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오틸리에의 명령으로 궁정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대피하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실제로 서두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은 느리게 별관으로 이동하다가 정원에 진입하는 국왕군을 발견하고 나서야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너나 할 것 없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키네시아는 한꺼번에 이동하는 인파에 휩쓸려서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감독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시종 한 명이 달려왔다.
“공주님 스페르모 바멜마흐 님이 나오질 않으십니다.”
스페르모 바멜마흐라면, 레튜니아 황자의 이름이었다.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채 은둔 생활을 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후계자 싸움에서 밀려나 도망쳤다, 버림받았다, 사실은 백치라 쓸모없어 볼모로 보냈으나 시종이 나오지 못 나오게 하는 것이다, 등등.
말은 많았으나 실상을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데려오지 않은 것을 보면 여러모로 대제국의 황족 치고는 대접을 받지 못하는 모양이긴 한가 보다.
“내가 가 볼 테니 피해 있어요.”
“그런데 평소에도 문을 잘 열어 주시지 않으셔서…….”
“그건 걱정 말아요. 대신 왕비 전하께 제가 어디로 갔는지 전해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시종이 스페르모의 방 위치를 알려 준 뒤,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오틸리에에게로 향했다.
키네시아는 곧장 몸을 돌려 본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포넨트가 키네시아를 따라갔다.
“문을 안 열어 준다는데 어쩌려고?”
키네시아가 속도를 늦추지 않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긴급 상황이니까 부수기라도 해야지.”
“너는 어째 점점 더 과격해지는 것 같냐…….”
키네시아는 가볍게 미소 짓고 반란이 벌어지고 있는 중앙 홀을 피하기 위해 건물 뒤로 갔다.
안은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는지 간간이 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막 대연회장 뒤를 지나가려 할 때였다.
“으아아악!”
누군가가 절명하는 소리가 들렸다. 포넨트와 키네시아의 걸음이 동시에 멈췄다.
“이라네 아직 저기에 있지 않냐?”
키네시아는 당장에라도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갈 것 같은 포넨트를 붙잡았다.
“가사단하고 로그리예가 같이 있잖아. 괜찮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라네가 한 말 기억하지?”
일이 시작하기 전에 이라네리아는 그들에게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기든 맡은 일에만 집중하라고 했었다.
포넨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키네시아가 제 쌍둥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인질로 잡히지 않게 대피시키는 거야.”
키네시아가 다시 스페르모의 방이 있는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걱정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연신 중앙홀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거리는 점점 줄어들어 두 사람은 스페르모의 방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키네시아는 망설임 없이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포넨트가 주위를 경계하며 키네시아에게 물었다.
“사람이 없는 사이에 도망친 거 아니야?”
키네시아는 문고리를 돌려 보고 고개를 저었다.
도망친 것이라면 문이 열려 있어야 하는데 스페르모의 방문은 잠겨 있었다.
포넨트가 키네시아를 어깨로 밀며 검을 집어넣고 문을 쾅쾅 두드렸다.
“황자님! 대피하셔야 합니다!”
“열지 않으시면 부수고 들어갈게요.”
경고했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키네시아가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이자 포넨트가 키네시아와 속도를 맞춰 방문에 몸을 부딪쳤다.
몇 번 반복하자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키네시아는 안으로 들어가 황자를 찾았다.
그러나 황자는 물론 그의 시종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검을 빼 들었다.
만약 반란군이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인질을 잡고 있는 것이라면 무력을 써서라도 구해 내야 했다.
포넨트도 검을 든 채 키네시아에게 다가왔다.
“황자님? 안에 계십니까?”
포넨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키네시아도 포넨트의 등을 지키며 같이 움직였다.
그들이 막 옷장을 지나 욕실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옷장 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췄다. 옷장과 더 가까운 키네시아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자님. 안에 계신가요? 괜찮으니 나오세요.”
옷장이 다시 덜컹거렸다.
반란군과 함께 숨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계속 나오지 않는다면 열어서 확인해 봐야 한다.
키네시아가 포넨트에게 기습에 대비하라는 듯 눈짓하고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장까지 약 다섯 발자국 정도 남았을 때, 문이 미세한 소음을 내며 양쪽으로 벌어졌다.
“황자님?”
안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양손으로 머리를 완전히 감싼 채, 구석에서 커다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키네시아는 문을 활짝 열어 다른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고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스페르모 황자님이신가요?”
남자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피했다.
