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키네시아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변했다고?”
“그래.”
몸을 돌려 걷자 그녀가 나를 따라왔다.
“어떻게 변했는데?”
“나랑 생각하는 게 비슷해졌어.”
“……고마워.”
의외의 말에 고개를 돌려 키네시아를 봤다.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왜 그렇게 좋아해?”
“칭찬한 거 아니야?”
그게 칭찬인가? 그런 의문을 품었다가 냉큼 정신을 차렸다.
그렇지. 칭찬이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와 생각이 비슷해졌다는 게 칭찬이 아니면 뭐겠어.
고개를 끄덕이는데 발끝만 보며 걷던 키네시아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사실 조금 불안했어.”
“뭐가.”
“폐하가 아이들을 신경 쓰고 플로레타를 걱정하는 게. 아버지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뭘 이야기하는지 알겠다.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일을 그르칠까 봐?”
“그르칠 정도는 아니고, 그냥. 예전의 나처럼 이성적인 판단을 못 내릴까 봐.”
“내 나이가 몇인데. 햇병아리였던 너랑 같니?”
코웃음을 치자 그제야 키네시아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약한 두려움이 걷혔다.
“그렇지? 이라네는 이라네니까.”
“무슨 의미야.”
“당연히 폭,”
“폭군이라고 하면 이마에 혹으로 탑 쌓을 줄 알아.”
“…….”
***
네페르트 부인은 반란의 주동자로, 사형이 두려워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 외에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게텔린 때와는 달리 키네시아는 사형 집행을 참관했다.
룩소르와 오틸리에는 극구 말렸지만 키네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아버지 뒤를 이어야 할 텐데, 좋은 모습만 보고 살 순 없잖아요.”
두 사람은 큰딸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슬쩍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는 제 부모와 달리 키네시아는 내려와서 구역질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집행이 끝날 때까지 형장을 응시했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의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했고, 향후 100년간 작위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막바지에 반란군을 배신한, 카랄드 백작과 같은 이들은 마찬가지로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방되었으나 목숨만은 부지했다.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었을 즈음이었다.
파라돈과 레튜니아에서 각자의 사절단이 가진 마법 전서구를 통해 순간 이동 마법진을 사용해 에피파네스의 수도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허락하자마자 가장 먼저 넘어온 것은 파라돈의 황태자인 페라포네 카텔라코였다.
호위 두 명, 시종 여섯 명을 데리고 온 그녀는 궁전으로 들어서자마자 제 오빠인 요르고스부터 찾았다.
“하도 자기가 가겠다고 난리를 부리길래 대단한 보물이라도 숨겨 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오만한 눈으로 요르고스가 묵는 방을 훑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이것저것 툭툭 건드리고 들춰 보았다.
요르고스는 벌떡 일어나 페라포네의 손에 들린 잉크병을 빼앗아 내려놓았다.
“앉아서 얘기하지?”
페라포네가 요르고스의 어깨를 툭 치고 스쳐 지나가 상석을 꿰찼다.
요르고스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말아 쥐면서도 페라포네의 대각선 옆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페라포네는 그런 제 오빠를 가볍게 비웃고 눈짓으로 차를 가져오게 했다.
“요르고스. 너는 여기 있으면서 성녀가 태어나는 것도 모르고 뭐 했니?”
페라포네가 하인이 따라 준 차를 마시며 숨 쉬듯 자연스럽게 요르고스를 멸시했다.
“오빠가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까 장자씩이나 되어서도 내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긴 거야. 한심하기는.”
“너 말 다 했어?”
참다못한 요르고스가 탁자를 거세게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 충격에 찻물이 이리저리 튀자 페라포네가 손을 휘저어 찻잔을 엎었다.
요르고스의 하인이 찻물을 닦으러 다가오자 페라포네는 하인의 볼을 내리쳤다.
짝!
거대한 마찰음이 방 안을 울리고, 맞은 하인이 옆으로 넘어지며 나뒹굴었다. 페라포네는 구두코로 쓰러진 하인을 툭, 툭, 건드렸다.
“너는 주인이 저렇게 품위 없어질 때까지 뭘 했니?”
“죄, 죄송합니다, 전하.”
“뭐가 죄송한데?”
페라포네가 초록색 눈동자를 악독하게 빛내며 미소 지었다. 하인은 요르고스의 눈치를 살폈다.
페라포네의 분노를 피하려면 그를 제대로 모시지 못해 요르고스의 품위가 없어진 것이라고 대답해야 했다. 공개적으로 요르고스를 모욕해야 하는 것이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페라포네가 다시 손을 들었다.
요르고스가 그 손목을 잡아챘다.
“그만해!”
“소리 좀 지르지 마, 요르고스. 너는 아직도 이게 왜 맞았는지 모르겠니?”
페라포네가 눈짓으로 하인을 가리키자 요르고스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요르고스의 손을 떨쳐 내고 조용해진 그에게 앉으라고 눈짓했다.
분노에 치를 떨면서도 요르고스는 자리에 앉았다.
“듣자 하니 에피파네스의 국왕이 군사를 제법 키웠다는 것 같은데.”
“…….”
