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머뭇거리다가는 룩소르의 몸이 완전히 독에 잠식되고 말 것이다.
뭐가 최선일까. 어떻게 하면 룩소르가 위험 속에 제 몸을 던진 것을 헛되게 만들지 않으면서 그를 살릴 수 있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키네시아의 손을 떨쳐내고 룩소르에게 다가갔다.
“샤마흐 신전으로 가자.”
“이라네!”
키네시아가 울부짖듯이 내 이름을 불렀다.
플로레타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다른 사람들은 나와 키네시아의 대립에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로그리예만이 다가와 룩소르의 앞에 앉아 등을 댔다.
“내가 업을게.”
나는 그의 안색을 확인하고 룩소르를 일으켜 세웠다.
키네시아가 달려와 막으려 했으나 로그리예가 룩소르를 업고 일어나는 게 더 빨랐다.
키네시아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궁전에서 가까운 건 샤마흐 신전이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나는 키네시아의 어깨를 잡았다.
“나는 전하를 데리고 샤마흐 신전으로 갈 테니까, 너는 레바나의 대신관을 샤마흐 신전으로 데려와.”
언제 독이 번질지 모르는 룩소르를 궁전에서 먼 레바나 신전으로 데려가긴 위험하다.
마찬가지로 레바나의 대신관을 부르기 위해 궁전에서 레바나 신전까지 왕복하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키네시아가 그제야 몸에 힘을 뺐다.
“그 말은…….”
“두 방법 다 해 보자고.”
나는 룩소르의 손톱 상태를 확인하며 로그리예를 끌고 문으로 향했다.
샤마흐의 신관들이 치료에 성공하면 레바나의 대신관만 헛걸음한 게 될 뿐, 우리에게 해가 될 건 없다.
만일 샤마흐의 신관들이 치료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키네시아가 레바나의 대신관을 데려올 때까지는 룩소르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다.
대신관이 룩소르를 치료하면 상황이 조금 복잡해지긴 하겠지만…….
“네 말대로 전하부터 살리자.”
나는 문을 양손으로 열어젖혔다.
찬 바람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어떤 신이 우리의 손을 잡아 줄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키네시아가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 멍하니 있던 포넨트가 화들짝 놀라며 제 쌍둥이를 따라가며 외쳤다.
“야! 같이 가!”
두 사람이 나가자마자 나는 로그리예의 등을 밀었다.
“먼저 가. 최대한 빨리. 샤마흐 신전으로.”
“응. 걱정하지 마, 공주님.”
로그리예가 룩소르를 업은 채 달려 나갔다.
나는 방 안에 남은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왕비 전하는 궁전에 남아. 반란이 막 끝난 후라 궁전을 지킬 사람이 필요해.”
오틸리에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스는 왕비 전하를 지켜. 플로레타는 여기 있을 거야?”
“흐어엉. 어, 어엉.”
플로레타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나는 잠시 정신을 잃은 신관에게 시선을 두었다.
“미론, 타솔라를 불러서 쓰러진 신관님을 모시고 신전으로 와. 나는 먼저 가 있을게.”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기에 바로 방을 나왔다.
나는 곧장 마구간으로 가서 말을 꺼냈다.
빨리 달린다고 달렸으나 로그리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전에 도착했을 때, 내부는 이미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나를 마중 나온 것인지 신전 문 앞에는 로그리예가 서 있었다. 나는 말이 다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려 로그리예에게 갔다.
“룩소르는?”
“안에 계셔.”
그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대 기도실로 들어가자 열댓 명의 신관이 손을 잡은 채 둥글게 모여 있는 게 보였다.
그들의 몸에서 피어나는 희미한 빛무리가 신전 바닥에 새겨진 문양을 타고 룩소르에게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룩소르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진 않았다.
‘신성력이 생각보다 훨씬 약해.’
이제 막 신관이 된 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로라면 룩소르를 완전히 치료하지 못할 것이다.
치료는커녕 키네시아가 레바나의 대신관을 데리고 올 때까지 제대로 버텨 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빨리 와, 키네시아.’
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을 막 파고들려 할 때, 로그리예의 단단한 손끝이 주먹의 틈새를 가르며 파고들었다.
그는 손바닥을 맞댄 채 깍지를 껴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뭐라도 잡아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그때였다.
