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신관은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입만 열려고 하면 신성력이 흐려졌다.
“끄응…….”
그는 결국 앓는 소리만 내며 떴던 눈까지 감고 집중했다. 로즈라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럼 우린 여기서 안녕인가요?”
“그래. 잘 숨어 있어.”
“별걱정을 다 하세요.”
그녀가 쌩쌩해진 얼굴로 미소 지으며 속닥거렸다.
“가능하면 레바나 교 좀 빨리 치워 주시고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네. 워낙 독사 같은 노인네라. 그냥 요양한다고 생각하고 푹 쉬어.”
샤마흐 신관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저희도 먹고는 살아야죠. 레바나가 사라져야 다시 나올 수 있는데……. 공주님이 아니면 누가 레바나를 상대하겠어요?”
“그렇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신성력이 자꾸 흐려졌다 짙어졌다 하는 게 보였다. 결국 샤마흐 신관이 참지 못하고 눈을 번쩍 떴다.
“아무리 다른 교단이라 해도 그렇지, 그게, 그게 신관 앞에서 하실 말씀이십니까? 오늘도 그렇습니다. 도대체 이 시간에 신전에 쳐들어오시는 게…….”
“으윽, 신관님. 저 죽어요.”
“아! 죄송합니다. 치료 중에 제가 그만…….”
엄살로 신관의 주의를 끈 로즈라가 내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로그리예의 옷을 툭툭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가 나를 안아 들고 그대로 달려 담을 훌쩍 넘었다.
마음의 준비를 한 덕인지 다행히 아까처럼 볼썽사나운 꼴은 면했다.
안도하며 내려가려는데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로그리예가 신전 밖으로 나온 후에도 나를 내려놓지 않은 탓이었다.
“두 번 해 보니까 안 무섭지?”
“아까도 안 무서웠어. 그냥 놀랐던 거지.”
로그리예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얘는 팔도 안 아프나?
나는 여전히 그의 팔뚝에 걸터앉은 채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는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 주고 대신 손을 꼭 맞잡았다.
“광장까지 걸어가야겠다.”
“그래야지. 말을 버릴 수는 없으니까.”
그의 말에 동의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늦은 새벽, 선명해진 달빛에 새하얀 입김이 섞여 들었다. 바람이 유난히 차가워 손에 잡은 온기가 더 따듯하게 느껴졌다.
묘한 감상에 젖어 있는데 로그리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느낌이야.”
청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달빛 아래에서도 선명한 그 빛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오늘은 단 한 번도 그의 눈을 보며 라파일을 떠올리지 않았다는 것을.
‘무서운 놈.’
애정을 느껴 보라고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람 마음을 이렇게 들쑤시다니.
하지만 나는 뒤숭숭한 마음을 익숙하게 외면했다.
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언젠가 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시선을 피해 어두운 길을 바라봤다.
“너, 6년 전에 한 말 기억해?”
“응? 어떤 말?”
“너와 약혼하면 알려 준다고 했던 거.”
로그리예가 잠깐 멈칫했다가 시치미를 뗐다.
“그을쎄? 모르겠는데.”
그가 말을 늘이며 슬쩍 내 시선을 피했다. 빤히 응시하자 그가 입술을 삐죽였다.
“자기는 이런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꼭 그런 말을 해야겠어? 나 정말 속상해.”
“안 통해.”
로그리예가 입술을 집어넣고 겸연쩍게 웃었다.
걸음은 착실하게 광장을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말을 꺼낼까, 싶은 마음에 그를 쳐다보면 그는 눈을 맞추고 생긋 웃었다.
시간을 끌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이대로 유야무야 넘기려는 것이었다.
어쭈? 저게 예쁘면 봐줄 줄 아나? 어디서 수작을 부려.
“안 통한다고.”
“힝.”
“힝은 무슨. 빨리 안 불어?”
로그리예가 시선을 내리깔고 더 걷다가 입을 열었다.
“공주님이 어렸을 때 좀 특이한 시종이 있었어. 이름도 얼굴도 생각이 안 나는데 하나는 기억나. 공주님을 보는 시선이 섬뜩했다는 거.”
그가 기억을 더듬듯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공주님을 끔찍하게 생각했지. 정원에서 놀다가 가시에 찔리기라도 하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안아 들고 뛰었으니까.”
그 행동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혹시 그 사람 손등에…….”
“보라색 태양 문양이 있었어.”
내가 끝맺지 못한 말을 로그리예가 이었다.
“그 사람이 데려가서 연고를 발라 주면 신기하게도 상처가 싹 나아 있었어.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고.”
팔뚝에서 시작된 소름이 목덜미를 타고 올랐다. 뼈에 스미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로그리예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나를 향했다. 나는 청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지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봤다.
