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황자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저런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 황자가 진짜 중요한 인물이라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대놓고 안 중요한 척하는 경우.
둘째, 진짜 별 쓸모없는 놈인데 마침 버릴 만한 곳이 생겨 보내 버린 경우.
어느 쪽이든 지금까지는 에피파네스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형식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사절단은 그냥저냥한 놈들을 보냈으면서 룩소르의 군사력을 확인하자마자 황제의 동생씩이나 되는 놈을 보냈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에피파네스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는 건가? 아니면 그런 척하며 황자의 안위를 확인하러 온 걸까. 어쩌면 군사와 체계가 얼마나 잘 잡혀 있나 염탐하러 온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전부 다거나.’
나는 생각을 감추며 대화를 이었다.
“황자님이 아시면 서운하겠네요.”
반응을 떠본 것인데 대공은 가타부타 말을 더 얹지 않았다. 대신 잠시 침묵한 뒤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약혼식 날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유감입니다.”
아무것도 내보이지 않겠다 이거지.
의심은 키우되 확신은 주지 않는다. 다분히 귀족적인 태도였다.
생각 없이 뒹굴어도 권력을 독식할 수 있어 멍청이가 되어 버린 에피파네스의 번쩍이들과는 달랐다.
“염려 감사합니다.”
형식적으로 대답하며 대공을 가늠하고 있는데 내 어깨 머리 위로 로그리예의 볼이 툭 떨어졌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로그리예의 얼굴에 떠오른,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는 대공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덕분에 우리의 관계가 더 견고해졌으니까요.”
사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놈이 뭘 알고 말하는 건가? 싶었지만 로그리예는 생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소문이 난다고 해가 될 건 없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고 로그리예를 향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빛이라도 뿜어낼 것처럼 환하게 미소 지었다.
무도회장만 아니었다면 달려들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애써 고개를 돌려 뜨거운 시선을 외면하는데 페라포네 황태자가 다가왔다.
“이라네리아 공주, 아미르 공자.”
이름으로 인사를 대신한 그녀는 레튜니아의 대공을 보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곧장 속을 긁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요, 대공. 후계자 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다고 들었었는데, 요즘은 좀 괜찮은가요?”
“걱정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페라포네 황태자. 파라돈은 황제 폐하께서 편찮으시다던데, 요즘은 괜찮으십니까?”
“우리 나라의 황제 폐하까지 신경 써 주시고, 대공께서는 근래 아주 여유로우신가 봅니다.”
“페라포네 황태자만 할까요.”
둘이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소리 없이 으르렁거렸다.
얘네는 굳이 왜 내 앞에 와서 싸우는 거야? 인사도 못 받게.
“두 분께서 쌓인 담소가 많으신 모양이군요. 마침 저는 받아야 할 인사가 남았으니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편 후 몸을 돌렸다. 그러나 멀어지기도 전에 페라포네 황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라네리아 공주.”
파라돈 놈의 호명에 멈춰 서고 싶지 않았기에 일부러 못 들은 척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리고, 로그리예가 상체를 살짝 숙여 내게 속삭였다.
“공주님, 뒤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나는 한숨을 삼키고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뒤를 돌았다.
친히 내게 다가온 페라포네가 조금 더 거리를 좁혔다.
“조만간 시간을 내주었으면 해.”
“볼일이라도?”
“제안할 게 있어. 그대에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외교적인 문제라면 국왕 전하나 왕세자 저하와 상의하시죠.”
“글쎄. 그대에게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은데.”
페라포네가 볼이 스칠 정도로 가깝게 다가와 속삭였다.
“당황스러운 일이 생기자마자 국왕과 왕세자가 그대를 보더군. 실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이런 조그만 나라에서 커 봤자 얼마나 클 수 있겠니.”
페라포네의 양손이 내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단번에 보고 알았어. 너는 이런 자리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더 큰 권력을 원하지 않니?”
만족을 떠나서 탐나지도 않는다.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지만 지금의 파라돈은 레튜니아와 대륙을 나눠 가진 상태다.
내 전성기에 비하면 영토도 군사력도 반절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어딜 건방지게.
속으로 코웃음을 치는데 페라포네의 손이 부드럽게 내 어깨를 쓸고 내려와 양 팔뚝을 움켜쥐었다.
“만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그렇게 자비로운 성격이 못 되거든.”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딱 아프기 직전이 되었을 때, 익숙한 손이 페라포네를 떨쳐 내며 나를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에 폭 안긴 채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로그리예가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바로 페라포네에게 시선을 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무리 동성이라지만 제 약혼녀를 그렇게 주무르시니 질투가 나서 참을 수가 있어야죠. 이래 봬도 독점욕이 강한 편이라서요.”
