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모욕이라니. 제가 한 말 어디에 모욕적인 뜻이 담겨 있다는 거죠?”
대신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지려다가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인지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도발에 넘어가 중요한 걸 발설하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게 늙은 구렁이다웠다.
“저도 큰일을 겪은 터라, 잠시 예민해졌었나 봅니다.”
대신관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아직 분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닌지 밀려 올라간 광대뼈 주변이 파들파들 떨렸다.
“이런 소모적인 대화를 하려고 저를 부른 건 아니실 테죠, 전하.”
대신관이 국왕인 룩소르를 콕 집어 말을 걸었다.
공주인 내가 끼어들 수는 없게 하려는 수작이었다. 실제로, 나는 순식간에 대화에서 배제되었다.
룩소르는 긴장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보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 역시 레바나 신전이 반란에 가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소.”
저 바보가. 저렇게 돌직구를 던지면 어떡해.
미론이 아이들에게 증거를 수집해 오라고 말을 전할 때까지 시간을 좀 벌려고 했는데, 이러면 대화가 너무 빨리 끝나잖아.
이마를 짚고 싶은 걸 참으며 대신관을 보았다.
나를 대할 때보다 한결 편한 표정이었다.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슴에 손을 올렸다.
“저는 절대 반란에 가담한 적이 없습니다, 전하. 레바나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신관이 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말을 못 믿겠다고 할 순 없었다.
그럼 대신관이 방금 노발대발했던 이유처럼 정말 신을 모욕하는 게 되어 버리니 말이다.
뚱한 얼굴로 룩소르를 보자 그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너에게 뭘 바라겠니.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레바나의 대신관을 보았다.
다시 입을 열려는데 그가 선수를 빼앗아 갔다.
“사실 굉장히 불쾌합니다. 제가 무언가를 바란 것도 아닌데 단순히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런 취급이라니…….”
가만히 듣고 있던 키네시아가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그전에도 네페르트 부인과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셨고, 무엇보다 대신관님 입으로 어제 반란을 아셨다고 시인하셨잖아요.”
“맞아. 당장 알리지 않은 건 묵인한 거니까 공범으로 몰려도 할 말이 없지.”
나까지 거들자 대신관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표정으로 자신이 정말 억울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었다.
불편한 침묵이 지속되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대신관은 체념한 사람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의심을 벗을 수 있겠습니까?”
“레바나 신전을 조사하게 해 주시죠?”
이번에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는지 대신관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신전은 성역입니다.”
“알아요. 그러니 양해를 구하는 거잖아요.”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성역을 침범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뭐만 하면 모독이래. 그래도 뭐, 저렇게 거세게 반발할 줄 알았다.
나 역시 진짜 신전을 뒤질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그럴 수 있으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양해를 얻고 조사에 들어가면 숨길 만한 건 다 숨길 수 있기에 별다른 의미도 없었다.
그냥 서로 기분만 상할 뿐이지.
하지만 이건 시간 벌기용이므로 물러나지 않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얼마나 대치하고 있었을까, 타솔라와 미론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룩소르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내 뒤에 섰다.
시킨 일이 끝난 것이다.
나는 대신관이 수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도록 속을 몇 번 더 긁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 룩소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는 의견 차이가 좁혀지지 않겠네.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게 어떨까?”
대신관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깃들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내 신호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키네시아였다.
“그래요. 다들 갑작스러운 소란에 피곤했을 테니까……. 나머지 이야기는 조사가 모두 끝난 뒤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
“그래. 그러자꾸나.”
룩소르는 지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해하면서도 미안함을 가득 담은 미소를 지으며 대신관에게 말했다.
“반란이 민감한 사안이라 본의 아니게 몰아붙인 점, 대신관도 이해해 주시오. 모든 게 정확해지면 다시 이야기 하십시다.”
국왕이 직접 저렇게 말하니 대신관은 감히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노려보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룩소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볼 테니 옥체 보전 잘하시고 필요하면 찾아 주십시오, 언제든 괜찮습니다.”
“생각해 주어 고맙소, 대신관.”
“예. 특히 전하를 위해서라면 기적은 행하지 못해도 성수는 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신전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형식적인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대신관이 덧붙인 말이 영 껄끄러웠다.
표정이나 말투가 특별한 것은 아니었는데 마치 꼭 한 번은 찾게 될 거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는 룩소르에게 인사하고 나에게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곧 은근한 미소를 머금고 제일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귀족들 역시 상황을 보고하고 집무실을 나갔다.
