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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91화 (91/151)

<91화>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죄책감에 룩소르의 손을 더는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리아. 네가 너를 누구라고 생각하든 너는 내 딸이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못 알아볼까.”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달싹였으나 목소리가 내 입술 사이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룩소르의 손에 힘이 빠져나갔다.

곧 그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룩소르!”

그의 체온을 확인하고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다행히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버텨야 해, 신전에 있는 약초를 먹여서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거칠게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키네시아?”

기대를 담아 몸을 돌렸으나 안으로 들어온 것은 키네시아가 아니었다.

“리아. 아, 아빠는?”

플로레타가 안으로 들어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느리게 휘청거리며 다가온 그녀가 내가 있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빠……. 흡, 흐윽, 아빠…….”

미론이 신관을 업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플로레타를 보았다. 룩소르 위에 엎드려 흐느끼던 플로레타가 고개를 돌렸다.

“리아, 키네샤와 포넨트는? 아빠 약은 드신 거지? 그렇지?”

“두 사람은 아직 안 왔어.”

“그럼, 그럼 아빠는…….”

“아직 중독된 상태야.”

플로레타의 입에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미론이 업고 온 신관이 움찔거렸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미 한 번 신성력을 소진해 쓰러졌던 터라 룩소르를 치료하진 못할 것이다.

나는 반쯤 체념한 채 룩소르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플로레타는 신관에게 매달렸다.

“신관님. 제발, 아빠를 살려 주세요. 제발…….”

“죄송합니다, 공주님.”

그는 침통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룩소르의 상태를 살피더니 룩소르의 옆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안 돼요. 아아, 안 돼…….”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려던 플로레타의 몸이 축 처졌다.

“플로레타!”

“공주님!”

나와 미론이 동시에 플로레타를 받쳤다. 그러나 플로레타는 완전히 늘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론. 플로레타를 눕혀 놓고 옆을 지켜 줘.”

“공주님은,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키네시아와 포넨트가 반드시 올 거야. 누군가는 기다려야지.”

미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다가 플로레타를 앞으로 안아 들었다.

그는 내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신관에게 방을 달라고 했다. 샤마흐의 신관이 나를 잠시 보고는 미론과 함께 방을 나갔다.

나는 룩소르의 머리맡에 앉아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룩소르. 조금만 더 힘을 내. 곧 네 아이들이 올 거야.”

침착한 척했지만 죽음이 엄습하는 게 느껴졌다.

뜨겁기만 하던 룩소르의 몸이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열이 내리는 게 아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던 신관의 말처럼,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해독제를 마셔도 살아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문이 열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땀에 흠뻑 젖은 포넨트가 부들거리는 다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버지!”

룩소르를 발견한 그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는 당장 룩소르의 목을 받쳐 들며 유리병의 마개를 이로 뽑아냈다. 그리고 벌어진 룩소르의 입술 사이로 약을 흘려 넣었다.

하지만 약은 대부분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는 룩소르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혀를 눌러 어떻게든 삼키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룩소르는 약을 한 모금도 삼키지 못했다.

약병은 어느새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당황해 허둥거리는 포넨트의 손목을 잡았다.

“포넨트. 그만 해.”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포넨트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그가 팔을 늘어트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얼마 뒤, 열린 문으로 키네시아와 레바나의 대신관, 로그리예가 들어왔다. 로그리예에게 몸을 의지한 채 다리를 절며 들어온 그녀는 룩소르에게 다가오지 못한 채 멈춰 섰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인지했는지, 키네시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절망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로그리예가 내게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지 않았다면 이 일이 현실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를 헤치고 입을 열었다.

“궁전으로 돌아가자.”

키네시아가 여전히 혼미한 표정으로 멍하니 물었다.

“……아버지는?”

“데려가야지.”

오틸리에도 임종을 지켜야 할 테니까.

나는 창백해진 룩소르를 보았다. 그의 숨이 점점 옅어졌다. 기듯이 다가온 키네시아가 룩소르의 위로 엎드려 눈물을 쏟아냈다.

