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나보고 폭군이래?-82화 (82/151)

<82화>

“이게 뭐야?”

“안 하고 나올 것 같아서 미리 준비했지.”

그가 목걸이를 든 채 끌어안듯이 내 목에 팔을 둘렀다.

곧 뒷덜미 쪽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한 발자국 물러나 내 팔을 들어 팔짱을 끼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주인공인데 목이 허전하면 섭섭하잖아. 물론 목걸이가 없어도 공주님은 빛이 나지만.”

“……하여튼. 앙큼한 놈.”

“끼고 살맛 나겠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로그리예는 자기 말에 긍정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싱글벙글 웃었다.

나는 빗장뼈 사이까지 내려온 보석을 만지작거리다가 로그리예를 응시했다.

다 죽어 가던 포넨트, 플로레타, 키네시아와는 다르게 여유로웠다.

“너는 안 무섭니?”

“음……. 혹시 벌벌 떠는 게 더 귀여워 보여? 그러면 무서워해 볼게.”

저건 또 무슨 말이야.

“안 무섭다는 말 한번 희한하게 하는구나?”

로그리예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나는 공주님만 안 다치면 되는데, 공주님 옆에는 내가 있잖아.”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렇지만 근거가 있는 자만이었기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만 설레설레 젓고 대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제일 먼저 네페르트 부인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았다.

그녀는 레바나의 대신관과 함께 단상과 제법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고개를 돌려 내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대신관은 평소처럼 인자한 미소를 머금으며 눈짓으로 인사했다.

반란을 도모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정한 표정이었다.

속내를 감추는 능구렁이 같은 놈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어쩐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불길한데…….’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자 로그리예가 귓속말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얼마 뒤,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오자 식이 진행되었다.

나는 로그리예와 함께 단상에 올라갔다.

시종장의 말에 따라 약혼 서약서를 읽어 봤다.

지참금이나 재산 분할금에 관한 내용, 그리고 파혼 가능한 사유 같은 게 적혀 있었다. 내가 심사숙고 끝에 만든 서약서건만, 로그리예는 펜을 들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내용이 낭만적이지 않아서 서명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어.”

그의 옆구리를 안 보이게 툭 치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냥 쁠리 끝내르.”

나를 따라 거의 반사적으로 미소 지었던 로그리예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서약서에 서명했다.

그러자 시종장이 서약서를 가져가고 반지를 가져왔다.

로그리예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크고 곧은 그의 손에 약혼반지를 끼워 주었다.

제 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약혼반지를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돌연 눈물을 흘릴 것처럼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그래 보여.”

로그리예가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며 물었다.

“공주님은?”

필요해서 하는 결혼에 행복이 필요할까? 그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한 약혼식에 초를 칠 정도로 배려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 입을 다물었다.

로그리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나에게 눈을 맞추며 내 반지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 행복이 같은 속도로 오지 않는 걸 아니까. 어제 말했듯이 나는 변하지 않고 공주님 곁을 지킬게.”

그가 손을 꼭 잡았다.

로그리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이미 파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라파일이 망가진 것을 보니 도무지 필요에 의한 결혼을 강행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이건 내 몸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의 관계가 약혼자 이상으로 발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감추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등 뒤에서 음악이 흘렀다.

로그리예와 함께 중앙으로 나가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과 레바나 대신관을 중심으로 여러 눈빛이 오고 가는 게 보였다.

그러나 아직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나와 로그리예의 춤이 끝나고 나자 룩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우리 공주, 오랜만에 아빠랑 춤춰 주겠느냐?”

“당연한 소리를.”

내가 룩소르의 팔에 손을 올리자 로그리예는 뒤로 물러났다. 룩소르가 그 자리를 채우며 내 손을 잡았다.

곧 다가올 일을 걱정한 탓인지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긴장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움직여.”

“그러마. 걱정하지 말거라.”

룩소르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음악에 맞춰 움직이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그때, 샤마흐 신전의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샤마흐의 사제들은 다 내보낸 거 아니었나?’

의문을 품자마자 그가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문득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신관의 손등을 바라봤다.

거기엔 라파일의 교단을 상징하는 보라색 태양이 찍혀 있었다.

