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멍하니 텅 빈 자리를 보는데 로그리예가 달려와 내 어깨를 붙들었다.
“공주님, 괜찮아?”
괜찮지 않다.
그러나 입을 열 기력조차 없었다.
그냥, 쉬고 싶다. 이대로 잠들어 영영 깨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로그리예가 나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온기에 파묻혔으나 평소와 달리 안정되지 않았다.
그가 이끄는 대로 저항 없이 그의 어깨에 볼을 기댄 채 가만히 숨만 쉬었다.
로그리예는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있다가 나를 안아 들어 방에 데려다주었다.
“재워 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자꾸만 무너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혼자 있고 싶어.”
로그리예는 당장 나가지 않고 잠시 서 있다가 긴 숨을 내뱉었다.
“문 앞에 있을게.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숨죽인 발소리와 문 닫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나는 웅크린 채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어지러움이 가시지 않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상체를 바로 세웠다.
시선이 닿는 협탁에 익숙한 연고 통이 보였다.
그 밑에는 역시나 쪽지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손등에 바르세요. 사랑과 염려를 담아, R]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쪽지의 R은 로그리예가 아니라 라파일의 초성이었다. 그는 줄곧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
다급한 노크 소리가 차분한 분위기를 깨트렸다.
대신관과의 대화를 방해받은 네페르트 부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와요.”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온 집사가 허리를 굽혀 네페르트 부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알겠으니까 나가 봐요.”
집사가 네페르트 부인과 대신관에게 차례대로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다시 둘만 남자 대신관이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각한 일인가 봅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라네리아 공주의 약혼식이 3일 앞당겨졌다고 하네요.”
대신관이 잠시 아래를 보았다.
“우리의 계획을 눈치챈 것 같습니까?”
네페르트 부인은 대신관의 우려를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럴 리가요. 약혼식을 앞당기자고 한 것은 포넨트 왕자라던데요?”
“포넨트 왕자가 그런 제안을 할 이유가 있습니까?”
“성격 급한 거로 유명하잖아요. 준비가 끝났으니 빨리 해치워 버리자고 했대요.”
“흐음.”
대신관은 탐탁지 않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쳤으나 네페르트 부인은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그녀는 왕실에 들키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내부에 있는 사람들은 입단속을 철저히 해 작은 말도 새어 나가지 않게 했다. 같이 일을 도모한 사람들조차 믿지 못해 정확한 계획은 말하지도 않았다.
마법 물품이나 수상한 물건은 애초에 저택으로 들고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래도 괜찮아요. 왕실이 알았다고 한들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겠어요?”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게텔린 부인도 수상하게 움직이니 걱정이 되는군요. 다른 귀족들을 만나고 다닌다던데요”
“자기도 한번 껴 보려고 그러는 것이겠죠. 저도 알고 조사해 봤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왕실 사람을 만난 적도, 편지나 전령을 보낸 적도 없는걸요.”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전환했다.
“3일 당겨졌으면, 이제 3일 남았군요.”
“그러게요.”
네페르트 부인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은 척했지만 내심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괜찮아. 침착하자. 어차피 모든 준비는 끝났잖아.’
반란에 필요한 말은 상단을 사들여 팔기 위한 것으로, 사병들은 용병으로 위장시켜 수도로 들여놨다.
가담하기로 한 귀족들 역시 사병을 몰래 들여와 각자의 사택에 숨겨 두었다.
대부분 기사이니 궁전까지 오는 것에는 20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일정이 고작 3일 앞당겨진다고 달라질 건 없다.
“큰일이 너무 쉽게 풀려서 불안할 정도였는데, 오히려 안심이 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이 급해졌다.
당장 공범과 병사들에게 연락해 계획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려야 하나 싶었다.
차를 따르는 그녀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은 그 모습을 대신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리저리 튀는 작은 물방울마저 막을 순 없었다.
대신관이 당황하는 네페르트 부인의 손을 가볍게 내리눌러 주전자를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핀잔을 주는 대신 입가에 미소를 그려 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만약 왕실에서 눈치챘다면 약혼식을 앞당기는 게 아니라 병사들이 있는 곳을 치거나 주모자를 잡아들였을 겁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네페르트 부인이 안도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따뜻한 액체가 배 속에 고이자 불안으로 울렁이던 마음도 좀 진정이 되었다.