포넨트 역시 소매로 거칠게 눈을 비볐다.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그때, 방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공주님! 정신 좀 차리세요.”

미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방 밖의 소란에 반응하는 사람은 나와 로그리예밖에 없었다.

플로레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문이 양쪽으로 벌컥 열렸다.

손을 든 흔적도 없이, 플로레타는 열린 문 가운데에 정자세로 서 있었다.

반쯤 감긴 청보라색 눈은 초점 없이 흐리기만 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오는 걸음은 놀랍도록 가볍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다가와 우리를 지나쳐 샤마흐의 문장을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곧 몸을 돌려 죽어 가고 있는 제 아버지의 앞으로 왔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자 키네시아와 포넨트가 고개를 들었다.

“플로레타?”

“로라.”

제 형제들의 부름에 답하지 않은 채 플로레타가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몸을 타고 엄청난 빛이 터져 나왔다.

***

오틸리에는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였다. 그러면서 1분에 수십 번도 더 창을 열고 나가 밖을 내다봤다.

그러나 궁전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새 가장 깊은 새벽이 찾아왔다.

오틸리에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 샤마흐로 가서 룩소르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리를 지키라는 이라네리아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어깨에 망토를 둘렀다.

그때, 갑자기 엄청난 양의 빛이 방 안으로 침범했다.

낮이 된 것처럼 환해졌으나 이상하게도 눈이 시리지 않았다. 시력도 그대로였다.

깜짝 놀란 그녀는 발코니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며 그녀를 따라 나온 지시스에게 물었다.

“저게, 뭘까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빛기둥이 샤마흐 신전을 관통한 것처럼 서 있었다.

위협적일 정도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저절로 경외심이 들어, 오금에 힘이 풀렸다.

그러나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앉기도 전에 빛기둥의 두께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멍하니 그 모습을 보던 오틸리에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어디선가 읽었던 문장이 떠오른 탓이었다.

“신의 아이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성스러운 빛의 기둥…….”

“예?”

“성자, 아니면 성녀가 나타난 거예요. 샤마흐의 신전에!”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빛에 휩싸였다면 룩소르는 분명 씻은 듯이 나았을 것이다.

당장 가서 멀쩡해진 그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문을 향해 달렸다. 멍하니 샤마흐의 신전을 보고 있던 지시스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달려가 오틸리에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전하.”

“비키세요, 지시스 경.”

“공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주십시오. 반란이 일어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궁전을 비워선 안 됩니다.”

그제야 이성이 좀 돌아왔다.

오틸리에는 지시스에게 짧게 사과하고 한숨을 내쉬며 망토를 벗었다. 그리고 초조한 기색이 가신 걸음으로 걸어 소파에 앉았다.

새벽의 고비를 지나자 밖은 빠르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해를 보며 오틸리에가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정원의 대로를 따라 샤마흐의 신전 문장이 찍힌 마차가 들어왔다. 멈춘 마차에서 제일 먼저 내린 건 이라네리아였다. 그 뒤로 로그리예를 업은 포넨트와 멍한 표정의 키네시아, 기절한 플로레타를 안아 든 미론이 차례대로 땅을 밟았다.

오틸리에는 난간을 움켜쥐고 마차 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익숙한 신발이 마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몸을 돌려 달려 나갔다.

“룩소르!”

룩소르가 뛰어드는 오틸리에를 양손으로 받아냈다. 오틸리에는 그에게 안겨 제 남편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괜찮은 거예요?”

“괜찮소. 걱정시켜 미안하오.”

“아니에요, 당신만 괜찮으면, 그러면…….”

룩소르는 눈물을 흘리는 오틸리에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제 남편의 품에서 뒤숭숭했던 감정을 진정시킨 뒤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플로레타와 로그리예를 살피다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어쩌다가 기절한 거니?”

이라네리아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턱짓으로 로그리예를 가리켰다.

“쟤는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냥 갑자기 기절해 버렸고…….”

말끝을 늘이던 그녀는 이번엔 플로레타를 가리켰다.

“쟤는 말하자면 기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오틸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궁전으로 돌아온 가족들을 방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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