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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85화 (85/151)

<85화>

눈만 깜박이고 있던 이라네리아가 어색한 표정으로 오틸리에를 밀어 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반란이 진압되었으니 마무리를 해야지.”

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방 안의 사람들은 전부 이라네만을 보고 있었다. 시선이 흩어질 생각을 안 하자 이라네리아가 툭 말을 내뱉었다.

“뭘 봐?”

“또 성질부리네.”

포넨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딱밤을 때리기 위해 주먹을 휘두르려던 이라네리아가 플로레타의 목소리에 손을 내렸다.

“리아가 마무리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 거 잘하잖아…….”

“그런 거?”

“말로 사람들 휘두르는 거.”

이라네리아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며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저건 칭찬이야 욕이야? 욕이면 딱밤을 때려 줘야 하는데, 영 애매하네.’

주먹만 쥐었다 폈다 하던 이라네리아는 판단을 포기하고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국왕이 없을 땐 원래 왕비가 치하하는 거야. 아니면 키네시아가 하든지. 하다못해 포넨트도 있는데-”

“내 이름 앞에는 왜 그런 수식어가 붙냐?”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지.”

이라네리아는 아주 능숙하게 포넨트의 말을 무시하며 오틸리에와 키네시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둘 중 누구를 내보내는 게 더 나을지 고민했다.

키네시아는 그런 이라네리아를 유심히 바라봤다.

별관으로 들어오기 전 목격한 살기 어린 표정은 거짓이었다는 듯, 그녀는 포넨트와 아이처럼 투닥거리고 있었다.

피 칠갑을 한 채 본관으로 들어간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도대체 속을 얼마나 잘 숨기는 거야.’

황제로 지내는 삶 동안 얼마나 자신을 꽁꽁 숨기며 버텼으면 저렇게 되었을까 싶었다. 혼자 버텼을 것을 상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연민보다는 두려움이 더 강렬했다.

비명이 난무했던 곳에서 걸어 나오면서도 꼿꼿하게 핀 허리, 치켜든 턱.

잘 벼린 검처럼 날카롭게 번뜩이던 황금색 눈동자가 떠오르자 어쩐지 등골이 섬뜩했다.

키네시아는 자신이 본 장면이 너무나 강렬해 착각으로 치부할 수도, 쉽게 잊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새삼 제 동생의 몸에 들어가 있는 것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이라네 황제였지. 그래. 그녀는 황제였어…….’

왕국이었던 에피파네스를 제국의 위치까지 끌어다 놓은 사람이다.

자비로운 모습만 있을 순 없다. 잔혹한 모습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잔혹한 모습이 이라네 황제의 본성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이라네리아는 종종 자비를 베풀었으나, 그것도 모든 게 그녀의 의지대로 흘러갈 때뿐이었다.

만약 이라네리아가 갑자기 마음을 바꿔 에피파네스 왕국을 되찾고 싶어 한다면?

그녀가 본심을 숨기려고만 한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키네시아 역시 아마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찝찝하고 은밀한 불안은 오래 가지 못했다.

‘폐하가 그럴 리 없어.’

키네시아는 6년 동안 동고동락한 것을 떠올리며 불안의 싹을 잘라 냈다.

그러나 감정의 뿌리는 이미 그녀의 여린 부분을 깊이 파고들었다.

본인이 그 사실을 눈치채기도 전에, 밖에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들렸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로그리예였다.

그가 커다란 창문을 열어 발코니로 나갔다.

“저기, 국왕 전하 아니야?”

그의 말에 국왕 일가가 우르르 움직였다.

이라네리아가 로그리예의 옆에 섰다. 그녀는 환호하는 군사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룩소르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몸을 돌렸다.

그 바람에 뒤에 서 있던 플로레타는 이라네리아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누가 봐도 화난 표정의 이라네리아와 마주하게 된 플로레타는 화들짝 놀라 후다닥 이라네리아의 앞에서 비켜섰다.

오틸리에에게 찰싹 붙은 플로레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리, 리아. 왜 그래?”

“아니, 전하는 신전에 있으라니까 왜 온 거야?”

짜증과 걱정이 뒤섞인 목소리로 질문에 가까운 답을 하며 이라네리아는 성큼성큼 별관을 나섰다.

룩소르는 빠르게 다가오는 이라네리아에게 양팔을 활짝 벌렸다.

이라네리아는 항상 팔 밑으로 쏙 빠져나가 포옹을 피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한쪽 무릎까지 굽혀 앉았다.

하지만 이라네리아는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룩소르를 안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제 아빠의 팔을 홱 걷어 낸 뒤 턱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려 보고 난 후에야 뒤로 한 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난 표정이었다.

“신전에 있으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중독된 흔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왔단다. 오기 전에 성수도 마셨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라네리아가 룩소르의 안색을 다시 한번 살폈다. 칼날이 스쳤던 그의 팔뚝도 확인했다.

