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미론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플로레타를 바라보았다. 아네스 궁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 갑자기 궁전을 떠나 대륙 전체를 돌아다니겠다니…….
아무리 신관들이 동행한다지만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었다.
‘출세하려면 수도에 있어야 하는데.’
그는 고민하며 플로레타의 가느다란 손가락과 여린 어깨, 두려움이 사라져 찬란하게 반짝이는 청보라색 눈동자를 보았다.
그러는 사이 마차는 궁전에 도착했다.
플로레타는 치마를 움켜잡아 걷어 올리고 연회장을 향해 달렸다.
미론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뒤따라가며 생각했다.
‘성기사, 어떻게 되는 거였더라?’
***
작위를 받은 자들이 옆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로 키네시아가 걸어가 룩소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피파네스의 공주 키네시아 벨로아스. 그대를 왕세자로 임명한다. 키네시아 벨로아스는 에피파네스에 헌신을 다하도록 하라.”
“명 받들겠습니다, 전하.”
“책봉식은 돌아오는 1일에 치르겠소. 다들 빠짐없이 참석하도록 하시오.”
룩소르의 말이 끝나자 에피파네스의 귀족들이 무릎을 굽히며 예를 취했다. 그는 손수 제 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자리에 모인 귀족들도 몸을 세웠다.
룩소르는 귀족들을 한 번 둘러보고 왕좌로 갔다. 오틸리에가 그의 왼편에, 키네시아가 그의 오른편에 앉았다.
나는 로그리예를 데리고 키네시아의 옆에 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멀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포넨트가 보였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룩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제 아들을 맞았다.
“포넨트, 왔느냐.”
“예, 전하.”
그 호칭에 룩소르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포넨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더는 다가가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내가 뭔들 못 들어주겠느냐.”
“저는 이 자리에서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고 왕실을 지키는 검이 될까 합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기사 작위를 내려 주십시오.”
왕국의 유일한 왕자가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자 주변이 술렁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키네시아가 왕세자로 확정될 때 유일하게 예를 취하지 않았던 외국인들을 바라보았다.
페라포네 황태자는 흥미롭다는 듯 붉은 입술을 비틀어 올린 채 포넨트를 보고 있었다.
제 오빠인 요르고스와 아주 똑같은 미소에 기분이 나빠져 고개를 돌리자 레튜니아에서 온 대공이 보였다.
요르고스와 함께 서 있는 페라포네 황태자와 달리 그는 혼자였다. 그러나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다를 바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룩소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뜻이 그렇다면 받아들이마. 포넨트 벨로아스를 기사로 임명하고, 그에게 공작 위와 미드문의 영토를 하사하겠다.”
룩소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로그리예가 눈치껏 예장용 칼을 풀어 키네시아에게 넘겼다.
키네시아가 그 검을 양손으로 받쳐 룩소르에게 전달했다.
룩소르가 든 검이 포넨트의 머리와 양어깨에 내려앉았다.
“포넨트 미드문에게 검을 내리니, 빛을 잃지 말고 에피파네스를 수호하며 왕실에 충성을 다하도록 하라.”
양손을 높게 들어 검을 받아 든 포넨트가 왕좌 옆에 앉은 제 쌍둥이를 보았다.
“죽음과 삶을 다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검을 허리에 차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포넨트를 보자 기분이 묘했다. 장성한 아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자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오틸리에가 보였다.
룩소르는 자리에 돌아와 제 부인의 손을 다독였다. 그리고 악단에게 손짓해 음악을 연주하게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어머니, 아버지!”
문이 쾅 열리며 플로레타가 난입했다.
헝클어진 머리로 숨을 헐떡이며 치맛단을 치켜올려 움켜쥔 모습은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기된 얼굴과 반짝이는 두 눈에는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생소한 몰골로 성큼성큼 대연회장의 계단을 내려와 오틸리에와 룩소르의 앞에 섰다.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러 왔어요!”
“떠나다니? 로라, 그게 무슨 말이니?”
오틸리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플로레타에게 다가갔다. 룩소르와 키네시아, 포넨트도 플로레트를 빙 둘러쌌다.
플로레타는 제 가족들의 손을 잡아 주며 대답했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샤마흐 신전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해요. 신관님들이 마침 떠나신다고 해서 같이 가려고요.”
“하지만, 너무, 너무 갑작스럽지 않으냐?”
“그래. 로라. 이렇게 갑자기…….”
“그리고 샤마흐는, 너 샤마흐의 성녀였어? 갑자기 깨달은 거야?”
당황했는지 그들은 ‘갑자기’만 오십 번 정도 말하며 플로레타를 말리려 했다.