“동맹을 맺으면 화살받이 정도로는 쓸 수 있겠어.”
“……너, 진짜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야?”
“그렇다면?”
“어차피 일으킬 전쟁, 뭐 하러 지금까지 미뤄 뒀는데? 그냥 처음부터 에피파네스를 밀어내고 레튜니아를 침략했으면 됐잖아.”
그러면 키네시아와의 관계가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것이다. 망국의 왕족이 되어 제 손에 들어오면 지금처럼 괜한 열등감으로 미움을 사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
요르고스가 주먹을 움켜쥐며 씩씩거리자 페라포네가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한탄하듯 제 오빠의 이름을 연달아 불렀다.
“요르고스, 요르고스. 넌 어쩜 그렇게 멍청하니?”
“뭐?”
“길을 내겠다고 에피파네스를 침공하면 우리의 국력은 반드시 손상돼. 레튜니아가 약한 나라도 아니고, 전력 손실이 있는 채로 레튜니아와 부딪히면 당하는 건 우리야. 그건 레튜니아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서로 눈치만 보면서 이 조그만 나라를 완충지로 둔 것 아니니.”
“그럼 지금은,”
“에피파네스 국왕이 군사를 키운 걸 봐. 야망이 생긴 거겠지. 게다가 공주가 성녀로 발현했으니 주변국이 함부로 하지 못할 테고. 이럴 때 잘 구슬려서 우리 쪽에 붙게 해야지. 그러면 아미르 공국도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에피파네스만 가지면 레튜니아를 침략할 수 있어.”
“……결혼 동맹을 제안할 거야?”
“맞아.”
요르고스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얼굴을 폈다.
“내가 할게. 결혼.”
“네가?”
페라포네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첫째는 후계자고, 셋째는 성녀에, 넷째는 아미르의 약혼녀인데 누구랑 결혼하려고? 왕자라도 취하려고?”
요르고스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부마로 들어가면 되잖아. 내가. 에피파네스로.”
페라포네가 잠시 요르고스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 요르고스. 네가 이제 주제 파악 좀 하는구나? 그래. 네 배포에는 이렇게 조그만 곳이 제격이지. 파라돈은 내게 맡기고 너는 여기서 왕 놀이라도 하렴.”
“이건 폐하께서도 허락하신 거야?”
“아니. 하지만 상관없어.”
페라포네가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미소 지었다.
“곧 그렇게 될 테니.”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요르고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인이 다시 차를 내어 왔지만 페라포네는 입도 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요르고스의 뒤로 다가가 그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에 실린 무게가 그의 온몸을 짓누르는듯했다.
“어쨌거나, 네가 무사한 걸 확인하게 되어 유감이었어, 요르고스. 그럼 나는 에피파네스의 왕실과 의견 조율을 해야 하니, 이만.”
페라포네가 나가는 문소리를 듣자마자 요르고스는 몸에 힘을 풀었다.
그는 몸을 수그려 손바닥에 이마를 묻었다.
‘페라포네. 그 사악한 게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키네시아만 내 손에 떨어진다면…….’
요르고스는 생각을 끊어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
번쩍거리던 놈들이 사라진 곳에는 금세 다른 놈들이 들어찼다. 네페르트 부인이 반란을 모의하는 동안 하먼 재상과 꼬질이들, 키네시아가 사람을 물색해 놓은 덕이었다.
덕분에 회의는 평소와 달리 활발했다.
나는 팔걸이에 팔을 세워 턱을 괴고 둘러앉은 이들의 작위를 하나씩 떠올려 보다가, 회의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섰을 때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앉아 있는 자들이 바싹 긴장한 게 느껴졌다.
찔리는 것도 없는 것들이 왜 저렇게 굳어 있어?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룩소르에게 말했다.
“예산이 부족해서 중지했던 토너먼트 대회와 사냥 대회, 군 기술 대회를 부활시켰으면 하는데.”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은 흘러나왔다.
하먼 재상이 내 말에 동의했다.
“몇 년간 종자로만 있었던 자들에게 기사가 될 기회를 열어 주고 인재를 뽑을 수 있을 겁니다.”
“맞아. 더불어 주기적으로 대회를 열면 기사들 사기에도 도움이 돼.”
룩소르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마자 나는 다음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공을 세운 자들에게 새 작위를 내리는 게 어때?”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또 아니다 뭐다 거절할 게 뻔해 미리 눈짓으로 그들의 입을 막았다.
키네시아가 내 말을 거들었다.
“셰피오 자작에게는 백작 작위를 내리시는 게 어떨까요?”
“그렇지. 그 정도는 되어야지.”
“저는, 지금 작위에도 만족합니다.”
반겔레스 셰피오가 또 겸양을 떨었다. 물론 진심이겠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둘 순 없었다.
“총사령관이 될 텐데 기사단장보다 직위가 낮아선 안 되지.”
룩소르가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긍정했다.
국왕이 그렇게 말하자 반겔레스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작위는 오늘 저녁에 있을 연회에서 수여하겠소.”
룩소르의 말에도 꼬질이들은 기뻐하는 기색 없이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나는 삐딱하게 앉아 그들에게 물었다.
“뭐야? 뭐가 불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