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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06화 (106/151)

<106화>

***

“괜찮아 보이시는군요.”

대공은 스페르모 황자를 살피고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스페르모는 대답은커녕 눈길도 주지 않고 체스판만 보고 있었다. 대공은 그게 익숙한 듯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옷장에 들어가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맨 마지막에 구조되셨다고요.”

거긴 왜 들어가 있었느냐는 투였다. 스페르모는 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비밀 통로가 있더군. 옷장 밑바닥에.”

대공은 상황을 대충 짐작했다. 방까지 반란군이 쳐들어오면 그곳을 통해 나가려고 옷장에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 키네시아 공주에게 발견되고, 자신에게 도는 소문을 알고 있으니 아마 연기도 조금 했을 것이다.

……그 연기가 별로 성의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본국은 어떻지?”

“아직 정리가 덜 됐습니다.”

레튜니아 국법상 가문의 주인은 여러 명의 처를 둘 수 있었다. 그건 황가의 주인인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는 지방 세력을 모으는 수단으로 결혼을 선택했다. 덕분에 부인만 여덟 명, 자식은 20명 남짓 되었다.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것은 그 탓이었다.

20명이 넘는 황자와 황녀 대부분이 황태자 자리를 노렸다. 황실은 몇 년간 약육강식을 따르는 야생의 세계 그 자체였다.

스페르모는 황위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으나 황제는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황제는 제가 눈여겨본 아들이 안전한 곳에 있길 바랐다. 그것도 눈에 띄지 않고 말이다.

그것이 이 작고 평화로운 나라에 스페르모가 6년간 볼모살이를 하게 된 계기였다.

“에피파네스에 더 있을 순 없어.”

애당초 교류 기간은 6년이었다. 올해가 지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에피파네스의 왕자나 공주가 레튜니아에 와야 하겠지만 아마 이 친선 교류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페라포네의 황태자 즉위로 이미 대륙에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레튜니아와 파라돈이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 에피파네스는 힘을 키웠다. 반란에서 보인 군사력과 성녀의 존재는 누구나 탐낼 만한 것이었다.

외압과 내압에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던 에피파네스는 외세의 도움 없이도 갑작스러운 반란을 진압할 정도로 내실이 좋아져 있었다.

그러니 파라돈은 레튜니아에게 에피파네스를 빼앗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에피파네스의 왕실과 친분을 쌓아 두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페르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키네시아 왕세자를 만나러 가 보았다. 주변에 불결한 게 얼쩡거리더군.”

그는 요르고스를 떠올리며 어지러워진 체스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신기해.”

고작 6년 만에 에피파네스는 이리저리 치여 굴러다니던 돌멩이에서 누구나 탐내는 원석이 되었다.

하지만 에피파네스의 새로운 왕세자가 그 원석을 가공할 능력이 있는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능력이 된다면 그분의 보석이 될 것이고, 아니라면 부서트려야지.’

스페르모는 검지를 뻗어 왕의 머리를 비스듬히 눌렀다. 왕이 무력하게 쓰러지며 나란히 서 있던 여왕과 부딪혔다.

스페르모가 체스판 위를 나뒹구는 왕과 여왕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그 아래로 보라색 태양이 떠올랐다가 이내 자취를 감췄다.

***

페라포네 황태자는 내가 몇 번 만남을 거절하자 자존심이 상했는지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꼴도 보기 싫은 요르고스를 데리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며 나에게 후회할 거라 엄포를 놓았지만 코웃음만 나왔다.

‘어차피 난 성불하고 없을 텐데 뭘 어쩌겠어?’

몸 주인이 페라포네와 마주치는 건 괜찮다. 페라포네 황태자 같은 사람은 내가 이 몸을 떠나면 금방 흥미를 잃을 것이다.

몸 주인이 황제인 나를 뛰어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당연히 그럴 일은 없으니 안전하겠지.

키네시아와 붙어다니며 친분을 쌓던 키네시아는 비교적 조용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조약대로라면 나는 스페르모를 따라 레튜니아로 갔어야 했다. 그러나 군주의 자식들을 서로의 나라에 보내 친목을 도모하는 교류는 페라포네의 강력한 주장으로 파기되었고, 나는 에피파네스에 남을 수 있었다.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왔던 사절단들과, 그 사절단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사람들까지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즈음 미론이 나를 찾아왔다.

“공주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딘가 결연한 미론의 얼굴을 힐끗 보고, 그가 가출하겠다고 달려온 플로레타의 뒤에 서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가.”

“……저 아직 아무 말씀도 안 드렸는데요?”

미론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플로레타 따라가겠다는 거 아니야? 가라고.”

미론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따라가려는 건 아니고, 성기사가 되려고…….”

“그게 그거지. 가. 힘내.”

“……죄송합니다.”

응원까지 해 줬건만 미론은 시무룩해져서 허리를 깊게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그가 기사직에서 사임했다는 말이 들렸다.

포넨트마저 하사받은 영지를 둘러봐야겠다고 떠나자 궁전은 조용해졌다.

