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키네시아야 왕세자가 될 줄 알았지만, 플로레타까지 성녀가 되었는데 나만 제자리야. 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서.”
“그럼 나는? 나도 아무것도 아닌데. 지금 완곡하게 비난하는 거야?”
“뭐래. 너는 이라네잖아.”
“뭔데 그게. 폭군이란 뜻이면 가만 안 둘 거야.”
슬그머니 주먹을 들어 올리자 포넨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맡지 않아도 도움이 된다고!”
그런 거라면야 뭐.
나는 조용히 주먹을 내렸다.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로그리예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포넨트가 로그리예를 보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그리예라도 이길 수 있으면 기사단장 자리라도 달라 그럴 생각이었는데…….”
“나를?”
로그리예가 가볍게 웃었다.
“4515년은 더 훈련해야 할걸.”
엄청 구체적으로 놀리네. 포넨트도 그렇게 느꼈는지 발끈했다.
“내가 그렇게 부족하냐?!”
“아니. 내가 잘난 거니까 화내지 마.”
나는 로그리예를 들이박으려는 포넨트의 팔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히며 물었다.
“얘를 이기는데 왜 기사단장 자리를 달라 그래?”
“맞아. 나는 부마인걸.”
“약혼자지.”
“부마인걸.”
“약혼자라고.”
“부마,”
“야! 심란한 사람 앞에 두고 염장 지르냐?”
포넨트가 팔을 쭉 뻗어 로그리예를 옆으로 밀어 버렸다. 그 탓에 쪼그려 앉아 있던 로그리예가 어이쿠, 하며 옆으로 기울었다.
나는 로그리예가 넘어지지 않게 팔을 잡아 주고 포넨트를 보았다.
그가 멋쩍게 뒷덜미를 문지르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혼자, 로그리예는 강하니까 이기면 그럴 자격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중심을 잡은 로그리예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도 충분히 강해. 지금 실력으로도 기사단장은 이길걸.”
“그리고 왜 자격을 네가 혼자 정해?”
로그리예와 내가 연달아 말하자 포넨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만 큰 녀석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이게, 오빠한테 건방지게.”
투덜거리는 걸 무시하고 포넨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키네시아나 플로레타는 신경 쓰지 마. 각자 가는 길이 다른 거니까 너도 네 길을 찾으면 돼.”
“내 길…….”
“그래. 네 길. 지금은 연회에 참석할 준비부터 하고.”
“알겠어.”
포넨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렸다.
로그리예는 여전히 쪼그려 앉아 포넨트의 등을 보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제 친구의 뒷모습을 응시하더니 손을 둥글게 말아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래도 친구라고 격려를 해 줄 생각인가 보네.’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그리예가 포넨트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창을 넘어가면 더 빨라!”
……미친놈인가?
***
“공주님. 여기서 뭐 하세요?”
화단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플로레타에게 미론이 말을 걸었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플로레타는 흠칫 놀랐다가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하곤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꽃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미론이 플로레타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았다.
“표정이 평소랑 다르신데요.”
“사실…….”
플로레타는 우물쭈물하다 말을 이었다.
“신전에 가 봐야 하는데 혼자 가기가 무서워요. 하지만 리아와 키네샤는 너무 바쁘고, 포넨트도 혼자 심란해 보이고……. 로그리예 공자에게는 별로 부탁하고 싶지 않아서요.”
미론은 그녀가 하는 말을 묵묵히 들어 주었다. 잠시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본 키네시아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년식도 치렀는데, 이런 일도 혼자 못하고……. 한심하죠?”
“절대요. 갑자기 성녀가 되신 거잖아요. 인생에 그렇게 큰 변화가 생기면 누구라도 두렵고 당혹스러울 겁니다.”
“정말요? 리아도 그럴까요?”
“당연,”
하다고 말하려던 미론은 이라네리아의 무심하고 삐딱한 표정을 떠올렸다.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피가 낭자한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고 네페르트 부인을 보던 살기 어린 눈빛이었다.
이라네리아 공주라면 성녀가 되든 말든 코웃음이나 칠 것 같았기에, 미론은 입을 다물었다.
“음……, 어…….”
그의 입이 벌어졌다 다물리며 고민하는 소리만 내자 플로레타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푸흣, 하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는 못했다.
미론은 그제야 플로레타가 일부러 그런 질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주님, 짓궂은 면이 있으시네요.”
화들짝 놀란 플로레타가 미론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커다랗게 벌어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청보라색 눈동자에는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죄, 죄송해요. 장난친 건데……. 기분 나쁘셨어요?”
“저도 장난이었어요.”
그제야 플로레타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미론이 미소를 짓자 플로레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괜히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미론은 볼을 긁적였다.
그의 시선이 말간 플로레타의 얼굴에 닿았다.
