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이라네리아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플로레타가 황급히 손을 털었다.
“리, 리아, 이건……! 손잡은 건 아니야!”
이라네리아가 안으로 들어오며 허공에 붕 떠 있는 로그리예의 손을 보았다.
“잡고 있었는데?”
“그러니까, 잡고는 있었던 건 맞는데……!”
플로레타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로그리예가 싸늘해진 표정으로 플로레타를 보았다.
“그렇게 요란을 떨면 우리 공주님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 아니야.”
“딱히.”
이라네리아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로그리예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라네리아 뒤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고, 그녀는 로그리예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그 의자에 앉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행동에 플로레타가 눈만 깜빡일 때였다.
팔짱을 끼고 있던 이라네리아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눈이 마주치자 로그리예가 생글거리며 할 말이 있느냐는 눈빛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너 우리 애 협박했니?”
“자기. 그게 무슨 서운한 말이야. 내가 우리 셋째를 왜 협박해.”
“안 그러면 왜 저렇게 쪼그라들어 있어? 지켜 달라는 비밀은 뭐고?”
플로레타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 기척에 이라네리아가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순식간에 굳어진 로그리예의 얼굴이 이라네리아의 시선을 잡아챘다.
황금색 눈동자가 플로레타에게로 향하려다 말고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로그리예가 차분한 목소리를 냈다.
“들었구나. 내가 플로레타와 한 말.”
이라네리아가 몸을 완전히 틀어 로그리예를 마주 봤다.
플로레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이불을 생명 줄처럼 움켜잡았다.
“사실은…….”
로그리예가 말끝을 끌다가 제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모로 틀었다.
“내가 공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플로레타한테 들켰거든.”
이라네리아가 맥이 탁 풀린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저랬다면 개수작 부리지 말라는 말부터 나왔겠지만 상대는 로그리예였다.
이라네리아는 긴가민가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훑다가 플로레타에게 저 말이 사실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따지고 보면 영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플로레타가 조금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라네리아는 그냥 넘어가겠다는 듯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둘 다 괜찮아? 넌 왜 쓰러진 거야?”
갑자기 방대한 신성력을 받아 충격으로 기절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로그리예는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런 그와 달리 플로레타는 제대로 대답했다.
“난 괜찮아, 리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근데 아빠는?”
“전하는 멀쩡해. 네 덕분이야, 플로레타.”
“다행이다.”
플로레타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제 아버지가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러 가기 위해 주섬주섬 일어나려고 했다.
이라네리아는 그런 플로레타의 어깨를 밀어 다시 눕혔다.
“밤에 난리를 쳐서 다들 자고 있어. 지금 가면 잠만 방해하는 꼴이야. 그러니까 너도 좀 더 쉬어.”
“응…….”
이라네리아의 만류에 플로레타가 얌전히 자리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이라네리아가 그 위를 무심하게 토닥이자 플로레타의 눈이 가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언니인데…….”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플로레타는 곧 고른 숨을 내쉬며 완전히 눈을 감았다.
이라네리아는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방을 나왔다. 로그리예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을 차지했다.
힐끗 시선을 준 이라네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너는 왜 플로레타한테 가 있던 거야?”
“구경하러. 성녀라니 신기하잖아.”
로그리예가 여상스러운 투로 대답하며 정원 너머를 바라봤다.
“그런데 밖은 조용하네? 그 빛 기둥이 안 보였을 리 없는데.”
“돌아오자마자 사람을 보내서 우리가 밝힐 때까지 함구해 달라고 했어. 먼저 처리해야 할 게 있으니까.”
레바나 대신관과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반란에 대해이야기 나누는 것을 들은 사람이 필요했다.
아니면 그 어떤 증거라도, 반역의 공범으로 대신관을 지목한 네페르트 부인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것이면 뭐든 찾아내야 했다.
룩소르가 아프기도 전에 정보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해 놨으니 곧 연락이 올 것이다.
이라네리아는 제 방에서 소피아를 기다리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막 문에 다다랐을 때 복도 너머에서 다급한 걸음으로 소피아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라네리아는 방문을 열어 두고 안으로 들어왔다. 문 앞에 선 소피아가 로그리예를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공주님. 명령하신 것을 알아봤는데…….”
소피아가 불길하게 말끝을 흐렸다.
이라네리아가 기다리지 못하고 소피아의 말끝을 되짚었다.
“봤는데?”
“네페르트 후작 부인과 대신관이 온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카랄드 백작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정원사가 봤다고 합니다.”
