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끝은 낭떠러지였다.
심지어 내 사람들을 전부 그 아래로 밀어 넣고 나는 죽음으로 피신했다. 선택은 내가 했는데 그 책임을 고스란히 남은 이들이 떠안게 되었다.
그들의 불행은 내 탓이다.
“내가 틀렸어.”
청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하기가 힘들어 무릎에 세워 턱을 괴고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이러고 있으니 아직 미숙하던 공주일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는 펠리온이, 지금은 로그리예가 옆에 있다.
어쩌면 펠리온에게 느꼈던 감정을 로그리예에게서도 느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 즈음, 로그리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을 옳고 그름만으로 정의 내릴 수 있겠어.”
“…….”
“공주님이 애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전부 행복해졌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그건…….”
선왕은 겁이 많고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싫어했다.
후에 왕세자가 된 나를 지지하는 세력이 생기면 내가 선왕과 반목하지 않았어도 결국 나를 적대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애정을 아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나를 안다. 그때의 나는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사로운 정에 가치를 뒀다면 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서 얻지 못한 사랑을 어떻게 해서든 채우려 했겠지.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고운 모래와 같아서 움켜쥐려고 할수록 스러지기 마련이다.
‘가질 수 없는 애정에 망가진 건, 라파일이 아니라 나였을 수도 있었겠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왕이 있는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리도 없었다.
로그리예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어쩌면 에피파네스는 100년 일찍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을지도 몰라.”
잠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가 내 손을 뒤집어 붉게 변한 손바닥을 부드럽게 훑었다.
“그러니까 지난 삶을 전부 틀렸다고 매도하지 마. 공주님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으니까.”
내 삶을 본 적도 없는 놈이 하는 말인데,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작은 새를 품에 안으면 이런 기분일까? 그의 말이 날갯짓처럼 가슴을 스칠 때마다 갈비뼈가 조여들며 목덜미가 기분 좋게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생소한 감정이 어색해 괜히 툴툴거렸다.
“……다 아는 것처럼 말하긴.”
“공주님은 고마우면 꼭 그러더라. 귀엽게.”
“뭐? 귀, 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는데 로그리예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내 팔을 끌어당겨 제 어깨에 나를 기대게 했다.
“그래도 후회가 남으면 이번엔 애정을 느끼면서 살아 봐. 그게 가족의 정이든, 남녀 간의 정이든. 그러면 되지 자기 자신한테 화를 낼 필요가 뭐가 있어.”
“어린놈이 말은 청산유수지.”
“어리긴. 내 정신 연령이 공주님의 129배는 될걸?”
“흥.”
건방진 말에 콧방귀를 뀌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언제 돌아온 건지 벌목꾼들이 건물 주위에서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괜히 민망해 일어나려는데 로그리예가 먼저 움직였다.
“우리가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돌아갈까?”
로그리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한동안 커다랗고 모양 좋은 손을 바라보다가, 혼자 일어날 수 있음에도 그 손을 잡았다.
***
키네시아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마차에 오르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해서인지, 플로레타의 몸에서 빛이 터진 후의 일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걷기도 힘들 정도로 아팠던 다리가 멀쩡하니 더 그랬다.
그녀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몸을 틀어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그렇게 또다시 넋을 놓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황자님!”
만류하는 시녀를 밀치며 안으로 요르고스가 들어왔다.
“키네샤!”
듣기 싫은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키네시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요, 황자님.”
재회했던 당일과 달리 키네시아가 격식을 차린 말투로 물었다.
요르고스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말아 올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며 소리쳤다.
“위험한 일이 있었으면 궁전에 있어야지 야밤에 어딜 다녀온 거야?!”
키네시아는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눈앞에 있는 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눈만 깜빡이자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간밤에 갑자기 쳐들어오셨다가 공주님이 안 계신 걸 봤어요.”
왕의 건강 상태는 대외적으로는 비밀이기에 요르고스의 귀에까지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키네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얇은 슈미즈 너머로 몸의 윤곽이 드러나자 요르고스가 붉어진 얼굴로 몸을 돌렸다. 키네시아는 신경도 쓰지 않으며 그를 지나쳐 옷장으로 향했다.
