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라네리아가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는 룩소르와 키네시아를 보며 팔짱을 꼈다.
“뭘 봐?”
가볍게 시비를 걸어 두 사람의 시선을 쫓아낸 그녀는 원래의 화제를 이어 갔다.
“어쨌든 레바나 신전은 잠시 놔줘야겠어. 증거도 없이 공범으로 몰아붙이다가 사절단이 왔을 때 책잡히면 일이 귀찮아져.”
키네시아는 레바나 교가 에피파네스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에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면 영 잡을 방법은 없는 거야?”
“누가 그렇대? 일단 플로레타 일과 반란군 처리부터 마무리 짓자는 거지.”
황제를 애먹인 것이 기특해서라도 아주 후하게 치하할 생각이었다.
“두고 봐. 다음번에는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
이라네리아가 사나운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분노가 그대로 묻어나오는 미소를 마주하자 키네시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러나 로그리예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애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이라네리아에게 더 들러붙었다. 룩소르는 약혼자인 로그리예를 떼어 놓지도 못하고 뒷목을 잡았고, 키네시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
해가 지기도 전에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던 나는 자정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잤다.
개운한 기분에 눈을 깜빡이며 잠을 떨쳐 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 덕분인가?’
옆에서 고운 얼굴로 잠들어 있는 로그리예를 보다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일어나 봐.”
로그리예가 뒤척이며 칭얼대는 소리를 냈다. 나는 잠시 그를 지켜보다가 다시 어깨를 흔들었다.
그가 눈을 감은 채, 잠이 덕지덕지 붙은 목소리로 물었다.
“으응. 왜, 공주님?”
“나가려고.”
듣긴 한 건지 로그리예가 비음만 내며 나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나는 허리에 감긴 팔을 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같이 나갈 거야?”
그 말에 로그리예의 눈이 반짝 떠졌다.
그가 슬쩍 몸을 일으키며 감동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지금 내 의사를 물어봐 준 거야……?”
“누가 들으면 내가 이제껏 마음대로 너를 끌고 다닌 줄 알겠네.”
로그리예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니야?”
“아,”
아니라고 대답하는데, 생각해 보니 딱히 뭘 물어봤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원체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익숙해서 로그리예뿐만 아니라 누구한테 뭘 물었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랬지?
이유는 몰라도 반짝거리는 청보라색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조금 민망해졌다.
“그래서 싫어? 싫으면 말아.”
괜히 톡 쏘아붙여도 로그리예는 좋다고 샐샐 웃으며 나를 와락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싫기는. 빨리 준비하고 올게.”
그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곧장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리고는 내가 외투를 걸치기도 전에 다시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일단 안으로 들이기는 했는데, 그에게 내 방 안에 있는 비밀 통로를 알려 줘도 되나 싶었다.
“내가 안내할게.”
고민하고 있는데 로그리예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손을 끌어다 꼭 잡았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어두운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경비가 삼엄할 텐데, 어떻게 나가려고 저러지? 혹시 저 녀석도 궁전 내부의 비밀 통로라도 알고 있나?
그런 거라면 그거 나름대로 문제인데.
“어떻게 나가려고?”
“다 방법이 있지.”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던 것과 달리, 정원으로 나오자마자 경비병과 마주쳤다.
“공주님. 로그리예 공자님? 이 시간에 왜 밖에 계십니까?”
로그리예가 당당하게 나에게 팔짱을 꼈다.
“데이트.”
“이 시간에 말입니까?”
“달빛이 좋아서.”
로그리예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늦겨울의 찬 바람에 흩어진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훑어 모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귓가를 스치는 손바닥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그 온기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고개를 돌리자 경비병이 조용히 물러가는 게 보였다.
어쩐지 볼이 달아올랐다.
나는 로그리예의 손을 잡아 내리며 성큼성큼 걸었다.
“이게 방법이야?”
“응.”
“……그냥 비밀 통로로 나가자.”
로그리예가 웃음을 터트렸다.
“왜? 약혼까지 한 사이인데 뭐 어때. 부끄러워? 부끄러워하는 공주님도……, 웁!”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대로 질질 끌고 가다가 팔이 아파 손을 내렸다. 로그리예는 멀어지는 내 손을 따라와 손바닥에 쪽 입을 맞췄다.
“다음에는 입술로 막아 줘.”