“그럼, 대신관님. 성기사들을 3일 후까지 준비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대신관은 당장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설마 이제 와서 발을 뺄 생각은 아니시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말씀이 없으시죠?”
“상황이 곤란해져서 그렇습니다. 이교도가 침입해 기사들을 전부 외각으로 보내서……. 지금 전갈을 보내도 5일은 지나야 돌아올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설명에도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신관은 동요하지 않고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차질 없이 합류했을 텐데, 일정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곤란하게 되었군요. 대신 제가 직접 동행하겠습니다. 내일 약혼식장에 함께 가시죠.”
레바나의 대신관은 궁전에서 열리는 행사에 단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 후작 부인은 내심 놀랐으나 거절하진 않았다. 그녀는 그만큼 대신관의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긴. 국왕 일가가 타락했다는 소문도 레바나에서 냈는데, 뭘 어쩌겠어.’
그 소문을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으나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을 심어 줄 정도는 되었다.
그 의심은 반란이 일어난 후 사실이 되어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정당성에 힘을 실어 줄 것이다.
대신관은 누가 뭐래도 가장 확실한 공범이었다.
거사는 코앞이고 도망칠 길은 없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전하들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쭉 둘러봤다.
국왕 일가, 왕당파 꼬질이들, 기사 단장과 반겔레스 셰피오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타솔라, 지시스, 미론은 내 뒤에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알아서 잘하리라 믿었다.
로그리예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끄덕이지 않아도 될 놈이라 내버려 두었다.
“특히 국왕 전하 보호에 신경 써야 해. 다치지 않도록.”
“……리아야. 왜 아빠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왜긴 왜겠어.
후계자도 아닌 공주를 구한다고 불길에 뛰어든 전적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옆에서 아무리 지켜 주려고 해 봤자 본인이 몸을 사리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룩소르에게 한 번 더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 고개를 틀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전하가 죽으면 다 끝이야.”
“……유념하마.”
“유념 말고. 자기 안위를 최우선으로 여겨야해. 알겠지?”
룩소르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말귀를 알아들은 것 같긴 한데 영 미덥지 못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기사 단장은 네페르트 후작 부인을 주시해.”
“네페르트 후작 부인을 말입니까? 그녀는 무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분명 기습에는 그녀를 따르는 다른 귀족을 쓸 것입니다.”
“글쎄.”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페르트 부인은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주변 사람을 믿지 않았다.
권력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니 국왕을 직접 죽여 제일 큰 공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기습이라면 오히려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는 후작 부인이 유리해. 무력이 없는 건 전하도 마찬가지니까.”
기사 단장은 국왕에게 잠시 불경스러운 시선을 주었다가 금세 수긍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크흠.”
룩소르는 차마 부정은 하지 못하고 불편한 소리만 냈다.
나는 미소 띤 얼굴로 룩소르의 손등을 토닥이는 오틸리에에게 말했다.
“왕비 전하는 일이 벌어지면 애들하고 연회장을 빠져나가. 그리고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사절단들을 대피시켜. 하먼하고 나머지들은…….”
“식장 안에 있는 귀빈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보호하겠습니다.”
“그래. 셰피오 자작은 반란군을 바로 진압할 수 있게 준비해. 민간인이 다치지 않도록 거리를 미리 통제하고.”
“예. 반란군이 이상한 걸 눈치채면 안 되니까 대로 주변과 광장은 제일 마지막에 하겠습니다.”
좋아. 이제 내일이면 네페르트 부인과 레바나의 대신관은 궁전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제 발로 찾아 들어와 자기 죄를 자백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로그리예가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질문하는 키네시아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내일 샤마흐의 신관이 축복을 내리기 위해 온다고 했는데, 미리 언질해 두는 게 어떨까?”
샤마흐라는 단어에 불현듯 라파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굳어졌다.
나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키네시아의 질문에 집중하려 애썼다.
“미리 언질을……. 그래. 줘야지.”
안 그래도 몇 없는 귀한 신관인데.
중얼거리듯 대답하는 와중에도 망가진 라파일의 모습이 머릿속에 불쑥 난입했다.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아 침묵하자 로그리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