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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88화 (88/151)

<88화>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후작 부인이 나를 공격했었지.’

하지만 왜?

룩소르를 노리기 충분한 거리였는데, 왜 굳이 나에게 칼을 겨눈 거지?

답을 내리기도 전에 키네시아가 방문을 열었다.

안에는 멀쩡해 보이는 로그리예와 어떻게든 제 친구의 멱살을 잡으려는 포넨트, 말려야 할지 말지 망설이는 신관과 궁정의가 앉아 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궁정의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주님들.”

나는 포넨트의 뒷덜미를 끌어당겨 로그리예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며 궁정의에게 물었다.

“얘 괜찮은 거 맞아?”

“예. 아무런 이상 없으십니다.”

“신관님이 치료하셨나요?”

“아닙니다. 저는 궁정의가 진료한 뒤에 도착했습니다. 혹시 몰라서 한번 보긴 했는데, 괜찮으셨습니다.”

신관의 말까지 들은 나는 고개를 돌려 로그리예의 양 볼을 붙잡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얼굴을 살피자 로그리예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 같아 손을 떼어 내고 뒤로 물러났다.

언제 지운 건지 얼굴이나 소매에 피를 흘린 흔적도 없었다.

그는 호언장담한 대로 멀쩡해져 있었다.

“정신에도 이상 없고?”

로그리예가 혈색 좋은 얼굴로 내게 들러붙었다.

“왜 그런 걸 물어봐. 내가 공주님한테 미친 것 같아서?”

그냥 미친 것 같아서 그런다, 이놈아.

질색하는 후손들을 애써 모른 척하며 궁정의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상 맞지?”

“그건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

궁정의가 어색하게 웃으며 내 말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괜히 엄한 사람을 괴롭히는 기분이라 그를 놓아주기로 했다.

“고생했어. 돌아가 봐도 좋아.”

궁정의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나자 신관이 나에게 물었다.

“듣기로는 저를 찾으셨다는데, 로그리예 공자는 멀쩡하니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얘 때문에 오라고 한 게 아니었어요. 오늘 밤만 궁전에 머물러 주실 수 있을까요?”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신관이 난색을 표했다.

“왜? 바쁜 일이라도 있어요?”

그가 양심의 안부를 묻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공주님, 왕자님들과 얽혀서 조용하고 평온했던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유일한 샤마흐의 신관이었다.

어린 공주들과 왕자의 침입을 가장 많이 겪은 사람이기도 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신전의 문짝을 부순 전적이 있었고, 포넨트와 플로레타는 신전을 어지럽히고 사라지기도 했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궁전으로 와 준 게 용할 지경이었다.

나는 슬금슬금 허리에 감기는 로그리예의 손을 보지도 않고 찰싹 쳐 내며 입을 열었다.

“정확하진 않은데 일이 너무 쉽게 끝난 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국왕 전하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또 있을지도 모르고.”

신관의 눈이 나와 포넨트, 키네시아를 차례로 훑었다.

몸만 큰 사고뭉치를 보는 표정이었다.

그는 우리와 엮이기 싫다는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사람의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하니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샤마흐의 신관은 고개를 젓고 나가려다가 한데 모인 우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플로레타 공주님은 안 보이시는군요. 어디 가셨습니까?”

신관의 질문에 키네시아가 대답했다.

“로라는 방에 있어요. 로그리예랑 사이가 썩 좋지 않거든요.”

로그리예가 기어이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았다.

“나를 왜 무서워하는지 모르겠어.”

신관이 로그리예를 돌아보았다.

그는 말없이 로그리예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

대신관은 레바나 신전으로 돌아온 뒤에도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실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원래는 성기사단을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불길함을 느끼고 발을 빼길 천만다행이었다.

덕분에 그 자리에서 공범인 게 들킬 위기는 면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자신을 공범이라고 지목하긴 하겠지만 한 사람의 말만으로는 대신관에게 해를 가할 수 없다.

그 외에 다른 증거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대신관은 자리에 앉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이다가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카랄드 백작!’

그는 대신관과 네페르트 부인이 함께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뿐이면 이렇게 놀라지도 않았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카랄드 백작에게 대신관이 그녀의 편에 섰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이 왕실의 귀에 들어간다면?

‘이라네리아 공주가 또 신전을 들쑤신다고 할지도 몰라.’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오늘만 넘기면 된다.

네페르트 부인의 칼이 국왕의 팔을 스쳤다.

