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남자는 그대로 말의 다리를 베었다. 기사 한 명이 낙마하자 다른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 남자를 에워쌌다.
“정체를 밝혀라!”
남자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소리쳤다.
“나는 반겔레스 셰피오, 반군을 막으라는 국왕 전하의 명령을 받고 왔다!”
그의 말에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검을 휘둘렀다.
반겔레스는 저에게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반란군을 한 명씩 제압하며 뒤로 물러나 있는 주민들에게 소리쳤다.
“국왕 전하께서는 백성이 다치는 것을 바라지 않소! 그러니 다들 돌아가 문을 잠그시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반겔레스가 막 마지막 반란군 기사의 목을 베었을 때, 멀리서는 천 명이 훌쩍 넘는 인원의 반란군이 대로를 통해 궁전으로 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커튼 틈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무기를 챙겼다.
아무리 봐도 한 명이서 반란군을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한데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전부 같은 생각이었다.
자그마한 힘이나마 보태 궁전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문을 열기도 전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왕가의 깃발을 든 몇만의 군사가 궁전을 에워싸듯 쏟아져 나와 광장으로 들어섰다.
반겔레스는 더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멈춰선 반군을 향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모두 검을 들어 궁전을 지켜라!”
그 말을 들은 군사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반란군에 속해 있던 기사들도 검과 창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공격한 것은 국왕군이 아니었다. 미리 불리해지면 배신하기로 게텔린 부인과 말을 맞췄던 귀족들이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칼을 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에 내 몸은 룩소르의 무게에 휩쓸렸다.
그가 나를 감싸며 넘어진 것이었다.
왜 룩소르가 아닌 나를 노린 거지? 질문에 답을 내릴 틈도 없이 누군가의 비명이 음악 소리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룩소르……!”
“공주님!”
“어서 전하와 공주님을 보호하십시오!”
마지막에 소리친 사람은 레바나의 대신관이었다.
하지만 그가 왜……?
순식간에 달려온 로그리예가 나를 안듯이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에게 몸을 맡기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레바나의 대신관이 칼을 든 네페르트 부인을 밀쳐 낸 것 같았다.
그녀가 나가떨어지자마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품에서 몰래 반입한 무기를 꺼냈다. 동시에 우리 쪽에 서 있던 기사들도 검을 빼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라파일이 있는 곳을 보았다.
그 자리에 신관복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나는 멍해지려는 정신을 붙잡고 룩소르를 로그리예의 뒤로 보내며 소리쳤다.
“키네시아!”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이 여기저기서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로그리예도 예장용으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았다.
그리고 내게로 날아오는 칼날을 쳐냈다.
기사들이 주변으로 몰려와 나와 룩소르를 에워쌌다.
나는 키네시아가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으며 룩소르의 상태를 살폈다.
“전하, 괜찮아?”
“괜찮다, 아가. 아빠 걱정은 말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괜찮아 보였다.
다만 레바나 대신관이 네페르트 부인을 밀칠 때 칼날이 룩소르의 팔뚝을 스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옷자락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으나 상처가 깊진 않았다.
“어서 일을 마무리하자꾸나.”
룩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이려고 했으나 나는 그를 붙잡았다.
“타솔라, 지시스, 미론!”
세 사람이 상대하던 놈들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당장 내 쪽으로 달려왔다.
“전하를 샤마흐 신전으로 모셔.”
세 사람은 룩소르를 보호하며 검을 들었다.
“전하. 호위하겠습니다.”
유혈이 낭자한 주변을 보며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도 룩소르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괜찮다. 내가 자리에 있어야…….”
나는 그를 지시스 쪽으로 밀었다.
“칼에 독이 발려져 있었을 수도 있어.”
만약 정말 그렇다면 시간을 지체하는 것만으로도 룩소르의 목숨이 위험해진다.
샤마흐 신전 신관들은 미약하게나마 신성력이 회복되었으니 룩소르의 목숨을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레바나의 대신관이 룩소르를 치료하겠다고 나서면 대신관이 원하는 것을 손에 쥐여 줘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서!”
내가 소리치자 룩소르가 세 사람에게 호위를 받으며 궁전을 빠져나갔다.
로그리예가 달려드는 놈을 베어 내며 나를 끌어 제 뒤로 숨겼다.
“공주님. 우리도 물러나자.”
“아니.”
나는 허리를 숙여 주인을 잃은 검 한 자루를 주워 들었다.
몸을 일으켜 정면을 응시했다.
레바나의 대신관은 기사들에게 보호받으며 몸을 피한 뒤였다.