기사들까지 내보내고 나자 안에는 국왕 일가만 남게 되었다.
레바나의 대신관이 앉아 있던 자리를 빤히 보던 포넨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저 정도로 부인하는 걸 보면 진짜 몰랐던 거 아니야? 신의 이름까지 걸었잖아.”
“그게 이상한 거야.”
“그게 뭐가 이상해.”
“신관은 함부로 신의 이름을 걸지 않아.”
“네가 신관을 봤으면 뭐 얼마나 봤다고 단정하냐? 별로 만나 보지도 못한 게.”
별로 만나 보지 못했긴. 아주 끼고 살았구만.
그를 생각하자 또 속이 아팠다. 눈을 감고 몸을 기대는데 시종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마법 전서구로 서신이 왔습니다.”
“이리 주게.”
시종장이 두 개의 편지를 건네고 물러났다.
하나는 레튜니아, 하나는 파라돈에서 온 것이었다.
“두 나라 다 직접 사람을 보내 자국의 사절단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다는구나.”
“소식이 정말 빠르네요.”
키네시아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마법 전서구를 보낼 정도면 사절단 중에서도 연락용 마법 물품을 가진 사람이 있을 테니 소식이 빠를 수밖에.
“허락해. 어차피 귀빈 중에는 다친 사람도 없잖아. 대신 도착해서 이것저것 관여하기 전에 반역자들 조사와 처형을 끝내 놔야 해.”
룩소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친필로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로그리예한테 갈게.”
문을 나서는 내 뒤로 포넨트와 키네시아, 타솔라와 미론이 따라왔다.
“그러고 보니까 로그리예 놈은 왜 그런 거야? 어디 아프대?”
“직접 물어봐.”
“그래. 너 오면 또 정신 팔려서 헛소리나 할 테니까 나는 먼저 가 있는다. 네 방에 있지?”
고개를 끄덕이자 포넨트가 걸음을 빨리해 나를 지나쳐 갔다.
나는 여전히 내 옆에 있는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넌 걱정 안 돼?”
“이라네 네 태도를 보니까 로그리예가 심하게 아픈 건 아닌 것 같아서. 그리고 어차피 우리도 거기로 가고 있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넓은 복도에 한동안 구두 굽이 또각거리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키네시아는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나를 따라오다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레바나의 대신관은 그렇게 둬도 되는 거야?”
“안 그래도 증거를 모아 오라고 시켰어. 그리고 배신당한 네페르트 부인이 가만히 있겠어? 죽을 땐 죽더라도 레바나 대신관은 데려가려고 할걸.”
“레바나 대신관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게 밝혀져도 걱정이야.”
그럴 만도 했다. 레바나 신전은 이미 남동 대륙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몇몇 국가들은 샤마흐와 함께 레바나 신을 공공연히 인정했다.
샤마흐의 신전은 무너졌어도 믿음은 여전히 뿌리가 깊었기 때문에 레바나를 단독으로 국교로 삼은 국가는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금기시하는 곳도 없었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레바나의 대신관이니 처형하기엔 무리가 따를 것이다.
“그래도 에피파네스에서 몰아낼 순 있겠지. 레바나 신전이 사들인 땅도 다시 가져오고.”
“잘되어야 할 텐데. 반란은 막았는데도 일이 틀어진 기분이야.”
“우리 목표는 레바나였으니까.”
“그런데 레바나의 대신관이 아버지를 구한 것처럼 되었잖아. 설마 그걸로 무언가를 요구하진 않겠지?”
“의심하는 티를 내 놨으니까 일단은 노골적으로 원하는 걸 드러내진 못할 거야.”
레바나의 대신관이 뭔가를 먼저 요구한 순간 의도를 가지고 반란을 모른 척한 게 된다.
그러면 이득을 취하기 위해 국왕을 위험에 빠트린 것이니 반란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어진다.
“완전히 잡진 못해도 원하는 것을 내어 주지 않을 순 있지.”
물론 내 자존심에는 금이 가겠지만 말이다.
사실 여러 부분이 틀어져 이미 타격을 좀 받은 상태다.
마음 같아서는 레바나 대신관의 머리털을 죄다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쓰린 속을 붙잡고 있는데 키네시아가 그 위에 소금을 뿌렸다.
“나는 네페르트 부인이 너를 공격할 줄 꿈에도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