요청할 정도니까. 국왕군은 여전히 키우고 있지?”
키네시아가 물을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렘록 산맥 협곡에 군사 기지를 만들어 뒀어. 아직 레튜니아나 파라돈의 정찰병에게 들킨 적은 없고.”
“들키기 쉽지 않은 곳이긴 하지. 내가 떠나면 너는 최대한 은밀하게 용병단들과 접촉해. 페라포네 황태자 성격을 보면 파라돈의 황제가 죽자마자 전쟁을 일으킬 거야.”
물 잔을 잡은 키네시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일 때도 중요한 외출을 할 때면 필요한 물건은 내가 직접 싸는 편이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려고 침대 위에 가방을 넓게 펼쳤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내 뒤로 키네시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너무 빤히 느껴져 나는 짐을 꾸리다 말고 뒤를 돌았다.
“내가 떠나는 게 아쉬운 거야, 아니면 혼자 해 나갈 자신이 없는 거야?”
“자신은 있어.”
대견함에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지만 이번에는 굳이 감추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덜 자란 꼬마였는데, 그녀는 어느새 황제였을 당시의 나보다도 커져서는 단단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용병단과 접촉하라는 것도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잖아.”
나는 짐을 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옷장 맨 밑, 룩소르가 생일 때마다 떠 준 담요나 망토, 목도리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 키네시아가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제국이 전쟁을 벌일 동안 동맹국에는 에피파네스의 기사와 용병을 섞어 보내고, 전쟁이 끝난 후 더 약해진 쪽을 우리 기사들로 쳐서 흡수하라는 거 아니야?”
“계속 말해 봐.”
대답하며 제일 멀쩡해 보이는 담요 하나를 꺼냈다. 그마저도 마름모꼴이었지만, 거대한 마름모라 그런지 크게 티나지 않았다.
어떻게 접어도 엉망인 담요를 대충 개어 짐 가방에 쑤셔 넣으며 키네시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보다 약한 다른 동맹국이 필요한 거지. 사방에서 공격해 제국을 쪼개 놓으면 처음에는 땅을 나눠 가져야겠지만 제국보다는 소국을 상대하는 게 편하니까.”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새삼 정말 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시원하기도 하고, 조금 헛헛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어느새 꽉 찬 짐 가방을 내려다보았다.
그 상태로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가방을 닫았다.
“잘 컸네. 룩소르가 헛짓거리하지 않게만 옆에서 잘 보필해. 그러면 네가 원하던 것도 머지않아 이룰 수 있을 거야. 더 바쁘게 살아야겠지만.”
“폐하.”
키네시아의 맥 없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가방을 침대 아래, 내 시야가 잘 닿지 않는 곳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말없이 내 눈을 들여다봤다.
내 의지를 읽었는지, 아니면 제 동생을 포기할 순 없었는지 키네시아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눈물을 보이는 법은 없었다.
대신 나에게 와락 안겨 들었다. 물론 내가 더 작아 안기는 꼴이 되었지만.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정말 갈 생각이지?”
“그럼 가짜로 가겠어?”
“내가 고양이 몸이라도 구해 볼게. 이대로 살자. 가족으로.”
아니, 이게 예쁘다 예쁘다 하니까! 지금 위대한 황제에게 재롱이나 떨면서 후손들에게 예쁨 받는 삶을 살라는 거야?
힘겹게 팔 하나를 빼 내 키네시아의 옆머리에 꿀밤을 때려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더 꼭 끌어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점점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 같았지만 키네시아는 포옹을 풀지 않았다.
꿀밤을 때렸던 손이 갈피를 잃고 허공을 해맸다. 나는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꿀밤을 때린 자리에 손을 올려 두었다.
그리고 어색하게 키네시아를 쓰다듬어 주는데,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곧 문가에서 땡그랑, 하고 맑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자기야? 내가 안길 때는 머리 쓰다듬어 준 적 없으면서!”
로그리예가 냉큼 달려와 나에게서 키네시아를 떨어트려 놓았다. 그리고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는 키네시아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네가 개니?”
