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침묵하고 있던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이것도 시험입니까?”
꼬질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명백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원래도 나를 편하게 대하진 않았으나 그 기색이 더 짙어졌다. 특히나 반란군을 처단하는 자리에 있던 자들은 내 눈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저렇게 심약해서야.
“쯧쯧.”
혀 차는 소리에 맞춰 꼬질이들의 어깨가 들썩였다.
저 모습을 보자 조금 마음이 약해졌다.
내가 그동안 너무 고압적으로 굴었나? 하긴. 룩소르도 하오체를 쓰면서 말을 높이는데 내가 너무 반말을 찍찍 내뱉긴 했지.
“여러분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왕실에 충성한다면 저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공, 공주님!”
“그냥 말씀을 편하게 해 주십시오.”
“맞습니다, 공주님!”
두려워할 필요 없다니까 왜 저렇게 벌벌 떨어?
좀 달래 보라고 룩소르에게 눈짓했다. 그러나 꼬질이들은 그 눈빛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이번엔 룩소르에게 목소리를 냈다.
“전하. 전하께옵서도 저희같이 미천한 것들에게 말을 높일 필요 없습니다.”
“맞습니다, 전하. 부디 편하게 하대해 주시옵소서.”
룩소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예전보다 단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아니, 그렇게 하겠네.”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뭐, 알아서 기겠다는데 내가 말릴 필요는 없지.
나는 나를 빤히 보는 키네시아에게 가볍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키네시아가 입 모양으로 귀족들을 위협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룩소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키네샤.”
키네시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몸을 바로 했다.
“네, 전하.”
“너를 왕세자로 책봉하려 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키네시아가 반사적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에는 약간의 혼란과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키네시아도 이번 일로 룩소르의 자리가 비었을 때 누군가는 책임지고 나라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성인이 된 공주와 왕자가 3명이나 있는데 왕세자 자리가 비어 있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뚱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자 키네시아는 금세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췄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주시면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 부담이 크겠지만 잘 부탁한다.”
“네, 전하.”
룩소르가 키네시아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였다.
왕이 되기 위해선 왕세자가 되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정작 절대 군주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키네시아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는 나가려는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일어나려던 키네시아는 얼떨결에 자리에 앉아 나를 보았다. 나는 가만히 사람들이 전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즈음 키네시아를 끌고 밖으로 나가며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죽상이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불안해.”
나는 키네시아와 눈을 맞췄다.
“그럴 땐 두 가지만 기억해.”
“어떤 거?”
“첫째,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탓은 아니야. 둘째, 만약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면 무시해.”
“…….”
“자책은 너를 갉아먹을 거고, 만약이란 가정은 의미가 없어. 지난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앞을 보면서 나아가야 해.”
이건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근 몇 달 사이에 평생 할 후회를 다 했으니까.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군주는 위대할 순 있어도 전지전능할 순 없어.”
키네시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명심할게.”
나는 팔을 뻗어 키네시아의 높은 정수리를 몇 번 두드려 준 뒤 먼저 걸어갔다.
키네시아는 나를 따라오다가 할 일이 많다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헤어져 혼자 복도를 걷다 보니 어딘가 허전했다. 옷에 잘 달려 있던 단추 하나가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것도 매우 반짝거리는 단추가.
‘로그리예가 안 보이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로그리예의 방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원래라면 집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나오자마자 팔을 꿰찼을 놈인데. 도대체 어딜 간 거지?
혹시 또 플로레타나 놀리러 갔나 싶어 플로레타 방에 가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정원으로 가려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왜 그놈을 찾아다니고 있지? 두면 알아서 올 텐데.’
고개를 젓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디선가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창밖을 내다봤다.
그곳엔 로그리예가 있었다.
‘뭐야. 포넨트랑 대련하고 있었잖아.’
괜히 돌아다녔다 싶어 몸을 돌려 가려는데 작은 신음과 함께 쇳소리가 멈췄다.
창 너머로 손목을 잡고 주저앉은 포넨트와 검을 갈무리하고 있는 로그리예가 보였다. 포넨트가 패배한 것이었다.
한두 번 져 본 게 아닐 텐데도 포넨트는 주저앉은 상태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로그리예는 포넨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곧장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포넨트도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발견한 포넨트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고 성큼성큼 걸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14살일 때도 한 번 저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저놈은 또 왜 저래.”
