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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79화 (79/151)

<79화>

라파일의 손끝이 내 손등을 파고들었다. 통증에 뿌리치려 했으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답해 보세요, 폐하.”

“너, 정말 라파일이 맞아?”

“제가 물은 건 그게 아닙니다.”

그가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꽉 다물린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끌어당기는 힘에 몸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의 손톱이 내 손등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저는 폐하를 위해 제 구원이자, 삶이자, 전부였던 샤마흐마저 저버렸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은 나와 재회하는 이 순간마저 펠리온 리베든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악에 받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수십 개의 초상화가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파도 앞의 모래성이 된 것만 같았다.

그에게서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네가 날 죽인 게 아니지? 라파일.”

“…….”

분노에 일그러지던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붙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네가 날 죽였다면 이렇게 괴로워할 리 없잖아.”

무표정한 얼굴 위로 눈물이 흘렀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물건들도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손등을 파고든 그의 손 위로 내 다른 손을 겹쳤다.

“말해 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던 라파일이 별안간 몸을 굳혔다.

그는 눈동자가 전부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부릅떴다. 곧 굵게 맺힌 눈물이 아래 속눈썹을 타고 후두둑 떨어졌다.

‘뭘 봤길래 저러는 거야?’

물어볼 틈도 없이 라파일이 떨리는 손으로 내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는 내 오른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촛대를 쥐고 있던 내 왼손도 놓아주었다.

살갗에 박혀 있던 그의 손톱이 빠지고, 옅게 난 상처로 피가 배어 나왔다.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내 손끝을 받쳐 들었다.

작은 상처 위로 그의 눈물이 떨어졌다.

찬 공기에 피부가 식은 탓인지 눈물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뜨거움도 잠시, 눈물이 지나간 자리는 겨울의 공기보다 더 차갑게 식었다.

섬뜩하고도 슬픈 감각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손을 빼내려고 할 때 그의 입술이 달싹였다.

“제가 또, 폐하, 폐하를…….”

그는 두려움에 질식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라파일, 잠깐 진정 좀,”

라파일의 움직임에 말이 끊겼다. 그의 이마가 내 손등 위로 떨어졌다.

순간 그의 몸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뿜어져 나왔다. 눈앞에 새하얗게 변할 정도였으나 나에게 스며들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감당할 수 없는 죄악에 짓눌린 것처럼 라파일이 휘청거리며 물러난 탓이었다.

“라파일!”

소리쳐 부르자 공허한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붙어 있는 얼굴은, 그의 위태로운 정신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했다.

“폐하.”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보다도 그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다가가려 했으나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쳐 나에게서 멀어졌다.

간격은 좀처럼 좁혀 들지 않아 걸음을 멈추자 그도 더는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여 내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으셨죠.”

“…….”

“로즈라에게 들은 그대로입니다. 샤마흐께서 내린 은총을 제 것으로 만들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손등에 새겨진 보라색 태양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것들은 뱀처럼 라파일의 손을 휘어 감더니 피부에 스미며 물감처럼 번졌다. 그의 손은 점점 검게 물들어 갔다.

“너, 손이…….”

“복수만을 위해서요.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없겠더군요. 폐하가 돌아오셨을 때 에피파네스를 되찾아 드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텐데. 안 그렇습니까?”

“라파일!”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는 피하지 않고 순순히 내게 잡혀 주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제대로 인지할 수가 없었다.

“너 이거 괜찮은 거야? 빨리 의사, 아니 신관에게……,”

“나는 다시 당신의 남편이, 당신은 다시 내 아내이자 위대한 황제가 될 겁니다.”

그의 몸이 신성력에 노출된 부정한 것들처럼 검고 끈덕지게 녹아내렸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정신 좀 차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게 해야 할 것 같아 그의 손을 힘주어 끌어당겼다. 하지만 라파일은 한 발자국도 끌려오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그 자리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힘이 빠져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그가 검게 녹아 흐르는 제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펠리온 리베든도 죽였으니 이제 당신은 온전히 제 것이에요, 폐하.”

