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나는 최대한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노력했다.
착용해 달라고 할 때마다 번번이 거절했으니 속상했을 수도 있지.
게다가 ‘드래곤의 심장’의 본질은 저 피처럼 검붉은 다이아몬드이다.
그게 훼손되지 않았고 원래 있던 목걸이에도 레드 다이아몬드를 박아 두었다고 했으니 색감은 달라졌겠지만, 로그리예는 잘못한 게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나한테나 의미 있는 목걸이지 로그리예에게는 그저 자신이 선물했던 수많은 목걸이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니,
“아니, 그렇다고 왕실의 보석을 훔쳐?”
생각이 그쪽으로 튀자마자 열이 확 뻗쳤다.
로그리예는 목걸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훔친 거 아닌데.”
“그럼 뭔데.”
“공주님이 금고에 넣어 두었잖아. 그래서 전하께 꺼내 달라고 했는데.”
“어떤 전하.”
룩소르겠지? 분명 룩소르일 거야.
“왕비 전하. 디자인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착용 안 하는 것 같다고 다시 만들어서 깜짝 선물할 거라고 했더니 다정한 약혼자라고 칭찬해 주셨어.”
아아. 오틸리에……. 차라리 룩소르였다면 가서 딱밤이라도 때려 주었을 텐데.
금고는 공식적으로 국왕 부부의 소유다. 주인이 자기 금고에 있던 것을 꺼내 줬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나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신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
로그리예가 단번에 시무룩해져서는 상자 뚜껑을 닫고 꼭 끌어안았다. 그러더니 비에 젖어 바들바들 떠는 강아지를 달래는 것처럼 느긋한 손짓으로 상자를 쓰다듬었다.
“그치만, 얘가 외롭다면서 매일 밤 울었는걸.”
로그리예 놈이 상자를 더 바짝 끌어안고 그 위에 볼을 기댔다. 그리고는 흑흑흑하는 소리를 몇 번 내고 내게 상자를 들이밀었다.
“이것 봐. 공주님도 우는 소리 들리지? 흑흑흑.”
아양을 떠는 게 제법 귀엽긴 한데……, 어이가 없었다.
로그리예의 미친 짓을 하루 이틀 보는 건 아니지만 내가 화를 내고 있을 때도 저럴 줄이야.
그런데 웃긴 건 황당해서 화가 가라앉는다는 것이었다.
로그리예는 내 생각을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계속해서 상자를 어르고 달랬다.
그 모습을 보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이리 줘 봐.”
로그리예가 반색하며 다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정상인인 척 말했다.
“공주님. 내가 준 선물을 소중히 여겨 주는 건 고맙지만, 쓰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 아낀다면 곁에 둬 줘.”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펠리온도 내가 이 목걸이를 걸고 있는 걸 볼 때마다 뿌듯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손을 뻗어 목걸이를 들었다.
짧고 깊은숨을 내쉬고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로그리예는 활짝 웃으며 나를 보다가 펜던트를 바라보았다.
흐뭇한 표정을 보니 심술이 치솟았다.
‘나는 누가 애교를 부려서 화도 제대로 못 냈는데 혼자 좋아하고 말이야.’
뚱하니 그를 쳐다보다가 펜던트를 내려다봤다.
“너, 내가 이걸 누구한테 받았는지는 알고 좋아하는 거야?”
“응? 나한테 받았잖아.”
“……내가 누군지 기억은 하지?”
“공주님은 공주님이지?”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알지, 알지. 이라네 황제라고 했었잖아.”
나는 그에게 눈을 한번 흘겨 주고 허리에 둘린 손을 풀러 밀어 냈다.
“이건 내가 황제가 되기 전 펠리온에게서 받은 거야. 그래서 화를 낸 거고.”
펜던트를 드레스 안으로 넣으며 로그리예를 보았다.
펠리온이 누구냐고 치대거나 삐진 척을 하며 목걸이를 하지 말라고 칭얼댈 줄 알았는데, 그는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며 무심한 척 질문을 던졌다.
“누군지 안 물어봐?”
“…대마법사잖아.”
“맞아.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야. 지금은…….”
단단한 것이 떨어져 뒹구는 소리에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소리를 낸 것은 로그리예의 손에 들려 있던 나무 상자였다.
그는 상자를 떨어트린 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었다.
장난이 좀 심했나? 그런데 사랑했던 사람이라는 게 저렇게 질색할 말인가? 차라리 화를 내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면 이해라도 했을 텐데,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절대 들어서는 안 될 것을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로그리예?”
“사랑했다고……?”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가 공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위에 걸친 팔에 얼굴을 묻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가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너 왜 그래?”
로그리예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가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맞춘 채 한참을 넋놓은 사람처럼 있던 그가 느리게 입꼬리를 끌어당겨 평소처럼 미소 지었다.
“왜 그러긴. 질투 나서 그렇지.”
거짓말.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질투 따위가 아니었다.
