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얘는 왜 아는 척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해? 사람 놀라게.
하마터면 저번에 같이 왔을 때 나를 걱정한 게 로즈라의 방에 같이 들어가려고 수작 부린 거라고 오해할 뻔했잖아.
눈을 가늘게 뜨고 싸늘하게 식은 눈빛을 로그리예에게 보내는데 로즈라의 대답이 들렸다.
“공주님이 저를 이용하신다는 걸 안 모양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레바나 교에 대한 정보는 넘긴 적이 없어서 조금 억울하네요.”
“그러게. 괜히 애먼 사람을 잡고 난리야.”
로즈라의 표정이 뽀로통하게 변했다.
“일부러 감추지도 않고 드나들어 놓으시고는. 공주님들이 키운 정보원들을 편하게 운용하시려고 그러신 것 누가 모를 줄 아나요?”
뜨끔해 괜히 먼 산을 바라봤다. 시선이 너무 뜨거워 볼이 따끔거릴 정도였다.
옆에 있던 로그리예가 웃음을 참으며 손을 들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로즈라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의 노력 덕에 볼이 좀 덜 따가운 것 같았지만, 레바나 대신관에게 당했다는 게 새삼 떠올라 혈압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누가 머리채를 뒤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뒷목이 뻣뻣해 눈을 지그시 감고 화를 다스렸다.
“미안하게 됐어.”
“제가 다치는 게 계획에 있었나요?”
고개를 젓자 로즈라가 뾰족한 시선을 거뒀다.
“그럼 됐어요.”
의심이나 앙금 같은 것은 남지 않은, 시원스러운 목소리였다.
“제가 남아 있던 건 공주님께 알려 드릴 게 있어서예요. 공주님이라면 대신관과의 마찰 후에 바로 저를 찾아오실 것 같았거든요.”
“레바나 대신관이 너를 습격했다는 걸 알려 주려고?”
“그런 것도 있고, 겸사겸사 새로 알게 된 것도 알려 드리고 가려고요.”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복부를 움켜잡았다.
누가 봐도 고통을 참는 듯한 모습에 양심이 따끔거렸다. 항상 내 양심의 안부를 걱정하던 키네시아가 알면 반가워할 일이었다.
나는 로즈라가 말을 잇기 전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가까이에서 보니 붉은 머리카락이 식은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돌아다닐 정도면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닌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심하게 아파 보였다.
그러면서도 로즈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었다.
“왜 그러세요, 공주님?”
나는 그녀의 후드를 벗겨 내 어깨에 걸쳤다.
옆에서 로그리예가 중얼거렸다.
“강탈?”
그의 말을 무시하고 후드를 깊게 눌러 쓰며 로즈라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로그리예. 업어.”
“네?”
명령은 로그리예에게 했는데 되묻는 건 로즈라였다.
정작 로그리예는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보이며 물었다.
“샤마흐 신전으로 가게?”
나는 로그리예의 망토를 풀어 팔에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로즈라를 로그리예의 등에 얹었다.
로즈라는 놀란 표정으로 로그리예를 밀어 내려다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츠렸다.
나는 망토를 로그리예의 머리 위로 뒤집어씌워 끝을 턱 밑에 둘러 묶었다.
긴 망토가 등 뒤로 늘어지며 로그리예의 반짝이는 머리카락과 로즈라의 붉은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려 주었다.
“좋아. 이 정도면 수상해 보일지언정 누군지는 모르겠지.”
가만히 있던 로즈라가 이를 악문 목소리로 물었다.
“이 시간에 신전에 출입할 수 있나요?”
“보통은 없지. 하지만 난 공주잖아?”
게다가 명분도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몇 차례 신전을 습격한 전적도 있으니 거릴낄 것도 없었다.
“가자, 로그리예.”
“내가 안내할게. 길 외워 뒀거든.”
로그리예가 성큼성큼 걸었다. 아까 왔던 길이 아닌 것 같아 고개를 기울일 즈음 샤마흐 신전의 뒤편이 나왔다.
묻지도 않았는데 로그리예가 망토 사이로 빼꼼 나온 얼굴로 으스댔다.
“지름길로 왔어. 잘했지?”
“그래.”
머리를 들이대는 그를 쓰다듬어 주고 샤마흐 신관들의 방이 어디 있을지 대충 가늠해 봤다.
“여길 넘으면 딱일 것 같은데…….”
중얼거리자마자 로그리예가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자기. 위험하니까 잠깐 비켜 서 있어.”
그는 한 팔만 뒤로 둘러 로즈라를 받친 채로 벽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벽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 설마……!”