긴 꼬챙이가 머리를 관통한 것만 같았다.

그대로 모든 동작이 멎었다. 가만히 들은 것을 되짚어도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펠리온을 죽이다니? 네가…….”

라파일이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

“이제 이 몸도 한계에 다다랐나 보군요. 다른 몸을 찾아야겠습니다. 그래도 걱정하진 마세요, 폐하. 영혼을 옮기는 실험은 성공적이니.”

“그게 무슨 헛소리야. 묻는 말에나 대답해!”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통제할 새도 없이 손이 뻗어 나갔다. 나는 그의 옷깃을 틀어쥐고 내 쪽으로 끌어왔다.

거대한 기둥처럼 꼼짝도 하지 않던 그의 몸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펠리온을 죽였다는 게 무슨 말이냐고!”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저를 막겠다기에 원하는 대로 해 주었을 뿐.”

그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손으로 내 양 볼을 감쌌다.

“그의 마력이 강하게 반발하도록 모든 신성력을 집어넣었습니다.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을 이 두 손과 두 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어요.”

“네가, 네가 어떻게, 네가 감히!!”

독극물 같은 색이 목까지 침범했다.

라파일의 고개가 옆으로 툭 꺾였다. 곧 크게 벌어진 입에서 흐느끼는 듯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큭, 흑흐, 흐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러다 돌연 웃음이 뚝 멎었다.

“제가 폐하를 죽였다고 했을 때는 그토록 침착하셨으면서……. 제가 그래서 그를 죽인 겁니다. 폐하께서 항상 그를 찾으시니까!”

“도대체 왜. 펠리온을 부른 건 일할 때와 임종 때뿐이었어. 난 너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너는……!”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가 엇갈려 미끄러지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라파일이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알아요. 항상 제게 다정하셨죠. 저 외에는 다른 누구도 폐하 곁에 두지 않았다는 것도 압니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에 눈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내 눈을 바라보던 그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런데 어떡합니까? 단 한 번이라도 이라네, 당신의 마음을 가졌던 그가 죽도록 미운데. 그를 증오하는 내가 너무나도 추악해 비참할 지경인데!”

“…….”

“당신이 죽고 난 뒤에도 멀쩡한 얼굴로 율시안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그를, 당신의 마음을 얻어 놓고 슬픈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는 그를!”

격앙되었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어떻게 살려 둘 수 있었겠어요.”

다리에 힘이 풀려 툭 꺾였다. 쓰러지려는 상체를 팔로 지탱했다. 몸도 생각도 움직이지 않아 멍하니 바닥만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당신을 잃을 뻔했는데 제정신일 수 있을 리가요.”

그가 주저앉은 나에게로 허리를 숙였다.

“제 존재를 알자마자 저를 찾으러 다니시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기쁘던지. 펠리온이 왜 그토록 폐하 곁을 맴돌았는지 이해가 가더군요.”

“너는, 네가……. 어떻게…….”

고장 난 톱니가 헛도는 것처럼 같은 말만 흘러나왔다.

그가 나를 배신했다. 펠리온을 죽였다.

이 두 가지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려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노려봤다.

“라파일.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부디, 그래 주세요.”

그가 내 앞에 앉아 눈을 맞췄다.

“사랑이든 증오든. 당신을 움직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저라면, 저는 만족합니다.”

그가 내 손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등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문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라파일은 잠시 소리가 나는 쪽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이내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이 내게 남긴 상처 위에 입을 맞췄다.

“곧 모시러 오겠습니다, 폐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뭉툭한 손으로 후드를 썼다. 넓고 어두운 모자 아래로 새하얀 미소가 감춰졌다.

망연자실하게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라파일이 몸을 돌렸다. 그의 등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쾅, 하고 거칠게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라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라파일을 응시했다. 그의 몸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빛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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