“진짜, 까불어.”
“까불라는 뜻이지?”
쭉 내미는 그의 입술을 찰싹 때리고 말 한 마리를 챙겨 비밀 통로로 향했다.
몰래 외출할 때 쓰려고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은 통로인데, 다음부터는 여기에도 경비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다.
내 앞에 탄 로그리예가 광장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는 말을 근처 가로수에 묶어 두고는 내 손을 잡고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앞장서는 그에게 물었다.
“찾아갈 수 있겠어?”
“그럼. 저번에 갔던 거기지?”
그는 마치 여러 번 가 봤던 사람처럼 망설임 없이 로즈라의 술집으로 향했다.
걱정과 달리 그는 단번에 길을 찾아냈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왜 문이 닫혀 있지?”
불은 꺼져 있고, 간판도 보이지 않았다.
간판이 달려 있던 쇠고리만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잘그락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황당해 멍하니 보고 있는데 로그리예가 돌연 검을 뽑아 겨눴다.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소리 없이 다가오던 사람의 목젖 앞에 칼끝을 겨눴다.
“어머.”
하고 놀라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익숙했다.
“로즈라? 왜 이제야 와. 지각이야?”
“그럴 리가요.”
로즈라가 미소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움직임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로그리예가 그녀를 빤히 보다가 검을 거두고 내 옆으로 왔다.
“저 사람, 다쳤네.”
“공자님은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로즈라는 로브를 벗지 않은 채 조용한 주위를 한번 쓱 둘러봤다.
“자리를 옮길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몸을 돌렸다. 로그리예는 내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로즈라는 미로 같은 골목을 아주 깊이 파고들었다. 이리 꺾었다가, 저리 꺾었다가, 왔던 길을 돌아가기까지 했다.
한참을 움직이던 로즈라는 내 인내심이 정수리까지 차오르기 바로 직전에 다 무너져가는 오두막으로 쏙 들어갔다.
‘여기가 어디지?’
제대로 된 문이랄 것도 없는 곳이었다.
달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서 근처에 있는 로그리예마저도 안 보일 정도였다.
뚫린 창문으로는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로그리예가 슬쩍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제 망토를 둘러 주었다. 따뜻해서 가만히 있는 사이, 눈이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나는 주변을 훑고 로즈라에게 물었다.
“로즈라가 머무는 곳이야?”
“설마요. 그냥 보이길래 들어온 거예요. 말만 전하고 바로 떠날 거거든요.”
로즈라가 아무렇게나 서 있는 의자를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다.
삐걱거리긴 해도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제야 살겠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공주님과 공자님도 앉으실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상태도 안 좋아 보이는 데 빨리 이야기만 하고 헤어지자. 떠난다고?”
“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요.”
원래 로즈라는 배정된 장소에서 떠나지 않는다.
만일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다른 로즈라가 와서 그 자리를 채운다. 도박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로즈라’라는 이름을 도박장 관리인의 직함 정도로 생각했다.
그렇기에 로즈라가 가고 다른 로즈라가 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100년이 지난 시점에 깨어난 나도 무리 없이 그녀를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가게를 닫고 떠날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습격당했구나?”
얼굴을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로즈라가 안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다.
다른 정보원들은 꽁꽁 숨기고 오직 그들만 나서서 활동하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정보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들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한 명이라도 습격당하면 대륙에 퍼져 있는 모든 로즈라가 잠적해 버리곤 했다.
그렇게 1년이면 1년. 10년이면 10년. 위협을 가하던 자들이 사라지거나 상황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니 정보가 필요한 자들이 자진해서 로즈라를 지키거나, 로즈라가 잠적하면 빨리 원인을 제거했다.
“돌아오는 데에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로즈라가 대답 대신 감탄하며 웃었다.
“어머, 정말 별걸 다 아시네요?”
눈빛으로 재촉하자 그녀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모르겠어요. 상대가 레바나 교라서.”
또 그 녀석들이야?
기분이 더럽긴 한데 어제처럼 주체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아서인지 로그리예가 내 머리에 볼을 툭 기댔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연신 팔뚝을 쓸어 주는 게 나쁘지 않아 가만히 있는데 그가 여상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레바나가 정보상을 왜 노려?”
“로즈라에 대해 알고 있었어?”
로그리예가 나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씨익 웃었다.
“아니. 찍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