시녀의 도움으로 가벼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여전히 방 안에 있는 요르고스에게 단호한 투로 말했다.
“함부로 방에 들어오지 말아 주세요. 불쾌해요.”
“넌 그게 걱정한 사람한테 할 소리야?”
“황자님께 걱정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
곧은 자세로 선 키네시아의 눈동자에는 전과 달리 요르고스를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에게 그 어떤 열의도 보이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에 요르고스는 속이 탔다.
“사과했잖아.”
“저는 거절했고요. 이런 말싸움은 무의미해요. 나가 주세요.”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신경전이 오갔다.
분위기는 극단을 강하게 잡아당긴 줄처럼 팽팽해졌다. 갑자기 들린 작은 노크 소리가 아니었다면 두 사람은 다시 언성을 높이며 싸웠을 것이다.
키네시아는 신경 쓸 것이 생기자마자 바로 요르고스에게서 신경을 꺼버렸다. 그리고 시녀에게 눈짓해 문을 열게 했다.
문밖에는 뜻밖의 사람이 서 있었다.
“스페르모 황자님?”
스페르모의 연두색 눈동자가 잠시 요르고스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키네시아에게로 돌아왔다.
그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선객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너무 예상치 못한 방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키네시아는 형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아니에요. 저분은 지금 나가려던 참이었어요.”
그 미소를 본 순간, 요르고스는 가슴에 뜨거운 기름이라도 들이부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성질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려다가 레튜니아의 황자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상기하며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버티다가 키네시아가 축객령을 내리면 경쟁국의 황자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요르고스는 주먹을 꽉 말아쥐곤 그 누구에게도 인사하지 않은 채 성난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쾅!
거칠게 문 닫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키네시아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그녀는 요르고스가 헤어진 연인처럼 굴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며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표정이 얼굴에 떠오르기도 전에 감추며 스페르모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죄송해서 어쩌죠, 황자님. 제 동생이 조금 아파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찾아오신 이유는 다음에 들어도 될까요?”
“……예.”
스페르모는 누구와는 달리 질척이지 않고 고갯짓으로 인사한 뒤 방을 나갔다.
키네시아 역시 머리를 가다듬고 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안에는 룩소르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 괜찮으신 거예요?”
“그럼. 괜찮고말고. 아가. 다리는 괜찮으냐?”
“네. 저도 괜찮아요. 플로레타는…….”
“잠깐 깨어 리아와 이야기하다가 다시 잠들었다더구나.”
키네시아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 한발 늦게 제 친구를 떠올렸다.
“그럼 저는 로그리예에게 다녀올게요. 걔도 쓰러졌었잖아요.”
“그럴 필요 없단다. 리아와 나가서 지금은 자리에 없단다. 그것보다 문제가 생겼는데…….”
“문제라뇨?”
“안 그래도 너와 이라네리아를 불러 상의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직 리아가 돌아오지 않아서,”
룩소르의 목소리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잘렸다. 곧 방 안으로 이라네리아와 로그리예가 들어왔다.
그녀는 룩소르와 키네시아의 몸을 훑어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실패야.”
“대뜸 들어와서 그게 무슨 말이야?”
“레바나 대신관이 문어처럼 아주 쏙 빠져나갔어.”
“그러니까, 어디를?”
“공범 혐의에서. 한눈판 사이에 살아 있는 것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증거란 증거는 아주 싹 다 없애 버렸어.”
키네시아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에 그런 소란이 있었으니 놓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너 괜찮아?”
이라네가 목표물을 놓쳐 분노할 게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황제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니 모르긴 몰라도 크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키네시아의 걱정과 달리 이라네리아는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은 로그리예가 했다.
“그건 걱정 마. 우리 자기 상심은 내가 달래 줬으니까. 그렇지?”
로그리예가 이라네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의 머리에 볼을 기댔다.
평소라면 한 소리하며 손을 치워 냈을 텐데, 이라네리아는 잠깐 로그리예에게 시선을 줄 뿐 그의 말이나 행동을 내버려 두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룩소르와 키네시아의 입이 벙하니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