“궁금하면 따라가 볼래?”
언제 다가왔는지 창틀에 기댄 로그리예가 손을 꽃받침처럼 만들어 얼굴을 올려놓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린애도 아니고, 알아서 하겠지.”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로그리예가 창문을 넘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로그리예는 환하게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팔짱은 끼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내게 변명했다.
“땀이 나서.”
“누가 뭐라니?”
걸음을 옮기자 로그리예가 따라오며 물었다.
“그런데 공주님은 왜 여기 있어?”
“……산책.”
“앞에 공백 뭐야. 응? 혹시……, 설마…….”
“뭐!”
“내가 안 보여서 찾으러 온 거야? 정말? 진짜? 나 너무 기뻐. 눈물 날 것 같아.”
“아직 그렇다고 말 안 했거든?”
“아직? 아직?”
로그리예가 정신 사납게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쫓아왔다.
“아직이면, 그렇다고 말해 줄 생각이었다는 거네? 조금만 더 기다릴걸. 그러면 공주님 입으로…….”
시끄럽게 구는 녀석의 어깨를 붙잡아 내 앞에 세웠다. 로그리예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조금 헝클어진 결 좋은 은발을 쓱쓱 쓰다듬어 정리해 주고 그 자리에 딱밤을 놔 주었다.
로그리예가 생글거리는 얼굴과 감흥 없는 목소리로 엄살을 피웠다.
“아야.”
나는 그의 한쪽 팔을 끌어서 내 팔로 휘어 감았다. 땀은 무슨, 보송보송하기만 했다.
방으로 향하는데 조용하던 로그리예가 제 머리를 쑥 내밀었다.
“공주님. 잘못 맞았나 봐. 너무 아파. 호- 해 줘, 호-.”
“끄블즈므르.”
“응.”
이를 악물고 말하자 로그리예가 순순히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팔을 굽혀 팔짱을 낀 모양으로 만들며 평소보다 더 생글거렸다.
그게 괜히 얄미워 손을 쑥 빼내자 그가 냉큼 다시 팔짱을 껴 왔다.
나는 얽혀 있는 팔을 바라보며 어쩔까 고민하다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근데 포넨트는 왜 저러는 거야? 사춘기가 두 번 오는 경우도 있나?”
“쌍둥이는 왕세자가 될 거고 동생은 성녀가 됐으니까 심란한가 보지.”
“키네시아가 왕세자가 되는 건 어떻게 알았대? 오늘 회의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어제 전하가 불러서 의견을 물어본 모양이야. 공주님은 옛날부터 왕위에 관심 없다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지만 포넨트는 그런 적이 없으니까.”
“흠.”
혹시 또 열등감 같은 걸 느끼는 건가? 저러다가 엇나가면 어쩌지.
생각에 빠지자마자 로그리예가 내 볼을 감싸 제 쪽으로 끌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자기. 혼자 잘 추스를 거야.”
고개를 끄덕였지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마침 할 일도 없겠다 포넨트를 몰래 따라다니며 지켜보았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종일 검만 휘두르고 있었다.
조금 후에 연회가 시작하는 것을 잊은 건지 옷은 여전히 훈련복이었고 움직임도 멈추지 않았다.
‘연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는 건가?’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포넨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뭐야? 기절한 거야?
깜짝 놀란 나는 옆에 있는 로그리예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자 로그리예가 나를 한팔로 안고 훌쩍 창문을 넘어 포넨트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로그리예의 품에서 벗어나 포넨트 옆에 쪼그려 앉았다.
포넨트가 눈을 떴다가 나를 보고는 반쯤 일어나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야, 너는 왜 기척도 없이!”
“기척이 없기는 무슨, 뛰어왔는데.”
포넨트가 심장을 쓸어내리고는 다시 뒤로 털썩 드러누웠다. 그는 팔로 얼굴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그냥 가라.”
코웃음을 치고 그 자리에 앉으려는데 로그리예가 제 외투를 벗어 바닥에 깔아 주었다.
“연회에 갈 건데 드레스가 더러워지면 안 되잖아.”
포넨트가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닭살 떨 거면 다른 곳에 가서 해.”
나는 투덜거리는 그를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너는 뭐가 문제니?”
그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뭐야. 왜 저래. 미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