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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90화 (90/151)

<90화>

대신관은 왕의 침실만큼이나 넓은 방을 바쁜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그러나 서랍을 여는 손짓은 그다지 다급하지 않았다.

그는 일부로 해독제가 들어 있는 서랍 주변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더 절박해야 내 요구를 들어주겠지.’

대신관은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는 건 물론이고, 이 기회에 레바나 교를 에피파네스의 국교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극적인 상황에 등장해야 한다.

국왕이 죽기 직전이면 더할 나위 없었다.

물론 그 정도로 위독해지면 해독제를 먹는다고 하더라도 정신착란이나 발작 같은 후유증이 남을 수 있었으나,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오히려 왕을 끌어내릴 때 명분을 만들지 않아도 되니 편했다.

미치광이 왕에게서 에피파네스를 구한 교황이라니, 얼마나 멋진 칭호인가!

더 상황이 나빠져 죽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형제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후계를 정하는 일에는 잡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혼란한 틈을 타서 나라를 장악하면 된다.

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랍을 뒤적거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자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포넨트와 키네시아가 대신관에게 다가왔다.

“저희도 찾는 걸 도울게요.”

“성수가 든 병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키네시아가 바로 옆에 주저앉았다. 포넨트도 대신관이 설명만 하면 바로 방 안을 뒤엎을 기세였다.

대신관이 힐끗 두 사람에게 시선을 주었다.

괜히 방을 수색하게 두었다가 책잡힐 만한 것이라도 발견되면 귀찮아진다.

“주먹만 한 유리병에 담겨 있는데…….”

그는 대충 설명하는 척하며 뒤적거리던 서랍을 닫고는 바로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아, 여기 있군요.”

대신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키네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바로 몸을 돌리려다가 대신관에게 손을 뻗었다.

“성수는 제가 들고 있을게요.”

“……그러십시오.”

대신관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해독제를 키네시아에게 넘겼다.

그녀는 해독제가 든 병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셔야 할 게 있는데, 아버지는 지금 샤마흐 신전에 계세요.”

레바나의 대신관은 자기도 모르게 일순 눈살을 찌푸렸다.

국왕이 샤마흐의 신전에서 축복을 받고 있다면 상태가 악화되는 데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지금 가면 극적인 연출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키네시아는 문을 향해 뒷걸음질 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위중해지신 탓에 어쩔 수 없었어요. 설마 다른 신전을 찾았다는 이유로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사명을 저버리진 않으시겠죠?”

샤마흐를 섬기든 레바나를 섬기든, 신관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사명을 안고 살았다.

해독제를 넘기기 전이면 없는척하며 돌려보낼 순 있지만 이미 전달한 성수를 뺏을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특히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몇 년 사이에 영악해진 키네시아 공주를 보고 대신관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감사해요.”

포넨트와 키네시아가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 하자 대신관 역시 재빨리 두 사람을 뒤쫓았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만약 이대로 룩소르가 해독되면 샤마흐 신관들이 국왕을 구했다는 소문이 날 것이다.

고생해서 남 좋은 일을 시킬 순 없었다. 그 ‘남’이 샤마흐의 신관들이라면 조금 체면을 구기게 되더라도 무조건 막아야 한다.

좀처럼 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레바나의 대신관은 짜증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속내를 숨기며 키네시아와 포넨트를 따라 말에 올랐다.

두 사람은 매서운 속도로 어둠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대신관은 그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어차피 샤마흐 신관들의 신성력은 별 볼 일 없어. 시간만 끌면 다시 내 쪽으로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데…….’

레바나의 대신관은 머리를 굴리다가 손바닥만 한 비수를 꺼냈다.

그는 고삐를 단단히 쥐고 허벅지에 힘을 준 채, 망설임 없이 자신이 탄 말의 엉덩이에 칼을 찔러 넣었다.

그리고 곧장 뽑아내 던져버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둠은 단도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 주었다. 반면에 갑작스럽게 원흉 모를 공격을 받은 말의 두려움은 가중시켰다.

-히히힝!

말이 이리저리 날뛰다가 키네시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바나의 대신관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몸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공주님, 조심하십시오!”

키네시아가 뒤돌아봤을 때, 이미 대신관의 말은 그녀가 탄 말을 들이받을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놀란 키네시아의 말이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 성수가 든 병을 안고 있던 키네시아는 급작스럽게 기울어지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키네샤!”

포넨트가 달려들어 낙마한 키네시아가 말에 깔리는 것은 겨우 막아냈다.

그러나 키네시아가 타고 있던 말은 놀라서 도망가 버렸다. 대신관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말에서 떨어지는 척 뛰어내렸다.