자세히 보려고 하자마자 윤무곡의 경쾌한 박자에 맞춰 시야가 회전했다.

다시 샤마흐의 신관으로 위장한 남자를 보았을 때, 그의 시선은 나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차갑고 소름 끼치는 눈으로 로그리예를 보고 있었다.

다시 몸이 회전한다.

그 속도에 맞춰 라파일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다른 몸을 찾는다고 했다.

한 번 더, 풍경이 눈앞을 스쳤다. 동시에 라파일이 했던 말이 로즈라에게 들었던 정보들과 겹쳐졌다.

신의 대리자는 보고된 인상착의가 제각각이라 몇 명인지 모른다는 것.

깨달음은 섬광과도 같았다.

‘에리오가 라파일이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 남자가, 저 남자가 바로 라파일인 것이다!

나는 룩소르의 리드에 맞춰 춤을 추면서도 고개를 돌려 로그리예를 찾았다.

수상함을 느낀 것인지 로그리예 역시 라파일을 보고 있었다.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을 보자 불안해졌다.

떠나지 않겠다는 라파일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나는 펠리온과 거리를 뒀다. 그와는 공적으로만 만났다.

그러나 그때에도 라파일은 펠리온에게 심한 질투를 느꼈다.

그런 그가 내 약혼자인 로그리예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예전이라면 라파일이 사람을 헤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로그리예의 검술이 아무리 대단하다지만 신의 힘을 쓰는 라파일을 이길 순 없어. 이대로 두면 로그리예가 위험해.’

나와 룩소르의 춤이 끝나면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된다.

네페르트 부인이 움직여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로그리예를 라파일한테서 떨어트려야 놔야 한다.

아직 음악이 끝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그 순간, 시야 끄트머리에 날카로운 빛이 번쩍였다.

본능적으로 빛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칼끝이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

여러 크기의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의 선율이 어우러져 거리를 가득 메웠다.

사람들은 낯선 이의 팔에 제 팔을 엮고 음악에 맞춰 둥글게 춤을 출 정도로 기뻐했다. 거리 곳곳에서는 막내 공주님의 약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음식을 나눠주고, 종이로 만든 꽃잎을 뿌렸다.

겨울이 아직 지나가지 않았지만 거리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화사하고 풍요로웠다.

거센 말소리와 깃발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침입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길을 비켜라!”

“타락한 국왕을 처단하기 위해 온 네페르트 후작가의 군사들이다!!”

음악이 뚝 끊겼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하지 않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들 앞에 말에 탄 십여 명의 기사가 멈춰 섰다.

“길을 만들라는 소리 못 들었나? 지금부터 비키지 않는 자들은 베겠다!”

반란군의 기사가 소리치자 몇몇 사람들이 겁을 집어먹고 눈치를 보다가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떠나지 않고 웅성거리기만 했다.

“국왕 전하가 타락하셨다는 게 무슨 말이야?”

“왜 그거 있잖아. 국왕 전하가 마음에 드는 처녀들을 강제로 데려가서 하녀로 만들어서 희롱한다는 이야기.”

“나는 왕실의 빚이 많은 이유가 사치해서 그렇다는 걸 들었는데?”

“왕비 전하는 정부가 셋이나 있다지?”

“아니,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믿는 사람도 있어?”

“맞아. 국왕 전하가 어떤 분이신데!”

“이번에도 국고를 풀어서 산불이 난 곳을 구제하셨잖아. 빚을 졌으면 그것 때문에 졌겠지.”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자 기사는 초조해졌다.

궁전으로 빠르게 진입해야 하는데 계속 이런 식이면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기사는 누구 하나라도 베어 내서 본보기를 보여 길을 열 생각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막 검을 뽑아드려 할 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서 문을 걸어 잠그시오.”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이 반란군의 앞으로 나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평범한 옷을 입고 있는 터라 반란군의 기사는 마을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집으로 간다면 굳이 검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었다.

기사는 일단 검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자에게 반박하고 나섰다.

“당신은 뭔데 이래라저래라요?”

“맞소. 우리가 비키면 국왕 전하가 위험해지는 거 아닙니까!”

기사가 다시 검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남자가 몸을 돌려 기사를 베었다. 정적은 길지 않았다.

선발로 온 기사들이 전부 검을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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