대신관은 네페르트 부인이 쓴 독의 해독제를 가지고 있었다. 달이 뜨면 국왕은 아프기 시작할 것이고, 샤마흐 신관들의 미약한 신성력으로는 그를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레바나 신을 찾겠지. 대신관은 그때 해독제를 성수라고 속여 국왕에게 먹일 생각이었다.

‘오늘 밤. 오늘 밤만 지나면 국왕은 내게 목숨을 빚지게 된다.’

하지만 마냥 손을 놓고 있는 건 레바나의 대신관답지 않았다.

불안한 게 있으면 발목을 잡히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

대신관은 복장을 갈아입고 조용히 신전 문을 나섰다.

***

늦은 밤, 나는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

네페르트 부인은 내 예상대로 레바나의 대신관을 공범으로 지목했다.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아 조사를 더 해 봐야 알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레바나의 대신관에게 유리한 건 없었다.

미론에게 아이들 역시 증거를 찾는 데에 착수했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옆에서 잠들어 있는 로그리예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공주님!”

지시스가 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로그리예가 깨어나는 걸 느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침대 아래에 있는 실내화에 발을 꿰고 숄을 걸치며 지시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국왕 전하께서 고열에 시달리고 계십니다.”

불길함이 어서 달려와 제 실체를 확인하라며 손짓했다.

나는 그대로 룩소르의 방을 향해 뛰었다.

국왕의 침실 근처는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소란스러웠다.

안에서 궁정의가 이것저것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곧 궁정의가 뛰쳐나와 어디론가 달려갔다.

열린 문틈으로 신성력을 쓰고 있는 신관과 울고 있는 오틸리에가 보였다.

“무슨 일이야?”

“룩소르가, 실렌도에 당했다고…….”

오틸리에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이불을 파헤쳐 룩소르의 손을 꺼냈다. 그리고 손톱과 발톱을 확인했다.

실렌도는 암살에 최적화된 독이다. 고열에 시달리기 전까지는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게 특징이었다.

다만 열이 나기 시작한 뒤 제때 약을 쓰지 않으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 시기는 손톱과 발톱의 색으로 짐작할 수 있다. 손발톱이 보라색을 띠면 이미 손을 쓰기엔 늦은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룩소르의 손발톱은 이미 희게 변해 있었다. 이러다 푸른색을 거쳐 보라색으로 변할 것이다.

오틸리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분명, 분명 성수를 마셨다고 했는데…….”

나는 신관을 보았다.

샤마흐의 신을 가장 오래 섬긴 신관의 신성력을 직접 받고 있음에도 독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신성력이 물에 깃들면 유통은 편해져도 효과는 감소한다.

성수를 마셨지만 독을 완벽하게 해독하진 못한 것이다.

“해독제는?”

나를 따라온 지시스가 대답했다.

“궁정의가 만들러 갔습니다.”

“안 돼. 해독제를 만들 때까지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생각해. 생각해 내야 해. 다른 방법을…….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데 문이 완전히 젖혀지며 포넨트, 플로레타, 키네시아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플로레타가 앓는 소리를 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룩소르에게 달려갔다.

포넨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서성였고, 키네시아는 울고 있는 오틸리에의 어깨를 감쌌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나 대신 지시스가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몸을 틀었다.

“야! 너 어디가?”

“샤마흐 신전으로 가서 신관을 더 데려올게.”

“신관?”

“그래.”

키네시아가 달려와 나를 붙잡았다.

그녀는 아주 짧게 고민하는가 싶더니 얼굴을 굳힌 채 입을 열었다.

“레바나의 대신관을 모셔 오자.”

나는 목소리를 낮춰 키네시아에게 속삭였다.

“내가 성수를 마셔 봐서 알아. 어차피 그의 신성력도 별반 다르지 않아. 룩소르의 독을 없애기엔 미약해.”

“하지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키네시아가 울음을 참아 내고 내 손을 움켜쥐었다.

“대신관이 집무실을 나가기 전에 한 말을 생각해 봐. 그는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분명……. 해독제라도 가지고 있을 거야.”

키네시아의 말이 옳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레바나의 대신관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게 돼.”

국왕의 목숨을 빚지게 만들어 위기에서 벗어나고 에피파네스를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 역시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게 중요해? 일단 아버지를 살려야 할 거 아니야!”

키네시아가 절규하듯 소리쳤다.

그 울림이 가라앉기도 전에, 샤마흐의 신관이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룩소르의 몸에 깃든 신성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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