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92화 (92/151)

<92화>

***

“성녀…….”

강력한 신성력에 몸을 회복한 신관들이 깨어나 멍하니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한때 샤마흐의 마지막 신관이었던 남자는 빛의 기둥이 성역 위에 세워지는 순간, 신의 음성을 들었다.

[나의 땅 위에 무너진 것들을 일으켜 세워라. 내가 너희와 함께할지니.]

그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온몸에 신성력이 넘쳐흘렀다. 전에는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아아. 샤마흐시여.”

신관은 샤마흐의 문장 앞에 엎드렸다. 그의 몸에서 신성력이 피어올랐다.

그 빛이 닿은 곳에는 두꺼운 대리석 바닥 틈으로도 새싹이 움텄고, 담쟁이넝쿨은 무서운 속도로 신전 외벽을 타고 올라왔다.

겨울임에도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길을 잃은 동물들도 신전 주위로 몰려들었다.

샤마흐 신전에 생명의 기운이 넘쳐났다.

레바나의 대신관은 그 모습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샤마흐의 신전을 빠져나왔다.

거리는 빛의 기둥을 목격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 역시 샤마흐의 신관들과 다를 바 없었다.

엎드려 절을 하거나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바나의 대신관은 구겨진 얼굴을 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마차를 불러 레바나의 신전으로 돌아갔다.

레바나의 신관들도 빛의 기둥을 목격하고 밖으로 나와 있었다.

“대신관님, 도대체 이게 무슨…….”

대신관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말을 거는 신관을 지나쳐 제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을 닫고 혼자가 된 후에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였다.

그가 느끼는 분노는 일종의 질투심 같은 것이었다.

‘레바나를 널리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거늘.’

북서 대륙에는 레바나 교밖에 없었지만 그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을 남동 대륙으로 보내달라고 했으나 본교에서는 번번이 거절했다.

본교와는 뜻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 그는, 결국 자신을 따르는 몇 명의 신관을 데리고 연고도 없는 남동 대륙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신을 알리며 세력을 넓히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득을 취하기도 했으나 제 욕망은 언제나 레바나를 위한 것이었다.

신성 제국의 교황이 되려는 것 역시 레바나 교를 더 널리 퍼트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신은 단 한 번도 그에게 기적을 허락하지 않았다.

“샤마흐 신은 저 덜떨어진 놈들도 축복하는데, 당신은 도대체 왜 저를 외면하십니까! 제가 샤마흐를 모시는 놈들보다 못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는 레바나의 문장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그의 신은 답이 없었다.

레바나의 대신관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감쌌다.

안 그래도 샤마흐 신전의 영향력은 해를 거듭할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샤마흐 교에서 성녀가 나타난 것까지 알려지면 대륙 전체가 다시 레바나를 등지고 샤마흐에게로 돌아설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일궈 낸 건데 이렇게 빼앗길 순 없어.’

일단 반란의 증거를 모두 없애야 한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런 뒤에는 성녀를 레바나 교로 데려와야겠다. 성녀만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에피파네스가 무엇인가, 대륙 전체가 교황의 이름 아래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

플로레타는 눈을 깜빡이다가 별안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빠!”

“응. 왜 불러?”

대답이 돌아왔으나 룩소르의 것이라기엔 너무 능청스럽고 젊었다. 플로레타는 주변을 경계하며 침대 머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

정면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로그리예가 보였다.

플로레타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지만 방에는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찾는 기색을 보이자 로그리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플로레타는 입을 꾹 다물고 움츠러든 채로 로그리예를 노려보았다. 억울한 강아지 같은 표정에 로그리예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였구나.”

“뭐, 뭐가요?”

“왜 플로레타 너만 기억이 그대로인가 했더니 성녀여서 마법이 안 통한 거였어.”

“성녀요?”

로그리예가 고개를 끄덕이며 플로레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고는 씩 웃었다.

“정말 신앙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나 보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봉사할 때가 아니면 딱히 신전을 찾은 적도 없었고, 그마저도 샤마흐의 신전이 아닌 레바나의 신전이었다.

간절하게 기도를 하거나 자주 신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굴곡 있는 삶을 산 것도 아니었다.

최근에는 좀 굴곡이 생기긴 했으나, 어쨌든.