내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로그리예가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그는 한 손을 위로 뻗어 신전 담장을 짚고 훌쩍 넘어갔다.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저게, 저게 돼?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인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보고 있는데 로그리예가 다시 담을 넘어왔다.
“너, 미쳤……. 아!”
오금을 감싸는 느낌과 함께 발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말이 끊어지며 저절로 놀란 소리가 튀어 나갔다.
시야가 갑자기 높아져 반사적으로 손에 닿는 것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게 하필 로그리예의 머리였다.
그가 내 품에 갇힌 채로 웅얼거렸다.
“공주님, 앞이 안 보이는데?”
“내려놓으면 되잖아!”
나는 혹시라도 누구에게 들킬세라 목소리를 최대한 줄였다. 그러나 어조가 격양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그리예는 손가락을 까딱여 내 다리를 토닥였다.
“괜찮아. 이편이 더 안전하겠다. 꽉 잡고 있어.”
“뭐?”
로그리예가 뒤로 물러났다가 빠르게 도약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신전 안이었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무릎에 힘이 탁 풀렸다. 로그리예가 내 허리를 안아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해 주었다.
고개를 홱 돌려 노려보자 그가 활짝 미소 지었다.
“재밌지?”
“재미고 나발이고, 신전 담벼락을 넘는 놈이 어딨어?”
“여기 있지?”
그가 내 이마에 쪽 입을 맞추고 허리를 놓아주었다.
환장하겠다. 뒷목을 잡는데 로그리예가 내게 팔짱을 끼며 로즈라에게 물었다.
“걸을 수 있지?”
로즈라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이왕 담을 넘은 것, 그냥 돌아갈 순 없다. 나는 신관들이 생활하는 건물로 향하며 로즈라에게 물었다.
“그래서, 할 말 이라는 건 뭐야?”
혼이 나간 표정으로 나를 따라오던 로즈라가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레그레시오에 관한 건데, 공자가 들어도 되나요?”
나는 고개를 돌려 로그리예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도 뭔가를 알고 있었지.
약혼한 뒤에 알려 준다고 했으니 한번 물어봐야겠네.
별개로 레그레시오에 관한 것은 로그리예도 이미 알고 있을 테니 감출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로즈라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정보를 넘겼다.
“레그레시오를 쫓던 정보원이 북서 대륙으로 넘어간 뒤 연락이 끊겼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돌아와 넘겨준 정보가 있어요.”
라파일.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로그리예가 내 손을 잡았다. 깍지 끼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로즈라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레그레시오의 본거지는 북서 대륙에 있어요. 부흥하기 시작한 건 13년 전. 자세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이미 레바나를 밀어내고 주된 종교로 자리를 잡았나 봐요.”
“북서 대륙……. 그래서 여기에는 별다른 정보가 없었구나.”
로즈라가 긍정하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처음에 부탁했던 교리나 규모, 본거지에 관한 내용이었으나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라파일이 교주이고 그의 목적을 알게 된 이상 크게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로즈라의 말이 끝났다.
잠시 걸음을 멈춘 그녀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로즈라의 팔뚝을 잡아 그녀가 기댈 수 있게 해 주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막 문을 두드리려는데 로즈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알려 드리는 건데.”
나는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로즈라를 보았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북서 대륙에도 레바나의 대신관이 있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대신관이 둘일 수는 없다.
100년 전 성전이 일어났을 때도 남동 대륙으로 넘어온 것은 대신관이 주교로 파견한 자였다.
그런데 다른 대륙에도 대신관이라고 불리는 자가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는 가짜야?”
로즈라가 막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옆에 서 있던 로그리예가 창문을 톡톡톡 두드렸다.
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곧 커튼이 쳐진 창문 너머가 희미하게나마 밝아졌다. 로그리예가 창틀을 한 번 더 두드리자 이번엔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나는 로즈라를 부축한 채 안에다 대고 말했다.
“이라네리아예요.”
“공주님?”
창문이 벌컥 열렸다. 나와 로즈라, 로그리예를 본 신관이 이마를 짚었다.
“샤마흐시여…….”
제 신을 찾는 모습에 또 양심이 따끔거렸다.
“다친 사람이 있어서요. 전할 말도 있고요.”
“일단, 일단 문을 열어 드릴 테니 그쪽으로…….”
로그리예는 신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즈라를 번쩍 들어 창문 너머로 넣어 버렸다.
신관은 해탈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제 신을 찾고 신성력을 사용했다. 희미하지만 전보다는 밝아진 빛이 로즈라를 감쌌다.
느리게나마 안색이 좋아지는 그녀를 보며 나는 신관에게 말했다.
“성녀의 발현을 이제 알리셔도 될 것 같아요. 그 말을 전하러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