귀족들은 플로레타가 내뱉은 ‘샤마흐’라는 단어에 술렁였다. 내 옆에 서 있는 로그리예는 뭐가 웃긴지 배까지 잡으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혼란하다, 혼란해.
눈을 감고 이마를 짚는데 가녀린 손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다녀올게, 리아.”
“그래.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치지 말고. 그리고 누가 치료해 달란다고 다 해 주지 마. 어중이떠중이들까지 다 치료해 주다간 몸만 축나. 사람이 몰려서 움직이기도 힘들고.”
“응. 너도 조심해.”
한 발자국 떨어진 플로레타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네 여정에 샤마흐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배우지도 않았을 텐데 제법 성직자 같은 말을 하는 게 웃겼다.
그러나 별개로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었기에 그녀의 손을 들어 손등에 이마를 대 예의를 표했다.
플로레타가 얼굴을 붉히고 활짝 웃은 뒤, 다른 가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연회장을 뛰쳐나갔다.
“로라, 얘야! 잠깐만.”
“야, 이렇게 가는 게 어딨어! 나 아직 기사 됐다는 말도 못 했는데……!”
당황한 오틸리에와 포넨트가 플로레타를 부르며 따라갔다.
룩소르와 키네시아도 플로레타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이제 막 시작한 무도회를 박차고 나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본분을 잊지 않는 게 기특해 두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했다.
“가 봐.”
룩소르와 키네시아가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볼지 모르는데 아쉽잖아. 무도회는 내가 지키고 있을게.”
“이라네 너는?”
“그래, 리아야. 아빠가 있을 테니 언니와 제대로 작별하고 오너라.”
“난 됐으니까 빨리 가.”
“……고마워.”
키네시아는 내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으나 룩소르는 여전히 우물쭈물하며 서 있었다.
저러다 놓치면 어쩌려고 꾸물거려? 보는 눈이 많아 엉덩이를 차서 쫓아낼 수도 없고.
“쁠릐 그세요. 즌흐.”
룩소르는 내가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낮춰 협박을 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나를 한번 안아 주고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작위 수여가 끝났으니 연회를 시작하겠소. 모쪼록 즐겁게 머물다 가길 바라오.”
그러고는 다시 나와 짧게 포옹하고 다급한 걸음으로 가족들을 따라갔다.
나는 악단에게 손짓해 성녀의 난동으로 잠시 끊겼던 음악을 다시 흐르게 했다. 그러자 로그리예가 기다렸다는 듯 내게 손을 뻗었다.
“공주님. 제게 첫 춤을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춤추는 건 싫지만 무도회를 지키기로 했는데 벽처럼 서 있을 순 없기에 로그리예의 손 위로 내 손을 겹쳤다.
로그리예가 활짝 웃으며 홀 중앙까지 걸어간 뒤 내 허리를 팔로 감쌌다. 능숙하게 나를 리드하며 그가 속삭였다.
“공주님, 선수를 빼앗겨서 어떡해? 북서 대륙으로 가는 건 조금 더 미뤄야겠어. 어차피 당장 갈 생각도 없었겠지만.”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로그리예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가 겹쳐졌다.
“갑자기 딸을 떠나보낸 전하들이 걱정되어서,”
“갑자기 레그레시오의 정보가 풀린 게 이상해,”
로그리예와 나는 동시에 말을 잇다가 너무 다른 내용에 입을 꾹 다물고 서로를 쳐다봤다.
웃음이 터진 로그리예가 움직임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져 그를 질질 끌어 춤추는 시늉이라도 하려는데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로그리예는 입을 다물긴 했으나 여전히 어깨를 들썩이며 내 이마에 제 이마를 툭 기댔다.
그러더니 맞잡고 있던 내 손을 제 어깨로 넘기고는 양팔로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대로 춤추는 척 중앙을 벗어나며 물었다.
“뭐가 웃겨?”
“그냥. 공주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족들을 보길래 그것 때문인 줄 알았지.”
내가 언제 플로레타와 기타 등등을 걱정했다고?
코웃음을 치며 로그리예를 떨어트려 놓고 왕좌 옆으로 걸어갔다.
“너는 어디 가서 표정으로 사람 생각 짐작하지 마.”
“자기 속마음을 모르는 것도 귀여워.”
“뭐래.”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정면을 응시했다.
레튜니아의 대공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 어깨 쪽으로 기우는 로그리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밀어 세운 뒤 대공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맹랑한 것을 발견한 표정을 짓더니 순순히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주님.”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대공. 스페르모 황자님은 만나 보셨습니까?”
“곧 찾아뵐 생각입니다.”
이놈 봐라? 황자 안위가 걱정된다면서 순간 이동까지 써서 달려와 놓고 아직 확인도 안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