절망과 환희, 허망과 희망이 여러 색의 잉크를 한 곳에 들이부은 것처럼 어지럽게 뒤섞이다가 하나의 색이 되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말을 듣고 보이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감정들이었다.
“너…….”
로그리예가 몸을 벌떡 일으켜 달려들 듯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내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이마를 묻었다.
그는 여전히 조금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북서 대륙에 나도 데려가.”
라파일의 눈을 속여야 하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움직이면 오히려 불편했다. 그래서 타솔라나 지시스 둘 중 한 사람만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니 로그리예가 낄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 대신 로그리예를 데려간다면 못 데려갈 것도 없었다.
거절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웅얼 자신이 함께 가야 하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나 북서 대륙 말도 할 수 있고, 타고 갈 배도 있어. 그리고…….”
“북서 대륙 말을 할 줄 안다고?”
“공주님이 3년 전에 북서 대륙으로 갈 수도 있다고 해서 부지런히 배웠지.”
그러더니 북서 대륙 공용어로 뭐라고 말했다. 언어를 3년 만에 통달할 수 있나?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로그리예가 또다시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것 말고도 이유는 말아. 내가 공주님 호위보다 더 강하고, 말도 더 잘 들어. 호위를 데려가면 경비는 왕실에서 처리해야 하잖아? 그런데 나는 공주님 경비까지 내가 대도 상관없어. 또,”
나는 로그리예를 떼어 내 얼굴을 붙잡았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좀 진정해 봐. 갑자기 왜 그래?”
“알겠다고? 그럼 나 데려가 주는 거야?”
“안 데려가면 몰래 따라올 거야?”
로그리예는 말없이 웃었다. 저건 긍정의 의미다.
북서 대륙 공용어를 할 줄 알면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그 전에 왜 갑자기 불안 증세를 보였는지부터 물어봐야 하는데…….
“로그리…… 야!”
그는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테라스 밖으로 뛰어내려 버렸다. 깜짝 놀라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 뒤로는 내가 그날에 대해 말을 꺼내려고만 하면 도망을 쳤다.
로그리예는 감추기로 마음먹은 건 감쪽같이 둘러대거나 의뭉스러운 미소로 넘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행동한다는 건 내 질문에 대답하기 싫거나, 대답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내가 알아내 주길 바라는 거겠지.
의도를 파악했으니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필요한 물건들을 정하고 짐 가방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나를 구경하고 있는 로그리예에게 물었다.
“나갈 건데, 같이 갈 거야?”
로그리예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짐 가방을 옷장 근처에 둔 뒤 그와 함께 마법 상점으로 향했다.
협회에서 허락한 마법 물품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내가 찾는 것은 전서구였다.
편지를 전달하는 둥근 구슬은 두 개가 한 세트였고, 나눠 가진 사람끼리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편지할 사람이 많아 여러 개를 구입하려는데 내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로그리예가 속삭였다.
“한 번에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주는 전서구도 있는데. 내가 구해다 줄까?”
“그건 마법 협회에서 승인한 물건이야?”
로그리예가 또 미소로 대답을 때우며 내 이마 옆에 입을 맞췄다.
“공주님, 먼저 궁전에 가 있어.”
그는 내가 들고 있던 전서구를 진열대로 되돌려 놓고 나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했다. 그런 뒤 궁전에서 만나자는 말만 남긴 채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나는 움직이기 시작하는 마차 안에서 로그리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펠리온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로그리예가 보인 반응이 마음에 걸렸다. 그건…….
‘펠리온이나 보일 법한 반응이었어.’
나는 펠리온과의 관계를 항상 깔끔하게 정의 내렸다. 친구, 그다음은 예비 약혼자, 그다음은 충신. 하지만 그에게 내 감정을 명확하게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때의 나에겐 내 감정, 특히 애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나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상황이 안정되면 결혼하자고 했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직도 선명하다. 약혼이 무산되었을 때, 펠리온은 그저 쓰게 웃었다.
“아쉽다. 내가 라파일보다 폐하께 더 필요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평생을 내 곁에서 친구이자 충신으로 남았다.
그랬던 그가 내 마음을 뒤늦게라도 알았다면 딱 로그리예와 같은 반응을 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디선가 마법 물품을 덜컥 들고 오는 것도 수상했다. 하지만 라파일은 분명 펠리온이 죽었다고 말했다. 그는 진실을 함구할지언정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못 되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들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맞춰 보았다.
‘만약 라파일이 착각한 거라면?’
폭주했을 정도이니 그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성자는 영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마력이 신성에 반하는 성질을 가진 탓인지, 마법사의 영혼은 다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와인이 묻은 옷은 아무리 잘 빨아도 색이 남아 있는 것처럼, 마법은 조금만 사용해도 영혼의 고유한 색이 흐려진다고 했었다.
둘이 마주친 적이 있지만 라파일은 펠리온이 죽었다고 믿으니 로그리예를 그저 내 주변에 있는 마법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럼 진짜, 로그리예가 펠리온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