네페르트 부인은 배신감과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쯤 궁전으로 밀고 들어왔어야 하는데, 다른 병사들은 어디 있는 거야!”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녀와 뜻을 함께하기로 했던 귀족들은 대부분 도망치고 난 뒤였다.
숨겨 들여온 그녀의 병사와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번쩍이 몇 명만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녀의 곁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나 기사들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후작 부인! 일단 피해야겠습니다. 상황이 너무 안 좋습니다!”
몸을 돌리던 네페르트 부인과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수천 개의 발이 한 사람의 것처럼 움직이며 전진하는 소리였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품위조차 잊고 허둥지둥 몸을 틀었다.
나는 검을 든 채로 네페르트 부인의 등을 응시했다.
“가서 반란의 주동자를 잡아 와.”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로그리예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는 몇 남지 않은 반란군을 정리하며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뒤를 쫓아갔다.
나는 그가 터놓은 길을 따라 걸었다.
바닥에 고인 피를 밟을 때마다 쇠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오랜만에 맡는 냄새에 신경이 곤두섰다.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네페르트 부인은 결국 잡힐 것이다.
그러나 본래 목적이었던 레바나 신전의 대신관은 보란 듯이 내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게 보호하려던 룩소르까지 미약하게나마 상처를 입었다.
‘내가 뭘 빠트렸지? 레바나의 대신관은 내 계획을 미리 알고 네페르트 부인을 배신한 건가?’
좀 더 치밀해야 했다. 상황을 빠짐없이 예의 주시하고, 사냥감을 잡기 위해 더 촘촘히 그물을 짰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라파일이 나타나 뒤흔들었다고 그물에 구멍이 난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대어가 빠져나갈 정도로 큰 구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내 실책이야.’
자신에게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지르밟듯이 걸음을 옮겼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거세게 저항하며 끌려오는 게 보였다.
“이거 놔! 놓으라고!”
룩소르의 상처가 떠오르자 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검 자루를 힘주어 잡는데 로그리예가 다가와 내 앞에 섰다.
그의 손이 검 자루를 쥔 내 손등을 감쌌다.
나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네페르트 후작 부인을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연회장이 있었지만 주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로그리예가 그 정적을 깨트렸다.
“자기. 표정이 너무 무서워.”
그가 평소처럼 생글거리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시선을 주자 그가 턱짓으로 네페르트 부인을 가리켰다.
“공주님이 처형하게?”
그럴 생각이었다. 반란을 저지른 자는 즉결 처형해야 옳으니까.
하지만 손에 힘을 풀었다.
로그리예가 나를 부르는 호칭에 정신이 돌아온 덕이었다.
나는 황제가 아니라 공주다.
그리고 반란군의 즉결 처형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은 군주뿐이다.
즉 나에게는 권한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털어 내고 검을 집어 던졌다.
옆에서 로그리예가 어이쿠, 하며 맥없이 떨어지는 검을 요란하게 피했다.
“후우…….”
숨을 길게 내쉬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기사를 찾아 물었다.
“다른 가족들은?”
“귀빈들과 참석하지 않은 사절단을 모두 데리고 별관으로 무사히 피신하셨습니다.”
“산 것들은 포박해서 가둬 두고, 죽은 것들은 치워.”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단장 눈에는 저게 산 거로 보여, 죽은 거로 보여?”
“……포박해서 가둬 두겠습니다.”
몸을 돌리자 등 뒤로 누군가가 참았던 숨을 터트렸다.
그 뒤로 정적이 깨지고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로그리예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란히 걷는 그에게 잠깐 시선을 준 뒤 밖으로 나갔다.
정원은 군사들로 꽉 차 있었다.
맨 앞에 선 반겔레스가 보였다. 룩소르나 키네시아가 나서기 전에 내가 먼저 치하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아 몸을 숨겨 방으로 돌아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처참했다.
하얗던 드레스는 이리저리 피가 튀어 오묘한 색으로 변해 있었다.
붉은 보석이 유난히 눈에 거슬러 풀어 버리고 욕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나오자 손수건을 들고 서 있는 로그리예가 보였다. 직접 닦아 주려는 그의 손길을 피하고 손수건만 가져왔다.
내가 물기를 닦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별관으로 갈 거지? 호위해 줄게.”
“그 전에.”
걸음을 옮기려는 그의 옷을 붙잡았다.
별것 아닌 행동에도 그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뭐 할까? 우리 둘이 약혼식 마무리라도 할까?”
“세수하고 와.”
“…….”
“애들 놀라.”
그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순순히 욕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