“음. 혼자 가기 무서우시면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정말요?”
플로레타가 반색하며 환하게 웃었다.
“지금 당장 갈 수 있을까요?”
처음 보는 표정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미론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후 훈련도 끝났고, 오늘 마침 비번이라 할 일도 없거든요.”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깐 기다리세요. 마차를 불러오겠습니다.”
“감사해요, 미론 경.”
미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드 두 벌을 챙겨 곧장 마차를 불러왔다.
플로레타는 미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뒤이어 마차에 오른 미론은 마부석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플로레타에게 어디로 갈 건지 물었다.
플로레타는 잠시 고민했다. 음성은 샤마흐 신전에서 들었으나 레바나 신을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던 탓이었다.
“음……. 레바나 신전이요.”
미론이 그녀의 말을 마부에게 전달했다.
마차는 샤마흐 신전을 지나쳐 레바나로 향했다. 미론은 그냥 내리려는 플로레타에게 후드를 건네주었다.
“들키면 소란스러워질 겁니다. 공주님.”
플로레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고 후드로 얼굴을 가렸다.
미론 역시 왕실 기사단의 표식이 안 보이도록 후드를 여민 뒤 플로레타를 따라갔다.
그들은 사람을 피해 조용히 대기도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서서 레바나의 문장을 보자 마치 따뜻한 물에 잠긴 것처럼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신전 안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미론에게 속닥였다.
“샤마흐로 가 봐요.”
미론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밖으로 안내했다.
레바나의 신관들은 신도들보다 자신들이 권위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였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말을 걸지 않았다.
덕분에 두 사람은 조용히 레바나 신전을 나와 샤마흐 신전으로 갈 수 있었다.
그들은 마찬가지로 얼굴을 가리고 샤마흐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예전과 달리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플로레타는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샤마흐의 문장을 바라봤다.
순간 머릿속에서 커다란 종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아……!”
눈을 감자 눈꺼풀 아래로 삭막한 풍경 수십 개가 스쳐 지나갔다. 한꺼번에 쏟아지는 이미지들에 그녀는 현기증을 느꼈다.
미론이 비틀거리는 플로레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다만…….”
그녀가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 여전히 눈앞에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유령처럼 훅 다가왔다가 사라졌다.
플로레타는 본능적으로 그것들이 옛 샤마흐의 신전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야. 무너진 것들을,]
[일으켜 세우렴. 나의 아이야.]
당장. 당장 해야 한다. 그녀는 제가 아는 얼굴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발길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미론은 플로레타의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봤기에 신의 음성을 들은 건가 싶어 조용히 뒤따랐다.
뒷문으로 나가자 신관 몇 명이 마차에 짐을 꾸리고 있었다.
플로레타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신관이 그녀를 알아봤다.
“공주, 아니, 성녀님!”
그가 한걸음에 다가와 플로레타의 손등에 이마를 댔다.
“성 플로레타시여.”
“저를 어떻게 알아보셨나요?”
“이렇게 신성한 기운이 흘러넘치는데 모를 수가요.”
신관이 일어서며 미소 지었다. 플로레타는 멍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물었다.
“어디 가시나 봐요.”
“예. 신관들도 많이 모였으니 슬슬 엉망이 된 성역들을 재건하러 가 볼까 합니다. 전 대륙을 모두 돌아다녀야 하니 아마 한동안 못 뵐 듯싶습니다.”
플로레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신관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
“저도 같이 갈게요!”
“예?”
“저도 가야 해요. 샤마흐께서 제게 무너진 것을 일으켜 세우라고 하셨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궁전에 다녀올 테니…….”
신관이 허둥지둥하는 플로레타의 어깨를 붙잡았다.
“성 플로레타.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충분히 인사하시고요.”
“네, 신관님.”
하지만 천천히 다녀오라는 신관의 말이 무색하게 플로레타는 몸을 돌리자마자 달려갔다.
미론은 함께 뛰며 넘어지려는 플로레타를 붙잡아 주거나 플로레타가 들이박으려는 문들을 열어 주었다.
그들은 아주 짧은 시간 만에 다시 마차 앞으로 돌아왔다.
플로레타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그러모으는 사이 미론이 마차 문을 열었다. 플로레타는 에스코트도 없이 마차로 성큼성큼 올라가며 마부에게 소리쳤다.
“궁전으로 가 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미론이 문을 닫기가 무섭게 마차가 내달렸다. 플로레타는 초조한 기색으로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미론은 그녀를 보다가 손수건을 건넸다.
“공주님. 그러면 이제 떠나시는 겁니까?”
손수건을 받아 이마를 톡톡 두드려 닦던 플로레타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미론을 보았다.
“네. 떠나야 해요.”
드물게 단호한 어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