샤마흐 신관들의 신성력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탓인지 상처에서는 아직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괴사하려는 조짐이나 변색 같은 증상은 없어 보였고 안색도 멀쩡했다.

이라네리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정말 독도 없이 무작정 찌르려고 한 건가?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그렇게 허술한 사람이었나?

이라네리아는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홱 돌려 곁에 서 있는 지시스, 미론, 타솔라를 보았다.

룩소르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에 세 사람이 끄덕였다.

그런데도 이라네리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본능이 불길한 일이 생길 거라고 외쳐 댔다.

로그리예가 다가와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그녀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공주님.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는 게 어떨까?”

이라네리아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포박한 반란군을 정리한 셰피오 자작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로그리예의 말을 들은 룩소르도 동의했다.

“그래. 다들 들어가자꾸나. 오틸리에, 고생이 많았소. 너희도 무서웠을 텐데 잘해 주었다. 이리 오렴, 내 보물들.”

그는 장성한 자식들을 아이처럼 어르며 한 명 한 명씩 안아 주었다.

이라네리아는 역시나 그의 손을 피해 로그리예의 곁으로 물러났다.

룩소르가 아주 잠시 도둑놈에게 반지를 빼앗긴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라네리아는 먼저 본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가족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느라 정신없는 사이, 손짓으로 타솔라와 지시스, 미론을 불렀다.

그리고 걸음을 늦춰 나란히 걷던 가족들의 틈을 빠져나왔다.

“타솔라.”

“예, 공주님.”

“샤마흐 신전으로 가서 그나마 신성력이 제일 강한 신관을 데려와.”

“알겠습니다.”

타솔라가 허리를 깊게 숙이고 몸을 돌려 떠났다.

“지시스. 너는 오늘 종일 전하 곁에 있어. 조금이라도 신변에 변화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예.”

지시스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미론이 기대감이 어린 얼굴로 이라네리아에게 다가왔다.

“공주님. 저는 뭘 할까요?”

“가서 아이들에게 정보를 모아 오라고 해. 일이 틀어졌으니까 레바나 신전이 이번 반란에 가담했다는 증거를 찾아야 해.”

“네. 맡겨 주세요.”

미론이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로그리예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라네리아의 머리에 볼을 툭 기댔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채 앞서가는 가족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다들 룩소르의 건강을 걱정하느라 이라네리아가 뒤처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는 이라네리아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으나, 로그리예의 눈에는 쓸쓸해 보였다.

그는 팔을 늘어트려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아주 잠시, 그의 청보라색 눈동자에 빛이 일렁였다.

동시에 포넨트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돌아봤다.

“야! 너 왜 안 와?”

그제야 다른 가족들도 이라네리아의 부재를 깨닫고 몸을 돌렸다. 오틸리에 역시 이라네리아를 불렀다.

“리아. 어서 오렴.”

이라네리아가 묘한 표정으로 움직이질 않자 로그리예가 그녀에게 팔짱을 꼈다.

“공주님, 왜 가만히 있어? 가자.”

이라네리아는 로그리예에게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이는 그녀의 얼굴 위로 미약하게나마 미소가 스쳤다.

***

집무실로 들어온 룩소르는 반란 진압을 도왔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오틸리에와 키네시아, 포넨트도 자리에 앉았다.

플로레타는 어려운 것과 무거운 분위기가 싫다며 방으로 돌아갔다.

로그리예는 내 옆에 있었지만 누가 봐도 피곤해 보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녀석의 얼굴은 새하얀 도자기만큼이나 창백했다.

나는 로그리예의 옆에 바짝 붙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왜 그래?”

“응? 뭐가?”

“창백하잖아.”

“창백?”

로그리예가 나를 빤히 보다가 활짝 웃고는 화장수를 바르듯 제 볼을 양손으로 찰싹찰싹 두드렸다.

별안간 들린 커다란 마찰음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그리예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때, 공주님? 이제 혈색이 돌아?”

“이, 미친놈이…….”

그는 내 감탄사에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 창백하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 다친 곳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눈으로 그를 쭉 훑었다. 상처는 없었으나 대신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톱은 몸에 피가 도는 게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푸른색이었다. 잡아 보니 얼음처럼 차가웠다.

안 되겠다 싶어 일단 로그리예의 팔을 잡아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 상태가 좀 이상한 거 같으니까 치워 놓고 올게. 진행하고 있어.”

“나 괜찮은데?”

“안 괜찮으니까 따라와.”

“어머, 박력.”

그는 핏기 없는 얼굴로 잘도 헛소리를 해 댔다. 나는 로그리예를 끌고 집무실을 나왔다.

내 방으로 갈지 저놈의 방으로 갈지 고민하느라 잠깐 걸음을 멈췄는데 옆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우욱……!”

로그리예가 검붉은 핏덩이를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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