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내가 성질을 내든 말든 룩소르는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 어린애를 따스하게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진짜 저놈의 자식. 왕만 아니었어도, 아니, 키네시아가 보고 있지만 않았어도 한 대 콱 쥐어박아 주는 건데.
손이 근질거려 쥐었다 폈다만 하고 있는데 키네시아가 샛길로 빠졌던 화제를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
“하지만 레바나 신전을 용서하는 것과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일이라고 생각해요.”
키네시아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물기가 어려 있었으나 어조는 지극히 침착하고 이성적이었다.
“레바나 대신관이 원하는 대로 해 주면 어떨까요?”
나와 룩소르는 동시에 키네시아를 보았다.
키네시아는 목을 가다듬은 뒤 숨을 길게 내쉬어 남은 물기를 지워 냈다.
“반란에 가담했다는 증거도 없고 신전을 뒤질 수도 없으니까, 로라에게 레바나 신전으로 들어가서 약점을 알아내 와 달라고 하는 거예요.”
룩소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슬쩍 나를 보았다. 불퉁한 표정을 짓자 룩소르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애매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찌푸린 미간 때문에, 그의 표정은 웃는 듯 마는 듯 해 보였다.
“리아 같은 말을 하는구나.”
룩소르의 말이 칭찬처럼 들렸는지 키네시아가 눈을 크게 뜨며 기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아르만을 이용한다고 나한테 뭐라고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지?”
안 그래도 울어서 발간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그건 어렸을 때잖아.”
“누가 뭐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키네시아의 눈에서 반짝거림이 사라졌다.
나는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괬다.
확실히, 키네시아의 방법은 최선이다.
성녀는 자가 치유 능력이 있다. 독도, 물리적인 공격도 어지간하면 통하지 않는다.
신의 가호를 받기에 불길한 일은 빗겨 나간다.
무엇보다 레바나의 대신관은 성녀를 대외적으로 내세워 세력을 키울 생각이니 플로레타를 홀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아는데도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 순수하고 겁 많은 아이를 레바나로 보내야 하다니.
“나는 내키지 않는데.”
내가 말을 하자마자 룩소르가 제 걱정을 토로했다.
“나도 걱정스럽구나. 키네샤, 네 말대로 하면 플로레타는 계속 레바나의 성녀로 살아야 하지 않느냐. 레바나와 플로레타도 운명을 같이해야 할 게다.”
룩소르가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했다.
플로레타가 레바나의 성녀가 되면 레바나 교를 내쫓거나 몰락시키기 힘들어진다. 레바나 교가 무너지면 플로레타 역시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로레타가 레바나만의 성녀가 아니면 돼.”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라는 신앙심이 없는 아이잖아요. 자신이 누구에게 기도했는지도 모를 거예요.”
“그러니 자신의 교단을 찾기 위해 신전 두 곳에 차례대로 머물러 보겠다고 하면 돼. 그걸 레바나 대신관이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가 관건인데,”
“제안해서 나쁜 일은 없을 거예요.”
잠시 끊어진 내 말을 키네시아가 바로 이었다. 그리고 잔잔하지만 자신감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맞는 말이다. 다 맞는 말인데…….
“플로레타가 약점을 알아 올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들은 이야기나 나눈 대화를 알려 달라 그러면 돼. 아주 작은 단서면 나머지는 추론할 수 있지 않을까? 이라네 네가 있잖아. 나도 도울 거고.”
키네시아가 또 맞는 말을 해 사람 말문을 막았다.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항상 이것저것 궁금해하던 애가 이제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이상만을 바라보던 눈은 현실을 파헤칠 수 있게 되었다.
나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분명 기특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내 삶에 회의감이 들어서일까?
왕세자가 될 당시,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가장 먼저 끊어 냈다. 가족 간의 정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 나도 율시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게 이렇게 후회가 되는데 만일 키네시아가 가족을 잃는다면 얼마나 큰 절망을 느낄지 걱정스러웠다.
“플로레타가 싫다고 하면 어쩔 거야?”
예전의 나라면 회유를 하든 설득을 하든 플로레타를 레바나 신전으로 밀어 넣었을 것이다.
만일 키네시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키네시아는 완전히 나처럼 생각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로라가 싫다고 하면 절대 강요하지 않을 거야. 나도 로라에게 강요하거나 로라를 위험에 빠트리긴 싫어.”
그렇게 말한 키네시아는 고개를 돌려 바로 룩소르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플로레타와 이야기 나눠 보는 게 어떨까요?”
“그러자꾸나.”
