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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99화 (99/151)

<99화>

***

“조사해 봤는데 네페르트 부인과 마지막으로 만난 병사가 레바나의 신도라고 하더구나.”

“네페르트 부인의 동생이 파라돈에 있으니 레바나 대신관이 그를 인질로 협박을 했을 수도 있겠네요.”

파라돈과 레튜니아에는 샤마흐 신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서인지, 레바나 교의 영향력이 더 강했다.

유일한 증인을 처리하고 키네시아의 말대로 사람을 시켜 후작 부인에게 협박의 말을 전하게 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을 유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병사는 아무 짓도 안 했다고 했겠지.”

룩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식사만 전달하고 왔다더구나.”

종교를 상대하는 건 이런 게 까다롭다.

이해관계나 논리적인 이유를 전혀 따지지 않고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도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레바나의 대신관은 절대 선이다.

네페르트 부인이 저를 모함하려 하니 경고의 말을 전해 달라는 둥, 대충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 들이밀어도 맹신하며 비밀을 지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광적인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고문 같은 것도 통하지 않았다.

차라리 공범들이 반란 계획이나 공모자들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면 네페르트 후작 부인도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리지 않았을 텐데.

정보가 새어 나갈까 지나치게 조심했던 게 오히려 그녀의 목을 죈 것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키네시아가 입을 열었다.

“분명 그게 다가 아닐 거예요. 고문이라도…….”

나는 키네시아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경악한 표정인 건 룩소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자신이 말을 꺼내 놓고도 매우 불쾌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철회하진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룩소르를 보았다.

그는 내가 사람을 죽여서 처리한다고 했을 때 기겁을 했던 전적이 있었다.

그러나 키네시아가 성인이여서 그런지 아니면 몇 년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인지, 놀란 표정만 할 뿐 말리는 기색은 없었다. 다만 굳은 얼굴로 땅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키네시아. 이 일은 해도 내가 하마. 너는, 아직은……. 아직은 그러지 말아라. 그런 생각 말아.”

“아버지…….”

훈훈하고도 엄중한 분위기에 잠시 눈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굳이 직접 할 필요 있어? 잘하는 사람을 쓰면 되지.”

그 말에 룩소르와 키네시아가 슬그머니 손을 놓았다. 그제야 분위기가 좀 편안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고문을 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지만, 해도 별 소용없을걸. 원래 그런 놈들은 잘 안 불어.”

“……그건 해 봐야 알지 않겠느냐?”

나는 턱짓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전하는 저게 홍차인지 흙탕물인지 마셔 봐야 알아? 딱 보면 견적이 나오지. 내가 그런 걸 한두 놈 본 것도 아니고.”

룩소르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리아야. 너는 저런 놈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단다…….”

룩소르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내 말을 부정했다.

나는 코웃음을 치고 그를 보았다. 죽을 것처럼 골골거릴 때 내가 제 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혹시 기억 못 하는 건가?

빤히 보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룩소르가 허락하자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레바나의 대신관이 알현을 요청했습니다.”

룩소르가 나를 보려다가 눈을 부릅뜨고 시선을 문에다 고정했다. 나에게 습관처럼 기대던 것을 조심하려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들라 하게.”

룩소르가 제법 근엄한 목소리로 허락하자 문이 열렸다. 레바나의 대신관이 안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에 걸쳤다.

“전하. 쾌차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걱정해 주어 고맙소, 대신관.”

형식적인 대화가 오가는 사이 나는 키네시아 쪽을 보았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대신관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언뜻 보면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표정이었으나, 그녀의 손은 치마에 깊은 주름이 생길 정도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탁자 밑으로 발을 뻗어 키네시아의 구두코를 톡 쳤다.

그러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눈짓으로 힘이 들어간 주먹을 가리키자 그녀가 치맛자락을 놓고 제 양손을 꼭 맞잡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대신관과 룩소르의 대화는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플로레타 공주님을 레바나에 입적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샤마흐 교에서 발현을 했는데 어떻게 레바나에 입적을 시켜?

황당해하고 있는데 키네시아가 내 생각과 똑같은 말을 했다.

“지금 로라를 레바나의 성녀로 들이겠다고 하시는 건가요? 그 애는 샤마흐의 신전에서 발현했어요.”

“어디에서 발현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발현할 때 어떤 신을 찾았느냐입니다. 플로레타 공주님은 평소에 레바나 신전에서 봉사하지 않으셨습니까? 공주님과 더 가까운 것은 레바나 이십니다.”

“하지만 이미 샤마흐에서 성녀의 탄생을 공표했는데 저희가 그것을 뒤집을 순 없어요.”