그가 내 머리를 끌어 제 가슴에 기대게 하고 내 등을 토닥였다.
“그 시종은, 어떻게 됐는데?”
“돌연 사라졌어. 공주님이 3살쯤 됐을 때, 정원에서 혼자 놀고 있는 공주님을 그가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하는 걸 내가 발견했거든. 그 뒤로 본 적이 없어.”
라파일은 단순히 적당한 아이를 골라 나를 집어넣은 게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라네리아 공주의 몸을 노리고 있었다.
왜 하필 이 몸이었을까? 공주가 한 명만 있던 것도 아닌데……?
뿌옇게 낀 의문을 뚫고 로그리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는 건 이게 다야.”
“…….”
일단 로그리예를 밀어 내고 다시 걸었다.
시종이 사라진 때와 레그레시오가 북서 대륙에서 부흥하기 시작한 때가 겹친다.
로그리예의 말과 상황을 연결해 봤을 때, 그는 이라네리아 공주를 납치하려다 실패하고 북서 대륙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어쩐지. 남동 대륙을 뒤져도 나오는 게 없더라니만.’
대부분의 활동이 북서 대륙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나란히 걷는 발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로그리예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라파일의 수작으로 피까지 토했다. 로그리예가 계속 내 곁에 있는 한 라파일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를 황제로 만들겠다고 했으니 왕위를 차지하고 있는 룩소르는 물론, 그가 없을 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오틸리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키네시아와 포넨트 역시 위험해질 것이다.
‘이젠 정말 성불할 때가 온 거야.’
벌써 햇수로 7년이니 많이 차지하고 있었지.
대륙을 건너가 라파일이 진행한 실험의 실체를 확인하고, 가능한 다시는 불러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내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라파일이 후손 놈들이나 로그리예를 건들 이유가 사라질 테니까.
에피파네스의 사정이 조금 걱정이긴 하지만 재산은 이제 충분하고 군사력도 기초를 다져 두었다.
레바나만 처리하면 주변국들도 성녀의 고향을 함부로 하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레바나 대신관의 목줄을 틀어쥘 방법은 북서 대륙에 있다.
‘한번 가긴 해야겠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 전에 나라를 정비해 놓고, 키네시아와 한 약속도 한 번 더 확인을 받고…….
“공주님.”
로그리예의 목소리가 생각을 끊어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 안색을 살폈다.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쉽긴 하다. 후손 놈들하고 지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는데.
하지만 미련은 없다. 이 삶은 내 것이 아니니까.
내 옆에서 나란히 걷는 어린것에게 품은 호감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닌데?”
얼굴을 들이미는 놈의 이마에 딱밤을 때려 주고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가서 말이나 가져와.”
로그리예가 투덜거리며 가로수에 묶어 놓은 말을 가져오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가 돌아오기 전에 심란함을 얼굴에서 지웠다.
말을 타고 온 로그리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겹쳐 맞잡자 그가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 올렸다.
나는 그의 뒤에 올라타 망토를 붙잡았다.
로그리예가 내 손을 떼어 내 제 허리에 감고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로그리예.”
“응?”
“만약에 내가 갑자기 기억을 잃거나 다른 사람처럼 굴면…….”
“응.”
“우리 약혼은 없던 거로 해.”
“뭐?”
로그리예가 말을 멈추려고 했다. 나는 발로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차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기억이 없는데 갑자기 약혼자가 있다고 하면 당황스러울 거 아니야.”
“보통은 기억을 잃을 거라는 가정을 안 하지 않아?”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했잖아. 만약에. 아주 만약에.”
“…….”
로그리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몸 주인이 로그리예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게다가 키네시아와 떠나기 전에 파혼할 명분 하나는 만들어 놓고 가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단단한 등을 이마로 톡톡 치며 대답을 종용해 봐도 로그리예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다시 꼬셔서 약혼하든가.”
이 정도는 키네시아도 봐 주겠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왜, 자신 없니?”
“공주님은 내가 그런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바본 줄 알아?”
“바보 해. 명령이야.”
무슨 생각인 건지, 앞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의외로 흔쾌하게 수락했다.
“공주님이 그러라면 그래야지.”
“그래. 착하다.”
내 말을 끝으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눈에 스치는 바람이 시리다. 뜨고 있기 버거워 로그리예의 따뜻하고 단단한 등에 이마를 기댔다.
요람에 누운 것처럼 흔들리는 몸과 긴 침묵을 견디고 있으려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로그리예의 약속을 받아 낸 것으로 성불에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잠에 빨려 들어가는데 희미하게 로그리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억 상실이라니. 그런 일을 안 만들면 되는 거잖아?”
그게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는데, 의지와 다르게 의식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