“카랄드 백작이라…….”
“예. 그런데 그 백작이,”
잠깐 말을 멈춘 소피아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 고열을 앓다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묻자 소피아가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했다.
“어제 오후 8시부터 바로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10시쯤 증상이 갑자기 악화되었고, 10시 20분에 근육 경련을 동반하면 발작을 일으킨 뒤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10시 20분이면 룩소르가 아프다는 소식을 막 전해 들었을 때였다.
“다른 특징은?”
“바로 장례식이 있기에 가 봤는데, 시신의 손톱이 보라색이었습니다.”
“전하에게 썼던 것과 같은 독이야.”
반란이 막 끝났을 무렵, 이라네리아는 반겔레스에게 반란군을 진압할 때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다.
막바지에 카랄드를 중심으로 몇몇 귀족이 네페르트 후작 부인을 배신하고 반란 진압을 도왔다는 것이다.
네페르트 부인이 알았다면 복수심을 품기 충분한 일이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긴 이라네리아에게 소피아가 물었다.
“증상이 나타난 시간을 보면 전하와 비슷한 시간에 카랄드 백작도 독에 당한 것 같습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미리 손을 썼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카랄드 백작이 배신할 계획이라는 것은 몰랐을 것이다.
같이 죽으려는 게 아니고서야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것을 아는데 반란을 감행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을 때 그녀는 지나치게 당황하며 분노했다.
배신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없었다. 실패를 직감하고 있었을 테니까.
“네페르트 후작 부인을 배신한 다른 귀족들은? 그들도 독에 당했니?”
“아니요. 다들 감옥에 있는데 멀쩡했어요.”
“배신 때문은 아니네.”
“그렇죠. 다른 배신자들은 살아 있으니까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로그리예가 의견을 냈다.
“권력을 독식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이용만 하고 죽여 버리는 것도 흔한 수법이긴 하지.”
이라네리아가 긍정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가장 정확한 건 본인에게 직접 묻는 거 아니겠어?”
어차피 죽을 사람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 그녀가 카랄드 백작은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고 한다면 레바나의 대신관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카랄드 백작은 레바나의 대신관과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대화를 들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잘만 파고들면 반란의 증거를 잡아낼 수 있을 거야.’
증거가 되지 못하더라도 신관이, 그것도 대신관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평판에 큰 타격이 갈 것이다.
신도가 떠나고 세력이 약해진 교단을 내쫓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다.
이라네리아는 걸음을 빨리해 정원을 빠져나왔다.
건물 뒤로 돌아 들어가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병사들이 급하게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주를 보고 주춤하다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러나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그대로 이라네리아를 지나쳐 달려가 버렸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병사의 뒷모습을 돌아보던 이라네리아가 돌연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황급히 지하 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갇혀 있는 곳까지는 당도하지 못했다.
기사 단장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탓이었다.
“비켜.”
“공주님께서 보실 만한 게 아닙니다.”
이라네리아는 그 말에 안에서 벌어진 상황을 순식간에 유추해 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 죽었구나.”
“……스스로 목을 맸습니다.”
“도대체 죄인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심문도 끝마치지 못했는데 죽게 내버려 둬?”
“면목 없습니다.”
이라네리아가 턱 끝까지 차오른 힐난을 뜨거운 분노와 함께 삼키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났다.
이라네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기사 서너 명이 그을린 제복을 입은 채 기사단장에게 오다가 이라네리아를 발견하고 급하게 인사를 올렸다.
“공주님.”
“너희는 꼴이 또 왜 이래?”
“조사를 하던 중, 네페르트 저택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뭐?”
“꺼 보려고 했는데, 결국 전소하고 말았습니다.”
단 한발 차이다. 한발 차로 모든 증거와 증인이 사라졌다.
이라네리아는 분노에 눈앞이 핑 돌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엄한 놈들을 붙잡고 화풀이를 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출구로 향했다.
소피아가 난처한 표정으로 기사단장을 보더니 이라네리아를 따라가려 했다.
가만히 서 있던 로그리예가 팔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내가 갈게. 넌 네 할 일 해.”
“……예, 공자님.”
로그리예는 이라네리아를 따라잡기 위해 달려 나갔다.
입구를 나서자마자 궁전으로 향하는 이라네리아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녀와 마주하는 사람마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질리며 황급히 길을 비켰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진 보지 않아도 뻔했다.
“공주님.”
로그리예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붙잡았지만 곧장 내쳐졌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다시 이라네리아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