룩소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키네시아도 그를 따라 집무실을 나와 플로레타의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플로레타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빠!”
룩소스를 반기던 그녀의 시선이 키네시아에게 닿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플로레타는 나를 보더니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키네시아랑, 리아도?”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탁자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턱을 괴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걸 듣다가 본격적인 수다로 번지기 전에 끼어들었다.
“혹시 발현하던 날 정확하게 기억해?”
“응!”
플로레타가 자신 있게 대답했다가 과거를 떠올리듯 눈을 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표정이 점점 오묘해지더니 애매한 대답이 한 번 더 이어졌다.
“으, 으응?”
“기억나? 전하를 치료할 때 어떤 신에게 기도했어?”
다시 묻자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축 처졌다.
“잘 모르겠어. 사실 기절한 것까지만 선명하고, 그 뒤에 어떤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신의 이름은 다 한 번씩 불렀거든? 그래서 누구한테 기도했다기엔 좀 애매해…….”
나와 키네시아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플로레타는 이런 걸 왜 묻는지 궁금해하는 눈으로 나와 키네시아를 보았다.
룩소르의 시선 역시 나와 키네시아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누구에게서 설명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키네시아가 나서서 플로레타에게 방금 있었던 이야기를 전했다.
대신관이 한 말부터, 키네시아가 본 것까지. 대화가 진행될수록 플로레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럼 대신관이 아버지를…….”
플로레타가 떨리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끝을 흐리자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떡, 어쩌면 좋아?”
“그래서 말인데, 로라. 네가 레바나 신전으로 가 줄 수 있을까?”
플로레타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내, 내가?”
“응. 그냥 가서 신전 내부에서 도는 이야기만 전달해 주면 돼.”
“나, 나는, 나는…….”
키네시아가 플로레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무섭거나 거리끼면 안 해도 돼. 다른 방법은 찾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 이라네?”
아니, 잘 가다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혀를 차면서도 고개를 끄덕이자 키네시아가 미소 지었다.
플로레타는 룩소르, 키네시아, 그리고 나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더니 키네시아와 맞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나도 돕고 싶은데, 사실 해야 할 일이 있어.”
“해야 할 일?”
내 물음에 플로레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신성력을 쓴 뒤부터 자꾸 이상한 게 느껴져. 뭐를 자꾸 바로 세우라는 소리도 들리고…….”
나는 저 증상을 잘 알고 있었다.
“계시야.”
“계시?”
“그래. 성자들은 처음 신성력이 발현되면 그런 느낌을 받는댔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장 해야 할 것 같은 강렬한 생각이 든다더라.”
“맞아! 지금 딱 그래……. 리아는 어쩜 그렇게 잘 알아?”
……떠올리기 껄끄러운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머리를 저어 그 얼굴을 떨쳐 내고 키네시아를 보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양쪽 신전에는 가 봐야 하니까……. 혹시 뭐라도 들으면 꼭 알려 줄게, 키네샤!”
“응. 로라. 그래도 위험할 것 같은 일은 하지 말고.”
“응…….”
키네시아는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제 동생을 꼭 끌어안아 주고 나를 쳐다봤다.
뭐야. 왜 또 나를 봐?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데 키네시아가 생각에 잠기는가 하더니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소피아와 아이들을 신전에 들여보내는 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레바나 대신관이 내가 사용하는 정보상을 습격했어.”
한 마디만 말했을 뿐인데도 키네시아는 내 말뜻을 이해했다.
“연막 없이 정보원을 움직이면 발각될 가능성이 커져서 그런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네시아가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플로레타를 보았다.
그 시선에 조금 민망해졌다. 할 이야기도 끝났으니 방으로 돌아가 볼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끝맺었다.
“레바나 신관의 약점을 잡을 방법은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어. 그러니까 너희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는 거에 집중해. 몸도 잘 챙기고.”
플로레타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고 방을 나섰다. 등 뒤로 발소리가 따라왔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키네시아였다.
키네시아는 방에서와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열었다.
“플로레타를 레바나에 보내는 걸 반대한 것도 그렇고, 정보원들을 쓰지 않겠다고 한 것도 그렇고. 걱정되어서 그런 거지?”
“걱정은 누가 걱정을 한다 그래?”
“정든 거잖아.”
키네시아가 미소 지었다.
분명 웃는 얼굴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폐하. 변했구나…….”
작은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 공기를 차고 귓가를 스쳤다.
나는 나와 꼭 닮은 황금색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변한 건 너도 마찬가지야. 키네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