키네시아는 나를 찾아와 허락도 없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갑작스럽게 쌍둥이와 동생을 떠나보내서 그런지, 그녀는 조금 지치고 우울해 보였다.

“폐하는 괜찮아?”

“뭐가?”

“로라와 포넨트가 없는 것 말이야.”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여?”

키네시아가 내 얼굴을 한참이나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로그리예는 내가 플로레타를 떠나보낼 땐 걱정스러운 표정을, 포넨트를 배웅할 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던데?

그냥 한 말인가 보다. 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 표정을 함부로 드러내겠어?

나는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겠어. 애들이 커서 독립하는 건 당연한 건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허전하긴 했다.

키네시아가 왕세자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차마실 시간조차 내지 못하게 된 뒤로는 더 허전해졌다.

10분마다 밥 달라고 입을 쩍쩍 벌려 대던 새끼 까치들이 다 자라 떠나고, 텅 빈 둥지를 혼자 지키게 된 어미 새가 이런 기분일까?

멍하니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로그리예가 다가와 내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애들은 참 빨리 큰다니까. 그렇지, 자기?”

무슨 소리야. 중년 부부도 아니고. 나는 그의 헛소리를 가볍게 무시한 뒤 물었다.

“너는 왜 안 가?”

“나까지 떠나면 공주님이 너무 외롭잖아.”

그 핑계로 로그리예는 집에도 가지 않은 채 툭하면 내 옆을 굴러다녔다.

“너, 할 일 없으면 나 검술이나 알려 줘.”

“내가 있는데 그런 게 왜 필요해?”

“내 몸을 지킬 수단 하나는 있어야지. 황제일 때 배운 적 있어서 금방 배울 거야.”

“흐응……. 알겠어.”

“그리고 이제 네 방 가서 자.”

“우리 각방 써? 갑자기?”

“응. 각방 써. 갑자기.”

고개를 든 호감이 애정으로 변하기 전에 그와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안 된다며 들러붙는 녀석을 떼어 놓은 후, 문이란 문은 다 잠그고 구멍이란 구멍은 다 막아 두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비밀 통로를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 입구까지 전부 가구로 막아 두었다.

그렇게 3년 동안 낮에는 로그리예에게 검을 배우고, 밤에는 문 앞을 서성이는 로그리예를 쫓아내며 지냈다.

그사이 영지를 둘러보러 갔던 포넨트는 두 번이나 수도에 들렀고, 군기술 대회와 토너먼트 대회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해 군대의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레바나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레그레시오는 슬슬 남동 대륙으로 기어들어 왔다.

그러는 와중에도 플로레타가 신성력으로 사람을 살리고 신전을 복원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그렇게 모든 게 안정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며 이 몸에 들어온 지 10년째 되는 해를 맞이했다.

***

작년에 19살 생일을 맞이했던 이들은 다음 해 3월 15일에 성인이 된 것을 축하받는다.

나라에서는 축제를 열어 주고, 성인이 된 자들은 가족이나 지인, 혹은 연인에게 축하를 받는다.

그리고 룩소르는 내가 성인이 된 것을 아주 성대하게 축하했다.

한 달 전부터 전국적으로 축제를 열고, 전국에 내 조각상을 세우고 초상화를 뿌렸다. 그 바람에 얼굴을 들고 나가기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원래도 궁전 밖으로는 잘 안 나갔지만 말이다.

키네시아와 포넨트, 플로레타가 성인이 될 때도 그랬던 전적이 있기에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창피한 건 다른 문제지.’

축하 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가 봤자 초상화가 어떻느니 조각상이 어떻느니 하는 말만 늘어놓을 게 뻔했다.

차라리 방에서 별구경이나 하는 게 재미있을 것이다.

그렇게 발코니 난간에 기대 턱을 고 있는데 아래에 얼쩡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아까부터 엄청 눈에 거슬리네.

“차라리 올라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무 밑에 몸을 숨기고 어슬렁거리던 놈이 달빛을 닮은 머리통을 쑥 내밀었다.

여전히 짧은 은발이 달 아래에서 반짝였다.

그는 활짝 웃으며 궁전의 벽을 타고 올라와 내 방 발코니 난간을 훌쩍 넘어 들어왔다.

“원숭이니?”

“우끼?”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자 로그리예가 품에서 장미 한 송이를 꺼내 내 귓가에 꽂아 주었다.

“성인이 된 거 축하해.”

“원래 성인이었어.”

“음……. 이 몸으로는 처음이잖아.”

“내 몸도 아닌데 축하까지야.”

로그리예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품에서 뭔가를 또 꺼냈다.

“어디서 자꾸 뭐가 나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얇고 긴 목걸이 줄에 매달린 붉은 펜던트가 들어 있었다.

펠리온이 나에게 청혼하면서 줬던 보석이었다.

“……이거, 드래곤의 심장 아니야?”

“맞아. 원래 있던 목걸이의 보석은 레드 다이아몬드로 바꿔 놓고 심장만 빼 왔어.”

“누구 마음대로?”

내가 듣기에도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화를 삼켰다.

이제 곧 떠날 건데 로그리예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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