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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81화 (81/151)

<81화>

“상황은 설명하지 말고 돌려보내는 게 낫겠다. 그렇지, 공주님?”

안 그래도 그렇게 말하려 했다.

나는 키네시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키네시아가 알겠다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며 로그리예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 모인 사람들이 궁전에 있는 인원이나 이동 경로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가만히 보았다.

눈도 귀도 전부 앞을 향하고 있는데 생각은 자꾸만 뒤로 물러난다.

보라색 태양이 눈앞에 떠 있는 것 같아 속이 매스꺼웠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해산하자. 다들 두 발 뻗고 푹 자고, 내일 봐.”

“그래. 이라네 잘 자.”

“좋은 꿈 꾸렴, 리아.”

“안녕히 주무십시오, 공주님.”

이런저런 인사에 대충 손짓으로 대답하며 집무실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복도에 발을 내딛자마자 속이 울렁거렸다.

로그리예가 내 곁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주었다.

안색을 살피듯 슬쩍 시선을 준 그가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손에 달라붙은 온기에 끌려가며, 나는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공주님. 요즘 항상 창문 잠가 두더라.”

“…….”

“노크해도 안 열어 주고.”

“…….”

“결혼하기도 전에 벌써 애정이 식은 거야?”

가벼운 말투와 달리 로그리예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나는 답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러다 양 볼을 꼬집는 손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로그리예가 불경스럽게도 내 볼을 양쪽으로 늘리며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라파일과 비슷한 청보라색 눈동자는 어둠에 잠겨도 색을 잃지 않았다.

속이 불편해 그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뒤로 밀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하도 대답이 없길래 유령인가 싶어서.”

그가 느물거리며 내 손을 치우고 양 볼에 짧게 입을 맞춘 뒤,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볼을 닦으며 그를 지나쳤다.

그러다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잔상이 로그리예의 위로 덧씌워져 얼마 못 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뒤돌아 로그리예의 청보라색 눈동자에 대고 똑바로 말했다.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알아.”

담담한 어조에 울컥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것이 치솟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나와 결혼하려고 해?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라파일은 그렇게 말했다. 내 곁이면 만족한다고.

하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깟 사랑이 뭐라고 완전히 자신을 놓은 채 미쳐 버린단 말인가?

로그리예도 그렇게 될 것이다.

원하지 않는다고, 만족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더욱 갈망하게 되겠지. 저 아름다운 색의 눈동자는 나 때문에 빛을 잃을 것이다.

두통이 일어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로그리예가 내 손을 붙잡아 제 쪽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라파일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뱉었다.

“아니. 나는 공주님께 사랑받을 거야.”

“…….”

“백 년이 걸리든 천 년이 걸리든. 이번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공주님은 반드시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 줄이 느슨해졌다.

긴장이 툭 풀리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로그리예가 나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 나는 인내하는 것엔 이골이 났거든.”

***

잠을 설쳤다. 그것도 악몽 때문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10분마다 깨어나서 잔 것 같지도 않았다.

피곤함에 정신이 몽롱하고 머리가 부서질 듯 아팠다.

‘로그리예를 옆에 끼고 잘 걸 그랬나?’

라파일과 펠리온을 동시에 떠오르게 하는 얼굴이라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심란해 내쫓았었는데…….

이렇게 심하게 악몽에 시달릴 줄 알았으면 그냥 둘 걸 그랬다.

한숨을 삼키며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방 안으로 키네시아와 플로레타가 들어왔다.

약혼식과 결혼식 치장은 여자 형제가 도와주는 게 관습이었기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일어나서 두 사람을 맞이하려는데 시녀들이 물건만 내려놓고 방을 빠져나갔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키네시아가 다가오며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내가 우리끼리만 있게 해 달라고 했어.”

“왜?”

“이것 때문에.”

키네시아가 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녀의 손은 3일간 금주한 술꾼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플로레타 역시 상태가 이상했다.

창백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는 숨을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플로레타에게 딱밤을 놓고 키네시아를 봤다.

“잘 내보냈어.”

동생 약혼식에서 벌벌 떠는 언니들이라니.

옷을 갈아입자마자 궁전에 전부 소문이 나서 네페르트 부인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것이다.

당일이니 갑자기 반란을 취소한다거나 할 순 없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나는 멀뚱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치마를 들었다.