“그게 성녀와 무슨 상관인가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묻자 로그리예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신이 점지한 아이가 태어나 먼저 신을 찾아야 신성력이 발현되거든. 참고로 네 바로 전 성자인 라파일은 몇 살이랬더라……. 6살 때 발현했다고 했었나?”

중얼거리던 그가 갑자기 불쾌한 기억이 떠오른 사람처럼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을 본 플로레타는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로그리예가 표정을 풀고 겁먹은 플로레타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이제 널 헤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네?”

“자연 치유 능력이 생겼을 거야. 궁금하면 시험해 볼래?”

로그리예가 단검을 내밀자 플로레타가 기겁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단검을 집어넣으며 플로레타를 빤히 응시했다. 입꼬리는 위를 향해 있었으나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플로레타는 우물쭈물하다가 물었다.

“왜 저를 싫어하세요?”

“내가?”

로그리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플로레타는 그의 반응에 거짓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저를 볼 때마다 싸늘해지던 눈빛을 떠오르자 진심 어린 얼굴마저도 가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이 불만스럽게 바뀌자 로그리예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널 보면 좀……. 누가 생각나서.”

플로레타가 로그리예의 시선을 피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로그리예가 무서웠지만 예전처럼 그를 마냥 적대할 순 없었다.

신관들은 마력은 느낄 수 없으나 마법 자체는 느낄 수 있다.

그건 성녀인 플로레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녀는 약혼식에서 샤마흐의 신관 복장을 한 남자가 로그리예에게 신성력을 주입하는 것을 보았다.

신성력은 마력에 반발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나 마법사에게 무조건 해가 되는 건 아니었다. 마법만 사용하지 않으면 내상을 입거나 다칠 일이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마법사는 없거니와, 로그리예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것을 숨기고 있으니 마법을 쓸 일도 없었다.

그러면 축복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포넨트에게 마법을 썼죠……?”

로그리예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지만 그건 분명 긍정의 의미였다.

“무슨 마법을 쓴 거예요? 설마 나쁜 마법을 쓴 건…….”

플로레타가 말끝을 흐리며 로그리예를 힐끔 쳐다봤다.

그녀의 예상과 달리 로그리예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친구한테 왜 그런 짓을 하겠어. 그냥 뒤를 돌아보게 했을 뿐이야. 그런 행동 지시 마법은 포넨트처럼 단순한 사람이 잘 걸리니까.”

플로레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뒤를 돌아보게 하기 위해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참아 냈다니?

그게 뭐라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플로레타는 바로 이어지는 장면을 떠올렸다.

포넨트가 이라네리아를 부르고, 동떨어져 있던 그녀가 가족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마법을 썼다는 뜻일까?

플로레타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이어지는 로그리예의 말은 그녀의 추측에 확신을 주었다.

“공주님이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거든.”

“그건…….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냥 부르기만 했어도…….”

“공주님은 남한테 약한 모습 보이는 거 싫어하잖아. 내가 눈치챘다는 걸 알면 자존심 상했을걸.”

“…….”

플로레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도 분명 제 동생을 사랑한다. 이라네리아가 외로워하거나 소외감을 느낀다면 신경 쓰이고 마음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끔찍한 고통이 닥칠 것을 알면서도 동생을 위해 줄 수 있을까?

가능 여부를 떠나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헌신적이긴 한데…….’

플로레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으나 로그리예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것 봐. 나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이상한 사람이에요. 마법사인 건 왜 숨겨요? 리아가 어디 말하고 다닐 애도 아닌데…….”

“아, 그거? 그건 아직 때가 안 돼서. 이번엔 공주님이 먼저 알아봐 줘야 하거든.”

알 수 없는 말에 플로레타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녀가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기도 전에 로그리예가 목소리 톤을 바꿨다.

“그래도 매제로는 괜찮지? 잘생기고 능력 좋고 돈도 많잖아.”

“좀 재수도 없고…….”

“응?”

로그리예가 못 들은 척하며 되물었다. 다시 되짚어 줄까 하다가 플로레타는 황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어, 어쨌든 다신 그러지 마세요. 리아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응. 알아. 그래서 들키지 않게 한 거고.”

로그리예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비밀 지켜 줄 거지?”

플로레타는 한숨을 내쉬다가 그에게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로그리예는 흔쾌히 그녀의 손가락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찝찝한 표정으로 악수 비슷한 것을 보던 플로레타가 손가락을 빼내려고 할 때였다.

문 쪽에서 이라네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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