“멍?”
“어휴…….”
로그리예를 떼어 놓고 문가에 뒹굴고 있는 주머니를 가리켰다.
“물어,”
로그리예와 눈이 마주쳤다.
한마디만 더 하면 진짜 입으로라도 물어올 기세였기에 나는 냉큼 말을 정정했다.
“가져 와.”
그가 쪼르르 가더니 주머니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주머니를 열자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납작한 구슬 한 개와, 같은 모양에 그보다 작은 구슬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충 누구에게 무엇을 줘야 할지 알겠다.
나는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키네시아에게 건넸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응.”
“고양이 같은 말 또 하기만 해 봐. 그땐 딱밤으로 안 끝날 줄 알아.”
키네시아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준비 끝났어.”
로그리예가 가방들을 전부 주머니에 집어넣고 나를 돌아봤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게 다가와 망토를 둘러 주며 물었다.
“정말 인사도 없이 가도 되겠어?”
“알면 난리 나.”
특히 룩소르는 체통도 잊고 엉엉 울면서 실내화 차림으로 뛰어나올 것이다.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이제 막 국왕으로서의 위엄이 서기 시작했는데 그 꼴을 볼 순 없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꼴 보기 싫은 상상 속 장면을 지워 버리고 내 망토 끈을 공들여 묶고 있는 로그리예를 빤히 보았다.
이제 보니 매듭을 묶는 방식이 펠리온과 비슷하다. 그도 꼭 이렇게 세 겹으로 리본을 묶어주곤 했었다. 꽃 같아서 예쁘다고.
“공주님, 날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 드디어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야?”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자 항상 능글거리기만 하던 놈의 얼굴에서 조금씩 미소가 사라졌다. 그 속도에 맞춰 창백할 정도로 하얗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로그리예가 뒤로 물러나며 몸을 돌렸다. 움직임에서 당황한 티가 묻어났다.
“왜, 왜 그렇게 보냐니까?”
목소리까지 뚝뚝 끊어져 나왔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옆을 지나쳤다.
다시 앞을 보자 등 뒤에서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해? 안 따라오고? 빨리 움직여. 들를 곳이 있어.”
“응. 응. 가자, 공주님.”
그와 함께 말에 올라 막 궁전 정문을 넘으려 할 때였다.
“리아야!”
“리아, 아가!”
“야! 쪼그만 게 가긴 어딜 간다고 그래!”
뒤에서 룩소르와 오틸리에, 포넨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걱정할까 봐 편지와 전서구를 남기고 왔는데 그새 따라온 모양이었다.
“로그리예, 달려!”
말하자마자 로그리예가 말을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그 신호에 말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칠게 볼을 쓰다듬었다.
뒤로 넘어가는 후드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정문 너머로 가족들이 보였다.
발을 동동 구르는 두 전하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포넨트. 그의 옆에 선 키네시아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주머니를 뒤지더니 전서구를 들어 보였다.
반사적으로 전서구가 들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에 작은 종이가 걸렸다.
[잘 다녀와.]
뒤를 돌아보니 다른 가족들이 내게 등을 보인 채 주저앉아 뭔가를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나타난 종이들이 손가락을 스쳤다. 나는 로그리예의 등에 기대 3장의 종이를 꺼냈다.
한 장을 찢어서 세 개로 나눈 듯한 종이에는 각자의 필체로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리아야. 조심해서 다녀와야 한다.]
[아가. 다치지 말고 자주 연락하렴.]
[플로레타에 이어 너까지 가출이냐? 돌아오면 오빠한테 아주 혼날 줄 알아. ……조심하고.]
글자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지만 누가 쓴 것인지 다 알아볼 수 있었다.
가슴이 간지러워 뜨거워 웃음이 터졌다.
나는 쪽지를 안주머니에 넣으며 로그리예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익숙해진 얼굴들을 하나둘씩 떠올렸다.
이제 정말 이별이다. 잠시, 혹은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