키네시아가 냉큼 손을 뻗어 나를 도우려고 했다. 그녀의 손을 저지하고 허리끈을 묶으며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서 명상이라도 하고 있어.”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굳어 있는 플로레타를 끌고 의자로 향했다.

플로레타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코와 입으로 동시에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나를 힐끗거리다가 말을 걸었다.

“리아 너는 괜찮아? 무섭지 않아?”

“뭐가?”

“곧 반, 반…….”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두려운지, 플로레타는 희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오므렸다.

반란이 무섭냐니. 나는 그 질문이 귀엽고도 우스워 설핏 웃었다.

“차라리 약혼식이 무섭지.”

반란이야 내가 막 즉위했을 때 여러 번 겪어 봤지만 약혼식은 처음이었다.

라파일과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결혼했으니까.

반사적으로 떠올린 이름에 신경이 곤두섰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지만 통증을 외면하고 묵묵히 옷을 입었다.

상의에 끈을 꿰고 있는데 플로레타가 다가와 손을 거들었다.

“리아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가 보구나. 대단해…….”

내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사실은 라파일을 만난 뒤로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통제가 안 될 정도로 나약해지니 오히려 그 모습을 철저하게 숨기게 되었다.

그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내 삶에서, 유약함은 곧 죽음을 의미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느리게 떴다.

움직이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키네시아가 보석함 뚜껑을 여는 게 보였다.

떨림이 멎은 그녀의 손끝에 익숙한 목걸이 하나가 딸려 나왔다.

선명한 붉은 색의 보석. 드래곤의 심장이었다.

“왜 그게 거기 들어 있어?”

“이라네 네가 착용하겠다고 한 거 아니었어?”

“아니었어.”

다가가 목걸이를 다시 보석함에 집어넣었다.

“목걸이랑 귀걸이는 됐어.”

원래도 그렇게 치렁치렁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목걸이와 귀걸이를 안 하더라도 충분히 화려하니 괜찮겠지.

허리에 붉은 보석으로 된 장신구를 두르며 약혼식 절차를 떠올렸다.

참석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약혼 서약서에 서명하고 로그리예와 한 번, 룩소르와 한 번 춤을 춰야 한다.

그 뒤에 바로 무도회가 열리는데, 네페르트 부인은 아마 그때를 노릴 것이다.

축하 인사를 하며 접근하기 쉬우니 기습하기 적당했다.

어제 회의 때도 나왔던 이야기라 다들 알고 있겠지만 룩소르에게는 특별히 한 번 더 언질을 줘야겠다.

어차피 룩소르만 노릴 테니까 그만 조심하면 반겔레스가 반란군을 진압하고 궁전으로 들어올 때까지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거울을 한 번 본 뒤 플로레타와 키네시아에게 말했다.

“가자.”

밖으로 나가자 정말 오랜만에 잘 차려입은 포넨트가 보였다.

“네가 왕자긴 하구나?”

긴장으로 굳어 있던 포넨트의 얼굴이 툭 풀어졌다.

“야. 너는 어떻게 보자마자 시비를 거냐?”

“네 얼굴만 보면 자동으로 나와.”

“이게 진짜!”

딱밤을 때리려는 손길을 피한 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나와 비슷한 옷을 입은 로그리예가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텅 빈 내 목을 발견하자마자 눈썹을 늘어트리며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몸을 기대다시피 바짝 붙으며 서운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드래곤의 심장 안 했네.”

“안 한다고 했잖아. 목걸이 바꿔치기해 놓은 게 너야?”

“응. 당일에 보면 마음이 좀 변할까 싶어서.”

그가 순순히 시인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앞서가던 플로레타, 포넨트, 키네시아가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로그리예는 그들을 빤히 응시하며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포넨트가 그 미소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린 듯 키네시아와 플로레타에게 속삭였다.

“야. 쟤가 눈빛으로 꺼지라는데?”

“가자.”

“리아…….”

플로레타가 내 이름을 아련하게 부르며 제 형제들에게 끌려갔다.

나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로그리예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애들까지 보내?”

“응? 할 말은 없고, 그냥 둘이 있고 싶어서.”

실없는 소리 하기는. 혀를 차고 걸음을 옮기는데 로그리예가 내 손을 잡았다.

뒤를 돌자 그가 단단해 보이는 주먹을 내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뭐지? 때리겠다는 건가?

공격적으로 쳐다보자 로그리예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혼자 킬킬거리던 그가 주먹 쥔 손을 폈다. 그러자 그 안에서 목걸이가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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