로그리예의 말투는 평소처럼 한없이 가벼웠다. 입꼬리 역시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싸늘했다.
페라포네는 기가 차다는 듯 짧은 숨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로그리예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렇게 제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그때 쉽게 놓아주는 게 아니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였지만 나에게 안 들릴 정도는 작진 않았다. 무슨 의미인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혼담이라도 오갔나 보지. 공국은 무역이 활발하고 부유한 나라이니 파라돈이 탐낼 만하다.
국가 간의 정략혼은 아주 흔한 일이니 기분 나빠할 것도 없다.
그런데 로그리예는 혼날 것을 직감한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주님, 자기야. 저게 무슨 말이냐면…….”
“설명 안 해도 돼. 정략혼 제안이 와서 거절한 거 아니야?”
“응? 맞지. 맞아.”
로그리예가 고개를 기울였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귓가에 속삭였다.
“파라돈의 황제가 추진한 건데, 저쪽에서도 원하지 않았어.”
그렇겠지. 아미르 공작가에는 후계자가 로그리예 밖에 없으니 정략혼이 성사되면 페라포네가 아미르 공작가로 가야 한다.
야심가인 페라포네가 그걸 바랐을 리 없다.
저 말은 그냥 나와 로그리예의 관계에서 누가 우위서 서 있는지 보기 위해 찔러 넣은 말이다.
그러니 기분 나빠할 것 없다. 정말, 진짜로.
나는 페라포네에게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몸을 돌렸다.
대충 연회장을 돌아다니고 인사를 나누고 공주 역할 좀 하다가 대공이나 페라포네 황태자 같은 주요 인물이 떠나고 난 뒤에 나도 밖으로 나왔다.
연회장에서 멀어지자 로그리예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정면만 바라보며 물었다.
“페라포네 황태자랑 진짜 뭐 있었어?”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낑낑거려? 플로레타랑은 손잡고 있다가 걸려도 멀쩡하더니.”
“그때는 공주님 기분이 괜찮아 보였으니까 그렇지.”
“지금은?”
“화난 것 같은데?”
“내가? 내가 화날 일이 뭐가 있어.”
눈을 맞추자 로그리예가 씩 웃었다.
“혹시 질-”
“질투니 뭐니 그딴 소리 하기만 해 봐.”
“-렸나? 황태자 성격에 질린 건가?”
“그렇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페라포네 황태자, 키네시아랑 동갑이야.”
“어른을 협박하고 말이야.”
그래. 기분 나쁠 게 있다면 그것밖에 없지. 그것 말고 무슨 이유가 더 있겠어?
“그건 그렇고, 거기서 그렇게 대놓고 티 내면 어떡해.”
“티 내? 뭘? 우리 사랑?”
“네가 나한테 꼼짝 못 하는 줄 알 거 아니야.”
“뭐 어때. 사실인데.”
아주 요망스럽게 웃으며 볼을 갖다 대는 놈의 이마를 콩 쥐어박았다. 그는 거둬들이려는 내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공주님이 내 약점이 될까 봐 걱정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약점이야? 강점이 되면 몰라도.”
“아하하하! 그렇지.”
웃는 얼굴과 깍지 껴 잡은 손을 한번 보고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앞으로 나갔다.
“어쨌든, 앞으론 신중해. 네가 내 말이면 죽는 시늉도 하는 걸 그놈들이 어떻게 이용해 먹을 줄 알고.”
“시늉이라니, 나는 진짜 죽, 아야야. 오늘 많이 때리네.”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은. 하여간 새파랗게 어린놈이 못 하는 말이 없어.”
“내가 공주님보다 나이 많은걸.”
“어쭈?”
“정신 연령으로 따지면 한, 129배?”
“또 까불지.”
주먹을 들어 보이자 로그리예가 화들짝 놀라는 척을 하며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가증스럽게도 전혀 무섭지 않은 목소리로 ‘아이구, 무서워라!’라고 소리치며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쫓아가려고 몸을 돌리려는데 로그리예에게 뒤를 잡혔다.
로그리예가 내 등에 붙어 나를 끌어안았다. 팔뚝째로 안긴 거라 손이 올라가질 않았다.
손이 근질거려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면 못 때리겠지?”
그리고 의기양양해져서는, 건방지게 내 머리 위에 볼을 얹어 놓았다.
때리긴 누가 못 때려? 나는 코웃음을 치고 놈에게 황제의 고귀한 정수리를 날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