키네시아는 그제야 자신이 스페르모 황자와 안면이 없는 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는 에피파네스의 공주 키네시아 벨로아스예요. 안전한 곳으로 모셔 가기 위해 왔으니 겁먹지 않으셔도 돼요.”
그제야 스페르모가 완전히 고개를 들었다.
키네시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페르모는 내밀어진 손과 키네시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제 손을 뻗었다.
나무늘보 같은 속도에 포넨트가 가슴을 두드렸다. 쳐다보지 않는 게 심신 건강에 나을 것 같아 그들에게서 눈을 돌리고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점검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다시 키네시아 쪽을 봤으나 스페르모 황자의 손은 여전히 허공에 있었다.
포넨트는 키네시아의 손을 잡을지 말지 고민하는 스페르모를 보며 진심으로 고민했다.
‘확 뒷덜미를 잡아 끌어내 버려?’
그의 얼굴에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키네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포넨트가 불경스러운 짓을 하기 전에 손을 더 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스페르모의 손끝에 닿았다. 스페르모가 피하지 않자 키네시아는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스페르모가 옷장 밖으로 끌려 나왔다.
키네시아가 손을 놓고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이 들어온 적은 없나요?”
이번에도 스페르모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답답한 포넨트가 뒤에서 두 사람을 재촉했다.
“야. 이러다 해 지겠다.”
키네시아가 포넨트를 잠시 흘겨보고 앞장섰다. 두 사람은 스페르모를 가운데에 두고 주변을 경계하며 걸었다.
뒤뜰을 통해서 빠져나가는데 대연회장 안은 아까와 달리 조용했다.
불안해져 안을 살펴보고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 무렵, 포넨트가 키네시아의 등을 툭툭 쳤다.
“저거 이라네 아니야?”
포넨트의 말이 맞았다. 이라네리아가 먼 곳에서 본관을 향해 가고 있는 게 보였다.
얼굴과 옷에는 피가 흥건했고, 표정은 마주치면 목을 내줘야 할 만큼 살벌했다.
감히 다가갈 수도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으나, 로그리예는 마냥 좋다는 듯 사랑에 빠진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포넨트가 진저리를 치며 팔뚝을 문질렀다.
“하여간, 미친놈.”
“이라네, 다치진 않았겠지?”
“다쳤으면 로그리예가 먼저 난리 났겠지.”
그건 그렇다.
게다가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오직 앞만 보고 걷는 걸 보면 상황도 잘 마무리된 것 같았다.
키네시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스페르모는 이라네리아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이라네리아가 사라지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군사들이 행과 열을 맞춰 서 있는 정원이었다.
“국왕군인가?”
“맞아요.”
스페르모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차분했다. 너무 작아 집중하지 않으면 잘 안 들리긴 했지만 말이다.
키네시아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은 침묵 속에서 별관에 도착했다.
별관을 에워싸고 있는 병사들이 세 사람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키네시아 뒤에 숨어 있던 스페르모 황자는 안에 들어오자마자 빠르게 걸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를 보며 포넨트가 작게 감탄했다.
“낯 엄청 가리네.”
“그러게. 그동안 밖에 안 나온 이유가 있었어.”
스페르모 황자가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장이 나타났다.
“공주님, 왕자님. 왕비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플로레타가 달려와 두 사람을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키네시아는 플로레타의 등을 토닥이며 오틸리에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키네시아와 포넨트가 다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돌아오지 않은 이라네리아와 신전으로 간 룩소르가 걱정되었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리아를 찾으러 가 봐야 할 것 같구나. 너희는 여기 있으렴.”
플로레타가 화들짝 놀라며 포넨트와 플로레타를 뿌리치고 오틸리에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 안 돼요. 아직 밖이 위험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더욱 나가 봐야지. 리아가 아직 밖에 있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네 사람이 깜짝 놀라며 문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깔끔한 모습의 이라네리아와 로그리예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라네리아의 표정은 깔끔하지 않았다.
밖까지 새어 나오는 오틸리에의 말을 들은 탓이었다.
“가긴 어딜 가. 내가 말했지? 괜히 나갔다가 잡혀서 귀찮게……!”
뾰족한 말이 나오다 말고 이라네리아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오틸리에가 단숨에 달려가 제 막내딸을 끌어안은 탓이었다.
“리아! 내 아가. 다치진 않았니?”
이라네리아가 눈을 크게 뜬 채 몸을 굳혔다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작게 대답했다.
“……응.”
“감사합니다, 샤마흐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연신 중얼거리며 이라네리아를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