그러자 대신관의 말도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유감스럽게도 포넨트는 제 쌍둥이를 걱정하느라 그 작태를 눈치채지 못했다.

“키네시아. 너 괜찮아?”

“괜, 으윽!”

일어나려던 키네시아가 그 자리에서 넘어지자 놀란 포넨트가 그녀를 부축했다.

키네시아는 일어나지 못하면서도 포넨트를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도 성수는 지켰어.”

포넨트가 입술을 깨물며 키네시아가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

대신관은 두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포넨트의 말을 향해 돌을 던졌다.

손톱만 한 돌멩이가 말의 얼굴에 적중했다.

안 그래도 커다란 소리에 계속 긴장하고 있던 말은 작은 자극에도 화들짝 놀라며 달아나 버렸다.

“포넨트, 말!”

“뭐?”

포넨트가 키네시아를 앉혀 두고 뒤늦게 쫓아갔지만 이미 저 멀리 가 버린 말을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키네시아는 한 발에 몸을 지탱하고 서서 망연자실하게 말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대신관이 뒤늦게 두 사람에게 다가와 물었다.

“공주님,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말이…….”

“이런……. 죄송합니다. 제 말이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이거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겠군요.”

정말 죄송한 것처럼 들렸지만 키네시아는 그의 말에서 진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더 늦으면 아버지가 위험하다.

키네시아는 포넨트에게 성수를 넘겼다.

“포넨트. 네가 나보다 빠르니까 먼저 가.”

포넨트의 불안한 시선이 잠시 레바나의 대신관에게 닿았다.

“하지만…….”

“괜찮아. 어서.”

“그러십시오, 왕자님. 공주님은 제가 잘 모셔 가겠습니다.”

포넨트가 성수 병을 꽉 움켜잡았다.

“전달하고 금방 돌아올게.”

그는 몸을 돌려 달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키네시아가 한숨을 내쉬며 땅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다리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성수를 전달하는 것 간단한 일조차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에 속이 상했다.

꼭 신이 아버지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러나 레바나의 대신관은 흐느끼는 키네시아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죽일까?’

그 생각이 잠시 스쳤으나 여기서 키네시아가 죽으면 자신이 범인이 된다.

그는 충동을 내려 누르고 키네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주님.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

나는 룩소르의 손을 잡은 채 무력함과 좌절감에 무너지려는 정신을 애써 일으켜 세웠다.

지금이라도 그를 레바나 신전으로 데려가야 하나?

아니.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다.

키네시아와 포넨트가 샤마흐 신전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길이라도 엇갈리면 룩소르를 구할 기회조차 잃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마냥 기다릴 수도 없었다.

키네시아와 포넨트가 도착했을 만한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만일 그 애들조차 다치면…….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룩소르의 손등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질끈 감았다.

“로그리예.”

“응, 공주님.”

“레바나 신전에 다녀와 줘.”

“알겠어.”

“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으니까 오가는 길도 잘 살펴줘.”

로그리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별다른 말 없이 그대로 대 기도실을 빠져나갔다.

주변에는 쓰러진 신관들이 널브러져 있고 룩소르 역시 정신을 잃은 채였다.

온전하게 깨어 있는 자는 나밖에 없었다.

도대체 내가 뭘 해야 할까? 뭘 할 수 있을까?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신의 이름이었다.

“샤마흐시여, 부디 당신의 아이를 굽어살피소서.”

중얼거리는 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룩소르의 신음이 공허한 정적을 깨트렸다.

“으윽.”

“전하……! 정신이 들어?”

“리아야.”

그가 내 손을 꽉 맞잡았다.

제 딸을 찾는 목소리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솟아 목구멍을 막고 가슴을 짓눌렀다.

뜨겁고, 물컹거리는 감정은 생소했지만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걱정 같기도 하고, 원망 같기도 했다.

“왜, 왜 막아섰어? 내가 말했잖아. 전하의 안전이 제일 중요하다고. 그런데 왜…….”

룩소르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가 끊어질 듯 위태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을 망쳐서……, 미안하구나.”

미련한 놈. 사과가 아니라 원망을 해야지.

내가 넋을 놓고 있다가 너를 지키지 못한 것인데.

눈시울이 뜨겁고 코가 시큰거렸다. 입 안을 꽉 깨물어 눈물을 막았다. 그러나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룩소르의 목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단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어. 어떻게 딸이 위험한 걸 두고 볼 수 있겠느냐.”

“……난.”

충동이 입술을 움직였다.

“난 이라네리아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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