신관 3명이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른 신관들이 잠시 동요하는 사이 룩소르가 고통에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신관들이 평정심을 되찾자 곧 괜찮아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을 보았다.
아직 말발굽 소리나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로그리예가 엄지로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괜찮을 거야.”
그러나 그의 위로는 힘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내 시선이 문에 고정되어 있는 사이, 신관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이제 남은 신관은 다섯 명.
나는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룩소르가 나를 지키기 위해 검에 스스로 뛰어들었음에도 말이다.
무력하다.
황제가 되고 난 후, 이토록 무력감을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가졌다. 살아 있는 자를 죽여야 하면 죽였고, 죽어가는 자도 필요하면 살려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 있는 신이라도 된 양, 양손에 생명과 죽음을 움켜쥐고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황제라는 이름과 나를 따르는 이들이 없는 지금은, 나 역시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악몽이 현실 위로 고스란히 떠 오른다.
‘타인이 흘린 피로 영광이란 이름을 쓴, 오만한 황제여!’
만일 룩소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그건 내가 교만했던 탓이다.
심장이 불안으로 크게 뛰었다. 로그리예를 움켜쥔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으나 도저히 힘을 풀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신관이 쓰러지는 소리가 또 들렸다.
“키네시아는 언제 오는 거야.”
이를 악물고 중얼거려 봐도 여전히 들려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이내 마지막 신관까지 정신을 잃었다. 나는 룩소르에게로 달려가 그의 손을 들어 올렸다.
손은 화염에 담그고 있었던 것처럼 뜨거웠다.
그러나 손톱은 이미 창백한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
키네시아는 레바나의 신전으로 뛰어 들어가 어두운 신전에다 대고 소리쳤다.
“대신관님! 대신관님을 불러 주세요!!”
커다란 목소리에 잠에서 깬 신관이 밖으로 나오며 잔뜩 인상을 썼다.
“지금이 몇 시인 줄 아십니까?”
그러고 램프를 확 들이밀었다. 불빛에 절박한 얼굴이 스쳤다.
“공주님?”
“어서 대신관님을 불러 주세요. 아니, 제가 갈게요. 대신관님 방은 어디죠?”
이미 대신관에게 왕실에서 사람이 오면 막지 말라는 말을 들었기에 신관은 그들을 대신관의 방으로 안내했다.
하지만 문 근처까지 다가가자 두 사람을 들여보내는 게 맞나 싶었다.
대신관의 방은 이미 불이 꺼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신관이 걸음을 늦췄을 때였다.
다급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키네시아가 신관을 지나쳐 정면에 있는 문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문을 두드렸다.
“대신관님!”
“잠시만, 공주님…….”
키네시아를 말리려는 신관 앞을 포넨트가 가로막았다.
“감사합니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돌아가세요.”
“하지만 이렇게 무례하게…….”
“알긴 하지만 위급한 상황이라서요. 그리고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포넨트가 정중한 말로 신관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신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방문을 두드리는 것에 동참했다.
“대신관님! 전하께서 위독하십니다!”
대신관은 혼자 독채를 썼기에 다른 신관들이 깨어나 나와 보는 일은 없었다.
다만 대신관도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잠이 들었다지만 이런 소란이 일어났는데도 깨어나지 않는다고?
그럴 수가 있나?
키네시아는 방문을 두드리던 손을 내렸다.
“부수자.”
평소라면 미쳤다느니, 과격하다느니 한 소리 했겠지만 마음이 급한 건 포넨트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대꾸도 없이 검을 들어 문고리를 막 부수려고 할 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대신관의 방문이 드디어 열렸다.
키네시아는 느리게 벌어지는 문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단숨에 열어젖혔다.
대신관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인자한 미소를 입에 걸쳤다.
“이 시간에,”
“도와주세요!”
키네시아가 대신관의 쓸모없는 인사를 끊어내며 양손으로 그를 붙잡았다.
포넨트 역시 검을 집어넣고 키네시아 옆에 섰다.
“아버지가 위독하십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신관은 드물게 정중한 태도를 보이는 왕자를 쳐다봤다.
그는 매끈한 턱을 매만지다가 몸을 비켜섰다.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시죠.”
“시간 없어요. 지금 당장 가야 해요.”
키네시아가 대신관을 끌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관은 차가운 눈으로 키네시아를 내려다보다가 팔을 쓸어내려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떨궈 냈다.
키네시아가 뒤돌아보자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성수를 가져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