“성녀의 탄생은 긍정했지만 그 성녀가 샤마흐 교의 성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성녀의 탄생을 알려도 된다고 했더니 진짜 알리기만 했나 보다. 신관이라는 놈들은 입에 넣어 줘도 삼키질 못한다니까.

이해 못할 건 아니다.

레바나의 대신관처럼 탐욕에 눈이 돌아 있는 게 아니라면, 원래 신관은 사적인 이득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아직 플로레타를 만나 보지 않았으니 제 교단의 성녀라고 섣불리 인정하지 않은 거겠지.

샤마흐 교가 성녀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것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누군가와는 달리 말이다.

그래도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행동하니 쌤통이긴 했다.

내가 미소를 감추고 있는 와중에도 룩소르의 침음은 이어졌다.

대신관이 고민하는 룩소르를 살피다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파라돈의 황태자가 된 페라포네 카텔라코 황녀는 굉장히 과격합니다. 더불어 레튜니아는 후계자 싸움으로 혼란하니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나는 레바나의 대신관이 말에 숨은 속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플로레타를 주면 에피파네스를 보호해 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대신관은 인자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여간 속이 시커멓기는. 역시 신관보다는 정치인이 잘 어울리는 놈이다.

룩소르는 고민하다가 나를 보았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거나 눈빛을 보내기도 전에 다시 대신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당사자의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 상의해 보고 말씀드리겠소.”

“……부디 현명한 판단 내리시길 바라겠습니다.”

대신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우리는 침묵했다. 평소라면 벌써 의견을 물었을 룩소르는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언제까지 모든 선택을 대신해 줄 순 없기에 나도 룩소르가 혼자 고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오래도록 침묵했고, 고요함을 깨트린 것은 키네시아였다.

“저는 레바나의 대신관을 용서할 수 없어요.”

키네시아의 눈동자에는 뜨겁고 거센 분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깍지 낀 손은, 얼마나 힘을 준 건지 손마디가 새하얗게 보일 정도였다.

“어제저녁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대신관의 말이 갑자기 날뛴 곳을 가 봤어요. 그 자리에 피가 떨어져 있더라고요.”

이를 악물었다가 말을 잇는 키네시아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고의로 말을 찔러서 날뛰게 한 거예요. 도착 시간을 늦추려고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아니, 플로레타가 성녀로 발현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키네시아가 차마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룩소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키네시아의 곁으로 갔다.

그는 이제 장성한 제 딸을 품에 안고 다독였다.

“많이 무서웠겠구나, 우리 딸.”

키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제 아버지의 옷에 매달려 조용히 흐느꼈다. 그는 키네시아가 편안히 울도록 한동안 품을 빌려 주었다.

룩소르는 조금만 무서워도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신경 줄을 가진 주제에 키네시아가 쏟아 내는 두려움은 전부 받아 냈다.

흐느낌이 잦아들고, 키네시아가 룩소르의 품을 벗어났다.

룩소르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제 딸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 주었다.

“아직 아기구나, 아기야.”

키네시아는 조금 민망해하는 것 같았으나 룩소르의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제 아빠를 올려다보는 얼굴에는 신뢰와 애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잘못한 것을 들킨 아이처럼 안색을 붉히며 후다닥 눈물 자국을 닦아 내 버렸다.

반면에 룩소르는 나를 향해 양팔을 넓게 벌렸다.

“우리 막내도 이리 오려무나.”

“아니, 나는 됐…….”

거절하기도 전에 룩소르가 냉큼 와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 막내 공주, 고맙다.”

딸 아니래도. 어색하게 굳어 있다가 룩소르의 품을 벗어났다.

그의 미소에는 미안함과 흐뭇함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괜히 민망해 그 얼굴을 밀어냈다.

“왜 그렇게 봐?”

“미안해서 그렇지. 내가 가장 어린 너에게 항상 짐을 지우는구나.”

“안 어린데.”

“그래. 다 컸지, 우리 딸…….”

룩소르가 별안간 울컥한 표정으로 코를 훌쩍이더니 나를 한 번 더 끌어안으려는지 팔을 뻗었다.

“얼마나 심적 부담이 컸으면 자기를 폭군이라고 생각하면서까지 이 아비를 도우려 했을까.”

“뭐?”

어이가 없어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니야.”

“그래. 그래. 이 아빠는 다 안단다. 어렸을 땐 원래 자기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는 법이다. 상상력이 풍부하니.”

“그거 아니야.”

“나라가 안정되면 괜찮아질 테니 너무 혼란스러워하지 말려무나, 우리 딸. 다 커서 다시 떠올리면 좀 창피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다 추억이 될 게다.”

“아니, 그런 거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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